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그 ‘솔베이그의 노래’
최후의 구원
2021/06 • ISSUE 37
writerChoi Jeongdong 〈중앙일보〉 기자
그린란드로 가는 길은 멀었다. 비행기는 지는 해를 좇아 서쪽으로 날아 핀란드 헬싱키에 내려앉았다. 갈아탄 비행기는 스칸디나비아를 가로지르고 푸른 바다 위를 해가 지도록 날았다. 아이슬란드는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회담할 때 지도를 펼쳐놓고 찾아본 곳인데 이름과 달리 포근했다. 다음 날 비행기는 다시 바다를 건너 그린란드 상공에 진입했다. 내려다본 거대한 땅은 이름과 달리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수도 누크에서 다시 북극 방향으로 비행한 끝에 목적지 일루리사트에 도착했다. 협곡이 보이는 언덕에 오르니 거대한 빙하가 바다를 향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린란드의 집들은 빨갛고 파랗고 노란 원색이었다. 건물이 밀집된 곳을 멀리서 바라보니 몬드리안의 모자이크 같았다. 색은 원래 건물의 쓰임새를 나타냈다. 빨강은 상업용, 노랑은 병원, 파랑은 생선 가공 공장이었다. 눈이 많이 내리면 길이 사라지고 지형도 변해 어느 건물이 학교이고 병원인지 헷갈렸다. 18세기에 그린란드에 들어온 덴마크 사람들은 건물 기능별로 약속된 색을 칠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구분이 사라져 건축가가 임의로 색을 선택한다.
페르는 숲속에 오두막을 짓는다. 출입문 위에 순록 뿔을 붙인 것은 원래 페르귄트라는 캐릭터가 노르웨이 민속에서 사냥꾼이기 때문이다. 오두막을 짓자 연인 솔베이그는 가족을 떠나 페르에게 온다. 그는 솔베이그의 진심에 감동하지만 다시 그녀를 떠난다. 그녀에게 기다려달라고 하고 세상을 방랑한다. 그리고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솔베이그는 긴 세월을 기다린다. 순록 뿔이 달린 문 앞에서 햇살 속에 앉아 물레를 돌리며 페르를 기다린다.
페르는 모험과 돈을 찾아 세상을 떠돈다. <페르귄트 모음곡>의 ‘아침 풍경’은 노르웨이의 숲이나 피오르가 아니라 아프리카 모로코 해안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페르는 이곳에서도 탐욕의 나날을 보내며 세월을 허송한다. 솔베이그는 오두막에서 홀로 노래한다. ‘솔베이그의 노래’다. “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 그 여름날이 가면 또 세월이 간다/ 아, 그러나 그대는 내 님일세/ 내 정성을 다하여 늘 고대하노라.”
페르는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노르웨이 해안에서 풍랑을 만나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빈털터리가 된 늙은이는 오두막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는 백발이 된 솔베이그가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다. 페르는 통곡하며 참회하지만 솔베이그는 그를 위로한다. “그대 덕분에 내 삶은 아름다운 노래가 되었고 우리는 오래도록 만나지 못했지만 내 사랑은 항상 나와 함께했네.” 페르는 솔베이그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외친다. “나의 어머니여, 아내여, 나를 숨겨주세요.” 페르는 죽어가고 솔베이그는 자장가를 부른다. “내가 지켜줄게, 자거라. 좋은 꿈을 꾸어라, 사랑하는 아들아.” <페르귄트>는 이렇게 끝난다.
그리그는 이 드라마에 20곡이 넘는 음악을 붙였다. 우리가 흔히 듣는 <페르귄트 모음곡>은 작곡가가 추려낸 여덟 곡이다. 그중에서도 ‘솔베이그의 노래’는 우리나라 음악 교과서에 실렸다. 구슬픈 가락은 드라마 내용을 몰라도 가슴에 젖어든다.
그런데 페르귄트는 도대체 누구일까.바로 우리다. 인간의 영혼은 헛된 방랑을 멈추지 않는다. 방랑이 끝나는 순간 어느덧 죽음이 기다린다. 그러면 솔베이그는? 떠난 남자를 기약 없이 기다리는 가여운 여인이 아니라 영혼의 안식처다. 마지막 순간에 우리를 위로하는 최후의 구원이다. 순록 뿔이 달린 숲속 오두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