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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의 문을 열면 낯선 여행이 시작된다. 건축가 에치오 리바는 클라이언트를 위해 동서양이 혼재하고 과거와 오늘의 시간대가 공존하는 반전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하늘로 이어질 것같은 나선형 계단은 이 집의 하이라이트다. 설치미술 작품 같은 계단은 집 전체의 콘셉트를 관통한다.
우리는 건축과 함께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들 때까지 건축가의 고민과 배려가 깃든 건축물에서 일상을 쌓아간다. 건축물은 평범하게 스치는 일상과 습관에도 영향을 미치고 삶을 변화시킨다. 건축가의 시선에서 다 각도로 바라본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이탈리아 밀라노 공과 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1979년 자신의 이름을 건스튜디오를 개업한 에치오 리바Ezio Riva는 이처럼 건물 형태에 따라 삶의 관점이 달라진다고 믿는 건축가다. 그래서 랜드마크라 불리는 화려한 상업 건축물보다 거주하는 이의 삶을 끌어안는 주거 프로젝트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지난 44년간 매년 주거 프로젝트를 빼놓지 않고 실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건축은 클라이언트와 대화를 나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지와 건물을 확인하기 전 건축주를 먼저 만나죠.” 밀라노 중심지에서 멀지 않은 문화유산 보호지구에 위치한, 1백여 년 이상의 시간을 품은 고아한 벽돌 건물. 건축주는 17세기 장벽으로 둘러싸인 이곳을 주거 공간으로 개조하고자 했다.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어떤 집’보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물어봅니다. 가능하다면 그들이 현재 살고 있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려 하죠. 그 들과 나누는 사소한 대화와 행동에서 영감을 얻을 때가 많아요. 건축가는 클라이언트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자신 의 습관과 숨은 스토리를 파악하고 그들의 삶을 드라마틱 한 공간으로 구현해야 합니다.”
움직이는 변화무쌍한 집
에치오 리바는 수시로 건축주를 만나 예술, 문화, 영화, 문학 등 주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삶에 성큼 다가섰다. 중국 상하이와 이탈리아 밀라노를 오가면서 사업을 하는 건축주 부부는 앤티크 가구에서 컨템퍼러리 아트 작품까지 수집하는 예술 애호가였다. 중국, 티베트, 베트남 등에서 구한 진귀한 그림과 도자기를 소장했고, 특히 동서양 역사를 관통하는 지식과 열정이 대단했다. 웃돈을 주고서라도 보호 지구 건물에 살고 싶어 하는 이유를 이해할수 있었다. 가장 큰 미션은 이 부부가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으면서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아트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떠오른 아이디어가 ‘연결’과 ‘차단’이었죠. 평소에는 부부 둘만의 아늑한 공간인데 사람들이 모이면 화려한 파티 장소가 될 수 있는 다재다능한 집.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부피를 늘릴 수 있는 변화무쌍한 공간을 떠올렸어요.”
이 주택은 1980년대 부동산업체가 주거지로 개조했다가 공사를 중단한 이력이 있었다. 건물 내부는 불필요할 정도로 분할되어 있었는데, 에치오 리바는 이를 장점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공간마다 문을 달아 개폐 여부에 따라 공간 규모를 결정할 수 있게 만든 것. 예를 들어 평소 1층을 거실로 사용하다 손님이 찾아오면 문을 개방해 대연회장처럼 활용하고, 다이닝 룸으로 연결하는 문을 열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이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누가, 얼마나 많은 인원이 함께하는지에 따라 집은 새로운 동선과 구조를 지닌 공간으로 변신한다. “클라이언트의 요청은 없었지만, 건축가로서 판단했을 때 이들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었습니다. 계단으로 수직 구조를 추가해 1층은 공적 영역, 2층은 가족과 함께하는 사적 공간으로 구분 짓고자 했죠. 용도에 따라 수평 공간을 나누는 도구가 문이라면 수직 구조를 움직이는 동력은 계단이 되는 셈이죠.” 건축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계단 꼭대기 층에 부부만의 아늑한 비밀 공간을 만들었다. 어두웠던 다락방을 확장하고 지붕과 아치형 기둥 창문에 커다란 유리창을 달아 반가운 손님처럼 찾아온 빛이 오래 머물 수 있도록 한 것. 앤티크 작품으로 둘러싸인 레드 컬러 소파에 앉으면 수백 년의 시간을 품은 성벽을 마주할 수 있다.
에치오 리바가 건축주 부부의 취향을 고려해 만든 다도실이자 명상실. ‘붉은 방’이라 불린다.
매장에서 만나요
건물 형태에 따라 주거하는 이의 삶의 관점이 달라진다고 믿는 건축가 에치오 리바.
©photographer Cristina Fiorentini
매장에서 만나요
19세기 말 티베트 가정집에서 쓰던 콘솔, 청동 하부구조가 포인트인 마우로 모리Mauro Mori의 크리스털 상판 테이블, 베니니Venini의 1960년대 앤티크 샹들리에가 조화를 이루는 게스트 다이닝 룸.
1층 응접실에는 동서양의 미감을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이 즐비하다. 크리스티앙 리에거Christian Liaigre의 모던한 스타일 아이보리 컬러 소파, 각종 매거진과 오브제를 올려둔 잉그리드 도나Ingrid Donat의 잉카 커피 테이블, 램프로 변신한 19세기 중국 도자기 화병, 펑량홍Feng Liang Hong의 아크릴 추상 작품이 멋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과거와 현재, 드라마틱한 반전
하늘을 향해 빙글빙글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은 이 집의 백미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마주하는 계단은 집 전체를 관통하면서 예술과 앤티크, 과거와 현재라는 키워드를 조합한다. “계단 그 자체가 컨템퍼러리 설치 작품이자 아름드리나무로 보였으면 했어요. 아티스트 모글리아노 베네토Mogliano Veneto와 협업해 만들었죠.” 녹슨 듯한 브라운 컬러 코르텐 스틸 소재는 마치 나무껍질처럼 보인다. 계단 발판은 이로코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한 발 한 발 딛고 올라설 때마다 바닥 조명이 하나둘씩 켜지고, 밤이 되면 소용돌이 중심의 수직 조명 시스템이 동굴에 스며든 한 줄기빛처럼 공간을 밝힌다. 건축가는 땅과 하늘을 잇는 신성한 나무를 떠올렸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난제가 나선형 계단이었어요. 마감 일정까지 마음에 쏙 드는 감촉과 형태를 지닌 소재를 찾을 수 없어 애가 탔죠. 적당하게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한 끗 차이로 주거하는 이의 삶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일정을 조절해가며 공을 들였어요.”
오리엔탈 스타일과 클래식 미니멀리즘의 조우
건축가의 세심함이 깃든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을린 청동 도어 프레임, 실크 텍스처 욕실 타일, 격자무늬 거울 등의 디테일을 구현하는 데 오랜 시간을 보냈다. 복잡한 수학 공식을 풀어내듯 그는 공간마다 다른 소재와 컬러, 재질을 적용하고 건축주의 취향에 따라 다문화적 시선을 반영했다. 건축가는 건축주 부부의 일상을 관찰하면서 특히 염두에 둔 공간이 있었다. 붉은 벽지로 전체를 마감해 ‘붉은 방’이라 불리는 곳으로, 2층 가족용 다이닝 룸에서 한발 더 내디디면 만날 수 있는 정적인 공간이다. 차를 좋아하는 부부가 다도와 명상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이곳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마저 든다. 부부는 이 붉은 방에 19세기 중국식 안락의자를 두고, 그 사이에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스타일의 궤를 배치했다. 궤 위에는 상하이 상시아ShangXia 디자인 스튜디오의 찻잔 세트를 가지런히 올려두어 다도 공간이라는 것을 나타냈다. 이곳에서는 미니멀 스타일의 조르제티Giorgetti 소파도 눈에 띈다. 동서양의 서로 다른 시대의 기물이지만 포인트가 되는 패브릭으로 커버링해 같은 시리즈의 가구처럼 보인다. 안락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면 티베트 사원에 있을 법한 신비스러운 문양이 그려진 붉은 천장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개조 공사를 하며 천장 안쪽에서 구조적인 우드 조각 천장을 발견했습니다.건물의 옛 흔적에 새로운 그림을 더한 것이죠. 서양 건축 구조와 동양 건축 디자인의 교집합이라 할 수 있어요."
기능적인 집이란 클라이언트의 상황과 목적에 따라 자유자재로 영역을 달리하며 타인과 개인 모두를 품을 수 있는 공간이라고 건축가는 믿는다. 손님이 찾지 않은 고즈넉함을 만끽하고 싶을 때 부부는 주로 미니 거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메인 응접실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곳에는 프랑스 가구의 정수 크리스티앙 리에거Christian Liaigre의 오피움 소파를 포인트로 두었다. 우아한 미감이 돋보이는 이 소파는 미니 거실 전체의 분위기를 밝혀주는 역할을 한다. 소파 위에 걸린 그림은 아티스트J. L의 작품으로 현란한 페인팅이 우아한 오브제들과 대조를 이룬다. 공간의 모서리 벽 선반에는 라리크의 꽃병 컬렉션이 진열되어 있다. 대부분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부부의 격조 높은 안목을 확인할 수 있는 아이템들이다.보통 역사와 문화가 깃든 집을 개조한다고 하면 건축물 자체가 품은 세월의 흔적과 기억을 복원하는 데 집중하기 마련. 하지만 에치오 리바는 내부를 기능적이고 현대적인 관점으로 해석함으로써 드라마틱한 반전의 집을 만들었다. 건축가는 세련된 감각으로 치밀한 틀을 만들고 건축주는 고풍스러운 예술 작품으로 시간의 흔적을 입혔다. 그렇게 건축주와 건축가가 서로 조금씩 알아가면서 하나둘 채워진 집은 어느 시대, 국적, 문화에도 속하지 않은 유일무이한 공간으로 거듭났다.
부부 단둘이 지낼 때는 주로 미니 거실을 이용한다. 기능적인 집은 이처럼 상황과 목적에 따라 자유자재로 영역을 달리한다.
매장에서 만나요
나선형 계단을 따라 꼭대기 층에 오르면 지붕으로 내려온 빛 조각을 만날 수 있다.
매장에서 만나요“ 이 주거 프로젝트의 핵심은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동서양 문화를 뒤섞는 것이었어요.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수집한 오리엔탈 앤티크부터 컨템퍼러리 작품까지
건축주의 다문화적 삶을 반영하는 방법이었죠.”
여러 시대를 응축한 듯한 고가구와 예술품이 한데 모여 갤러리를 연상시킨다.
writer Gye Anna
editor Lim Jim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