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철 화이트리드
사물과 공간의 시학
2020/11 • ISSUE 30
레이철 화이트리드는 인간의 손길이 닿는 친숙한 사물과 공간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한 편의 시를 쓰듯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조각의 전통적인 캐스팅 기법으로 완성된 유령처럼 새하얀 작품에는
“사물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이 담겨 있다.
writerKim Jaeseok(갤러리현대디렉터) editorKim Jihye
“올해는 정말 이상한 해지만, 예술가는 늘 혼자잖아요. 그렇게 고립되는 일에 익숙해도, 가끔은 으스스할정도로 너무 고요합니다.”
레이철 화이트리드는 팬데믹이 초래한 ‘고독’에 관해, 그녀가 만든 작품의 겉모습만큼 담백하고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모두를 혼란에 빠뜨린 불확실성의 시기에, 그녀는 런던의 두 스튜디오에 틀어박힌 채 매우 ‘창의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제 스튜디오 하나는 작고 따뜻하고 깔끔한데, 다른 하나는 크고 지저분해요.”
캐스팅 기법에 눈뜨다
“장소와 사물은 그곳이나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을 이끄는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요. 역사의 손길과 시선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습니다.”
조각을 향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다
주변 사물을 하나둘 캐스팅하며 사물과 공간의 ‘영혼’에 딱딱한 몸을 부여하는 실험을 진행한 작가는 공간 전체를 떠내는 야심 찬 작업에 착수한다. 1991년 발표한 ‘Ghost’는 빅토리아식 테라스 하우스의 벽난로가 있는 방을 콘크리트로 주조한 작업이다. 작가는 방을 부분마다 세심하게 떠내고 이를 철제 구조물에 결합해 속이 빈 큐빅 덩어리로 만든 이 작품을 계기로 캐스팅 기법을 건축적 규모로 확장시켰다. “(이러한 건축적 작업에서) 디테일도 중요하지만, 공간과 공백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가 핵심입니다.” 1993년에는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Home’을 공개했다. 런던 이스트엔드의 공원에 홀로 남은 어느 집 내부에 철 구조물로 틀을 만들고 콘크리트를 잔뜩 뿌려 통째로 떠냈다. 전형적인 영국식 3층 집을 거푸집 삼고 그 내부를 외부화한 거대한 조각품은 공공 조형물에 대한 대중의 편협한 인식을 표면화했고, 동시에 영국 사회에 만연한 계층 및 부동산 갈등, 젠트리피케이션 등을 둘러싼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은 몇 개월 뒤 해체되어 영영 사라졌지만, 조각에 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 당시 서른 살이었던 작가는 그해 최연소로, 그리고 여성 작가로는 처음으로 터너상을 수상했으며,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영국관 대표 작가로 선정되며 국제적 명성을 쌓았다.
건축적 규모로 확장된 조각
이후 레이철 화이트리드는 장소와 사물의 본질을 역사적 맥락과 관점에서 사유하는 공공 프로젝트를 잇달아 선보여 찬사를 받았다. 그는 장소와 사물이 지닌 힘을 믿는다. “장소와 사물은 그곳이나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을 이끄는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요. 역사의 손길과 시선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습니다.”2000년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인 지구에 영구 설치된 홀로코스트 기념비에 이러한 작가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6만5천 명의 유대인에게 헌정한 이 작품은 ‘이름 없는 도서관’을 떠올리게 한다. 책이 빼곡하게 꽂힌 도서관 선반의 뒷면을 캐스팅해 사방을 둘러싸고, 정면에는 영구히 닫힌2개의 문을 두었다. 평가나 발언 이전에 희생된 이들을 향한 말없는 추모가 우선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담은 작품이다. 2001년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 세운 ‘Monument’는 반투명 합성수지로 캐스팅한 대좌가거울에 반사된 듯 거꾸로 뒤집혀 있다. 보통 조각품의 무대로 활용하는 기단 자체를 작품화한 것이다. “인간이 만든 구조물은 장소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제게 흥미의 원천입니다. 왜 그런지 설명하기는 어려워요.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제가 조각을 만드는 것 아닐까요.” 2010년대 이후에는 작가 스스로 ‘수줍은 조각(shy sculpture)’이라 부르는 공공 조각품을 발표하고 있다. 사막이나 섬 등 인적 드문 장소에 자신의 지문을 하나둘 새기듯 나무로 지은 헛간이나 피난처 등을 콘크리트로 캐스팅한 작품을 만들어두었다.레이철 화이트리드의 작품은 캐스팅한 대상의 부재를 강렬하게 증명하며 관람객에게 생경함과 익숙함,멜랑콜리한 감정을 동시에 안겨준다.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의 흔적만 남긴 그의 유령과 같은 작업이사물과 공간을 ‘미라화’하거나, 그것의 ‘데스마스크’를 만드는 일에 종종 비유되는 이유다. 가장 친숙한 사물에서 출발해 대형 건축 프로젝트로 작업 범주를 꾸준히 확장해온 그가 언젠가 구현하고 싶은 상상의 작품은 무엇일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화산 안쪽이나 계곡 전체를 캐스팅하고 싶어요.”
Installation view, Detached exhibition, Gagosian, Britannia St, London, 11 April - 25 May,2013.
©Rachel Whiteread. Photo Mike Bruce.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gos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