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머금은 몸
이불, ‘사이보그’
2021/01 • ISSUE 32
editorKim Jihye
writer Hyo Gyoung Jeon 아트선재센터 큐레이터
Photo by Mark Metcalfe ©Getty Images
“이 세계의 추한 것만 보려는 이들이 있죠. 혼란스러운 것들만요. 저는 아름다움을 보려 해요. 저는 그런 사명이 있다고 믿어요(Some people choose to see the ugliness in this world, the disarray. I choose to see the beauty. To believe there is an order to our days).”
2016년부터 방영한 미국 HBO의 TV 시리즈 〈웨스트월드〉에서 ‘호스트’로 불리는 사이보그 돌로레스의 대사다. 〈웨스트월드〉에서는 호스트라는 사이보그를 ‘웨스트월드 파크’라는 곳에 넣어 미국 서부 영화 속 인물로 등장하게 한다. 비용을 지불한 ‘게스트’들은 이 파크에 들어가 영화 내용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 심지어 호스트를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호스트는 겉으로 (심지어 몸속 장기도) 인간과 구분이 되지 않지만 프로그램에 따라 성격과 사고방식이 형성되어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다. 돌로레스의 대사는 프로그래머를 통해 입력된 성격에 따라 생성된 것이며 그가 ‘보고 있는’ 세계는 가짜일 뿐이다. 아름답다는 추상적인 개념은 사이보그인 돌로레스의 프로그램 안에서 조작되었고, 프로그램에 의해 어떤 대상이든 ‘아름다움’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다.
인간 형태를 띠고는 있지만 과하게 매끈하며, 단단하지만 성격이나 감정은 없는 존재. 사이보그는 ‘사이버네틱스 cybernetic’과 ‘오가니즘 organism’을 합성해 만든 말로 생물과 기계장치의 결합체를 뜻한다. ‘사이보그’라는 말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것으로, 이 말을 들었을 때 누구나 상상하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그간 사이보그의 이미지는 여러 형식으로 다양화되어 이제는 그 존재가 익숙하게 느껴진다.
여성의 몸 ‘사이보그’
이불의 ‘사이보그’ 시리즈는 언뜻 비율이 이상적인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신체 비율은 아니다. 이 형태에 달라붙어 있는 기계장치와 함께 여전사 이미지를 지닌 ‘사이보그’는 이불이 일본의 망가나 애니메이션에서 참고한 형태라고 한다. 사지 중 한두 개가 잘려나간 이불의 ‘사이보그’는 피부와 닮은 재질이자 신체 보형물 재료로 쓰이는 실리콘, 폴리우레탄으로 제작했다. 이 작품은 1998년 처음 만들어진 이후 형태와 재료를 조금씩 달리해 현재까지 연작으로 제작되고 있다. 이 작품을 처음 국내 관객에게 선보인 것은 1998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국내 첫 개인전에서였다. 전시된 작품을 보면 바닥에 놓이지 않고 매달린 형태로 설치되었는데, 중력의 영향을 받기보다 공간을 떠다니는 듯한 환영을 만들어낸다. 성적인 매력을 지닌 여성에 대한 환상은 한순간 멈추고 흡사 교수형을 당한 것 같은 형상에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여성의 몸에 기술이라는 상징성을 더한 사이보그의 몸에서는
인체와 기술을 정확히 분리할 수 없고, 둘 중 어떤 것도 우위에 놓일 수 없다. "
Installation view of ‘Lee Bul’, Artsonje Center, Seoul, 1998.
Photo by Rhee Jae-yong.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Willing To Be Vulnerable', 2015–2016. Installation view of ‘Utopia Saved’,
The Manege Central Exhibition Hall, Saint
Petersburg, 2020. Photo by Vasily Bulanov. ©Image courtesy of The Manege Central Exhibition Hall.
아름다움과 호러의 공존
런던의 헤이워드 갤러리 큐레이터 스테파니 로젠탈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불 작가가 청소년기에 우연히 마주친 한 사건에 대한 강한 인상이 그의 작업을 이끌어왔다고 한다. 이불은 당시 오토바이를 탄 남녀가 빵집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케이크와 함께 무너져 내린 빵집 풍경에는 케이크의 달콤함, 크림의 부드러움, 그리고 피범벅이 된 사람들이 버무려져 있었다. 이불은 당시 목격한, 지극히 연약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광채를 내뿜던 그 연인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아름다움과 호러, 연약함과 강함에 대한 역설과 대조는 언제나 그녀의 작업에서 중심적인 지점이 되었다.
1964년 한국에서 태어난 이불은 정치적인 격변의 시기를 몸소 겪으며 자랐다. 이불이 활발하게 활동한 1980년대 후반에는 미술계에 기존 체제를 비판하는 흐름이 있었고, 이불은 기존 제도로서의 미술관에 저항하는 그룹 ‘뮤지엄’의 멤버로 활동하면서 그 흐름에 참여했다. 1990년대에는 여성 인권에 대한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성폭력특별법’이 1993년에,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한 ‘여성발전기본법’이 1995년에 제정되는 등 성평등과 여성 복지에 대한 문제의식 등이 생겨났고, 여성주의 미술도 활발하게 개진되었다. 가파르게 발전하는 대중매체와 함께 외국 문화의 유입이 가속화되면서 우리나라의 문화는 더욱 다채로워졌다. 그만큼 경제도 크게 발전했지만 갑작스러운 변화에 따른 사회문제도 많았다. 여성 인권 문제와 관련된 숙제는 여러 방면에서 나타났는데, 대중매체에서 여성을 특정 스테레오타입에 따라 규정짓고 대상화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특히 일본의 망가나 애니메이션을 포함해 영화나 TV, 잡지 등에서 묘사되는 여성의 모습은 한국 및 동아시아권에서 여성의 몸에 투사하는 여러 형태의 욕망으로 나타났다. 이불의 작품은 이런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서 발전했고, 1990년대부터 여성의 몸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었다.
‘사이보그’는 이러한 기억을 머금고 있다. 여성의 몸에 기술이라는 상징성을 더한 사이보그의 몸에서는 인체와 기술을 정확히 분리할 수 없고, 둘 중 어떤 것도 우위에 놓일 수 없다. 〈웨스트월드〉의 돌로레스가 세상을 아름답다고 믿기로 한 것처럼, 아니 돌로레스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프로그래밍된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가 결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과 의미를 순진하게 믿어버린 것은 아닐까? 변화하는 기준과 가치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것에 기댈 수 있을까? 1990년대에 미래를 예언하듯 태어난 ‘사이보그’는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던 2020년을 지내온 우리에게 더욱 현실처럼 다가온다.
“아름다움과 호러, 연약함과 강함에 대한 역설과 대조는 언제나 그녀의 작업에서 중심적인 지점이 되었다."
‘Civitas Solis II’, 2014. Installation view of ‘Utopia Saved’, The Manege Central Exhibition Hall, Saint
Petersburg, 2020. Photo by Vasily Bulanov. ©Image courtesy of The Manege Central Exhibition H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