키스 자렛 [쾰른 콘서트]
강물처럼 흐르는 피아노
2020/9 • ISSUE 28
writerChoi Jeongdong 〈중앙일보〉 기자
1975년 1월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은 독일 쾰른의 오페라하우스에서 1시간이 넘는 즉흥연주를 펼쳤다.
음반 재킷의 스티커가 옛 기억을 불러낸다.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의 <쾰른 콘서트> LP 재킷 오른쪽 가슴에는 ‘£11.99’라는 가격표가 명찰처럼 붙어 있다. 노란색 스티커는 하얀 바탕에 흑백사진을 실은 재킷에서 더 도드라져 보인다.
1991년 여름, 나는 영국 셰필드에 있었다.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그 도시에서 열렸다. 마라톤의 황영조는 1등으로 들어오고도 힘이 남았는지 펄쩍펄쩍 뛰었다. 축구도 우루과이, 네덜란드 같은 강팀을 연파하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한국이 국제 대회에서 마라톤과 축구를 제패한 것은 최초였으나, 유니버시아드가 세계 대학생의 친선을 도모하는 대회인지라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날 셰필드의 음반 가게 ‘Record Collector’에서 판을 많이 사지는 않았다. 기대한 만큼 명반이 수두룩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레코드 서가에 살아남은 ‘셰필드 LP’는 5장 남짓인데 그중 <쾰른 콘서트> 정도가 멀리서 들고 온 보람이 있는 음반이다. 그런데 그날 이 음반을 발견하고 뛰는 가슴을 누르며 얼른 집어 든 것은 재킷 디자인 때문이다. 잡지에서 처음 봤을 때 강한 인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사진이 좋다. 피아노 측면의 둥근 선이 연주자의 얼굴로 흐르듯 이어져 몰아의 경지에 빠진 표정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디자이너는 사진을 최대한 잘라 선과 표정만 남겼다. ECM 음반사의 디자이너 바바라 보이어쉬Barbara Wojirsch는 자신의 디자인 철학에 대해 “단 하나의 본질적인 단상이나 몸짓만 남을 때까지 모든 것을 제거해버리는 작업”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쾰른 콘서트>도 그런 결과물이다. 나는 키스 자렛의 피아노 세계에 대해 알기도 전에 앨범 디자인에 반해 그 음반을 버킷 리스트에 넣어두고 있었다.
<쾰른 콘서트>는 즉흥연주로 이루어졌다. 1부에서 26분을 연주하고 잠시 휴식한 뒤, 2부에서 35분을 더 연주한다. 이후 청중의 갈채로 다시 7분이 이어진다. 1시간 8분간 악보도 없이 피아노를 친다. 키스 자렛은 세계 여러 무대를 돌며 즉흥 예술을 들려주었다. 한국에서도 연주한 적이 있다.
악보 없이 긴 시간 건반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키스 자렛에게 피아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세 살에 클래식 피아노를 시작해 여섯 살에 첫 독주회를 열고, 고교 시절엔 재즈에 빠져들었다. 버클리 음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나 ‘더 배울 것이 없어’ 자퇴했다. 직후 재즈 드럼의 전설 아트 블래키에게 발탁돼 그의 밴드 ‘재즈 메신저스’에서 공식 데뷔한다. 재즈는 즉흥의 세계다. 내가 친구와 밤새워 얘기할 때 대본이 필요하지 않듯, 그는 건반으로 말하는 데 악보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피아노는 그에게 입이나 손과 같다.
그렇다 해도 즉흥연주가 예술적인 경지에 도달해 청중이 감동하고, 음반으로 만들어지고, 반세기가 다 되도록 사람들이 계속 찾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나는 <쾰른 콘서트>를 들으면 강물의 도도한 흐름을 떠올린다. 간혹 소용돌이치고 폭포가 되어 떨어지지만 쉼 없이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을 닮았다. 어떨 땐 누군가의 길고 애달픈 하소연으로 들리기도 해 눈가를 적시기도 한다. 인생은 강과 같다.
30년 만에 키스 자렛의 음반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