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그리 크지 않다. 세로 24cm, 가로 36cm. 화폭이 두 눈 가득 차도록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그림 속에서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바람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분다. 선비의 집을 둘러싸고 있는 숲, 뒤뜰의 대나무, 마당에 우뚝 선 나무 두 그루, 그 앞에 선 동자의 머리칼과 옷자락까지 모든 것이 한 방향으로 펄럭인다. 하늘과 마당도 붓질을 빨리해 작은 그림 속에선 온통 세찬 바람이 휘몰아친다. 인물은 둘이다. 마당의 두 나무 사이로 사립문 쪽을 살피는 동자, 그리고 방 안에서 바깥 기척에 귀를 기울이는 선비. 두 사람은 한 몸인 듯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림은 심전 안중식(1861~1919)의 ‘성재수간聲在樹間’이다. 1980년 이래 40년 넘도록 공개 전시된 적이 없었다. 2021년 4월 한 달간 서울 예화랑에서 전시됐는데, 전시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그 사실을 알고 곧바로 달려갔다. 개인 소장이니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 역시 원작은 힘이 있었다. ‘성재수간’을 나에게 처음 이야기한 사람은 친구 K다. 헌책방을 하는 그는 어느 날 문자메시지에 “성재수간, 나무 사이로 바람 소리가 들린다”고 썼는데, 그림을 모르는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명화는 명곡을 탄생시켰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1936~2018)는 1980년 KBS에 갔다가 ‘성재수간’을 만났다. 그림은 녹음기사의 방에 걸린 복제본이었는데, 첫눈에 예술적 영감을 받았다. 동양화에서 인물은 부수적이고 전형적인 형태로 그리는 것이 보통인데 이 그림에서는 화면 가운데서 사립문을 바라보는 사람을 커다랗게, 그것도 뒷모습으로 그렸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림을 사고 싶다고 했더니 녹음기사는 좋으면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선생은 이탈리아 해변 마을 풍경 사진을 대신 주기로 하고 ‘성재수간’을 집으로 가져와 곡을 쓰기 시작했다.
1악장은 숲속의 조그만 집 마당에 달빛이 내려앉은 풍경을 신비롭게 그렸다. 고요하게 시작해 잔잔하게 속삭이는 가락으로 이어진 후 템포가 고조되었다가 가라앉는다. 시계추의 규칙적인 흔들림을 닮은 이 음악은 풍경 묘사에 그치지 않고 시간의 흐름, 옛 추억과 그리움의 정서까지 품고 있다. 2악장은 약간 빠른 가락으로 선비의 설레는 마음을 차분하게 표현했다. 3악장은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기교적인 악장인데, 전통적 가야금 음악에서는 들을 수 없는 매력적인 소리가 들린다. 황병기는 오른손의 고속 연주 중에 왼손으로 가야금 열두 줄을 쓰다듬듯 한꺼번에 훑는다. 명주실과 오동나무는 ‘우웅~’ 하면서 공명하는데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림 속 바람의 소리다. ‘성재수간’은 ‘나뭇잎 사이로 바람 소리가 들린다’는 뜻이다. 안중식은 붓으로 바람을 일으키고 황병기는 가야금으로 바람을 부른다. 4악장은 애절하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황병기는 곡을 완성하고 ‘밤의 소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내가 제목이 음흉스럽다고 했으나 더 적절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성재수간’은 송나라 시인 구양수가 가을의 쓸쓸함을 노래한 ‘추풍부秋風賦’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림을 처음 본 순간 옛 사설시조 한 수를 떠올렸다. 운율은 노래 같고 시정詩情은 우습고도 애달픈데, 고교 국어시간에 배운 뒤 평생 암송할 때마다 미소 짓게 되는 작품이다. 발음하여 읽어보시길 권한다. “창밖이 어른어른커늘 님만 여겨 펄떡 뛰어 뚝 나서 보니 / 님은 아니 오고 으스름 달빛에 녈 구름 날 속였구나 / 마초아 밤일세망정 행여 낮이런들 남 우일 뻔하여라.”
선생님은 ‘해학적’이라고 했는데 나는 가슴이 찡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다 구름 그림자가 창을 스치는 걸 보고 “오셨구나!” 하며 뛰쳐나갔다가 달빛 아래서 민망함을 감추고 선 男 또는 女. 어찌 우습다고만 할까. 나에게 ‘성재수간’은 이 시조와 똑같다. 그림자로 표현된 선비가 방 안에 앉은 채 동자에게 나가보라고 한 것이 다르긴 하다. 그러나 내 눈에는 마당으로 나가 사립문 밖을 바라보는 동자가 바람 소리를 인기척으로 듣고 펄떡 뛰어 뚝 나선 선비의 마음으로 보인다.
K의 헌책방은 서울 회현지하쇼핑센터에 있다. 묵직한 인문학 서적이 쌓여 있어 책의 숲을 조심스레 통과해야 친구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언젠가 K는 지나가는 말처럼 “그대 발자국 소리를 안다”고 했다. 그것은 책방 입구에서 발자국 소리가 날 때마다 귀를 기울였다는 말이다. 그는 ‘성재수간’의 선비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