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아름답다. 섬 1백18곳, 운하 1백50개, 다리 3백78량으로 이루어진 이 도시는 바다를 골목 삼아 존재한다. 자동차나 철도보다 곤돌라와 수상 버스가 더 익숙한 도시로 잔잔한 수면을 따라 양쪽으로 늘어선 상점과 카페가 인상적이다. 특히 이곳은 저녁 풍경이 일품이다. 바다가 석양을 반사해 도시 전체를 불사르는 듯 장엄한 낙조는 황홀하기 그지없다. 베네치아를 방문한 후 니체는 ‘나의 행복’이라는 시를 썼다. 이 시는 행복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가라, 가라, 음악이여!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갈색의 부드러운 밤이 오기까지 자라라!/ 가락을 울리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고,/ 황금 장식이 아직 장밋빛으로 물들지 않았다./ 낮은 아직 많이 남았다./ 시를 짓고, 산책하며, 홀로 소곤대는 낮이./ “나의 행복이여, 나의 행복이여!”
니체는 산마르코 광장을 즐기는 중이다. 이 광장에 복음서 저자 중 한 사람인 마르크(마가)의 유골을 모신 산마르코 대성당과 높이 치솟은 붉은 종탑이 있다. 베네치아를 정복한 후 나폴레옹은 이곳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는 찬사를 남겼다. 11세기 말에 건축한 산마르코 성당은 18세기까지 거의 7백 년에 걸쳐 꾸준히 장식을 더해가면서 사람들 눈을 사로잡았다. 니체가 방문한 19세기 말에는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했을 것이다.
니체는 오전부터 밤까지 온종일 앉아 광장의 고요한 평온과 비둘기 떼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흠뻑 즐긴다. 광장의 풍광은 정녕 아름답기 그지없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기쁨을 일으킨다. 그러나 니체는 진짜 강렬한 행복을 알고 있다. 음악이다. 첫 행에서 니체는 ‘가라, 가라’고 두 번이나 외치면서 광장에 음악을 풀어놓는다. 광장은 완전하지 않다. 음악 역시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 풍경을 완성하는 것이 음악이라는 듯, 음악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풍광이라는 듯, 니체는 ‘자라라!’라고 음악에 주문한다. 인생이 예술 없이 완성될 수 없다면 광장도 마찬가지다. 음악 없는 광장은 광장이 아니다. 하루가 저물어 태양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밤이 찾아올때까지, 인간은 온갖 경험에서 지혜를 누적하고 음악은 한낮의 소음을 빨아들여 숙성되어야 한다.
니체는 밤이 오기를 인내하면서 세 차례 ‘아직’을 반복한다. 애타는 이 부사는 ‘때가 되지 않았음’을 강조하면서 언어에 강렬한 리듬을 부여한다. 낮이 아직 많이 남았기에 소음이 잦아들어 음악만 광장을 채우기엔 이르고, 사방의 건물을 꾸민 황금빛 장식 역시 황혼이 온 세계를 붉게 물들이는 장미의 시간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니체는 갈색의 부드러운 밤 속으로 퍼져나가는 음악을 기다리는 중이다. 니체는 이것이 ‘행복’이라고 두 차례나 강조한다.
행복은 언제나 기다림의 형태를 띤다. 달은 둥글면 이지러지고, 활짝 핀 꽃은 조만간 떨어진다. ‘이미’는 우리를 허무하게 하고, ‘아직’은 우리를 즐겁게 만든다. 진정한 행복은 기다리는 동안 우리를 찾아온다. 두근대는 마음, 진실이 번갯불같이 나를 내려치는 순간까지 가슴을 졸이면서 기대하는 심정이 행복의 정체다.
물론 아무렇게나 기다려서는 안 된다. 니체는 “시를 짓고 산책하며 홀로 소곤대”면서 기다린다고 말한다. 시는 일상 너머에 있는 의미를 상상하는 일이고, 산책은 느긋함 속에서 세상과 자연을 관조하는 실천이며, 홀로 소곤대는 것은 자아를 챙기고 성찰하는 행위다. 이처럼 고요히 영혼을 돌보는 마음에만 행복은 찾아온다.
기다림의 반대편에 안절부절못하는 조바심이 있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은 의미 있는 시간은 설탕물 같다고 말한다. 달콤함을 즐기려면 설탕 한 조각이 물에 녹는 동안 느긋이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창조적 진화>에서 베르그송은 말한다. “만일 내가 설탕물 한 잔을 만들려고 한다면, 좋든 싫든 설탕이 물에 녹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도무지 기다릴 줄 모른다. 기다림이 무의미하다고 여기면서 황급히 물을 휘젓거나 관심을 돌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빠르게 이동시킨다. 베르그송은 ‘좋음’과 ‘싫음’ 사이에서 요동치는 이 마음을 조바심이라고 했다. 산만함은 행복의 적이다. 행복은 좋음에 마음을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고, 시간을 잊고 하나에 몰입하는 것이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기웃대는 마음은 행복을 모른다.
조바심은 기다림을 지루함으로 바꾸고, 기다리는 마음을 불행의 주머니로 만든다. 설탕 조각이 녹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은 ‘두근두근한 내 인생’을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삶으로 타락시킨다. 마음대로 되는 인생은 없다. 바라는 일 대부분은 이루어지지 않거나, 설령 이루어지더라도 곧바로 식상해져 아주 짧은 시간에만 우리에게 행복감을 준다. 달콤한 설탕물을 맛보는 짤막한 순간이 행복이 아니라 설탕이 녹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행복이다.
행복은 재빠른 성취가 아니라 느긋한 기다림에 달려 있다. 예감하면서 두근대는 마음은 삶의 모든 순간을 행복으로 물들인다. 그러나 기다림이 지루함으로 느껴지면 인생은 갑자기 지옥으로 바뀐다. 한순간 행복한 기분이 수영법도 모르면서 불행의 바다를 헤엄치는 처량함으로 전락한다. 행복은 천천히 누리는 것이지 미리 성취할 수 없다. 행복을 앞당기려는 조급함은 인생을 파괴한다. 안달복달하는 정신이 어찌 의미 있는 일에 집중하겠는가. 시계를 자주 쳐다볼수록 마음은 부산한 방황을 거듭하면서 무의미의 지옥에서 고통받을 뿐이다. 초조焦燥란 무엇인가. 시간의 악마에 쫓기는 바람에 마음이 재가 되고(焦) 영혼이 비쩍 말라붙는(燥) 일이다. 초조한 마음은 정신의 평온을 빼앗아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보거나 더 큰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만든다.
‘하늘 앞에 드리운 가지를 마주하고’라는 시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페터 한트케는 말한다. “지금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보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안다,/ 내가 훨씬 더/ 더 많이 볼 수 있음을./ 그런 생각을 하자, 내 안에서/ 숫자를 헤아리는 조바심이 사라졌다.” 똑같은 스물네 시간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느낄 때 인생은 풍요로워진다. 조바심에 사로잡혀 끝없이 숫자를 헤아리지 않으면 우리는 일상에서 더 많은 기적을 찾아낼 수 있다. 맛있는 빵은 서늘한 그늘에서 효모가 반죽을 부풀리는 숙성의 시간 끝에 만들어진다. 기다림 속에서 천천히 인생을 성숙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의 정수를 누리지 못한다.
조바심은 한 줌의 의미도 생산하지 못한다. 제자리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고 몸이 목적지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달리는 기차에서 발을 동동 굴러보아도 아무 소용없다. 시계를 자주 들여다본다고 신이 말을 걸진 않는다. 행복에 이르는 길에서 아무도 기다림을 건너뛸 수 없다. 니체가 가르쳐주었듯 여정의 순간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면서 느긋이 즐기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갈색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 니체는 아침 10시부터 나와 온종일 산마르코 광장에서 시를 짓고 산책을 하고 홀로 속삭이면서 보냈다. 누구나 행복을 누리려면 비슷한 경로를 밟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