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릴 때 일이다. 어머니랑 친척 집에 가는 길이었다. 여러 번 갔던 곳이라 길은 잘 알았다. 무척 추운 날이었다.친척 집 근처 시장에서 어머니가 장을 보는 사이, 먼저 가서 있겠다고 혼자 길을 나섰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갑자기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눈보라 속에서 종종걸음을 하다 문득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친척 집을 50m쯤 남긴 곳이었다. 눈앞에 빤히 목적지가 보이는데도, 어쩐지 더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둘러봐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모태로부터 떨어졌다는 오욕감, 낯선 곳에 홀로 던져졌다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어찌할 줄 모르고 제자리에서 발만 구르다 버림받은 듯한 느낌이 사무치면서 그만 울어버렸다. 미아 체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길을 실제로 잃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머니가 곁에 있어도 우리에게는 세차게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미아 체험을 “자신을 무조건 받아주고 감싸주는 존재의 곁을 떠나 ‘타자’로서의 세계와 마주하는 것”이라고 일컫는다. 누구나 세계의 무정함을 만나는 순간 길 잃은 아이가 된다. 그리고 울어야 소용없으며, 어떻게든 무정한 세상과 맞서야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인간은 손 내미는 존재 없이 살아갈 수 없도록 진화했다. 브라이언 헤어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는 인간과 침팬지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가 타자와 다정히 지내면서 서로 협력하는 힘인 ‘친화력’이라고 말한다. 인류의 사촌인 침팬지는 낯선 존재와 좀처럼 협력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존재를 기꺼이 환대해서로 소통하고 역할을 나누어 협력할 수 있다. 낯선 존재가 내미는 손을 잡고, 또 낯선 존재에게 손 내밀며 살아가는 다정한 마음이 인간다운 삶의 기초다. 친화력 덕분에 우리는 내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연결하고, 지식을 다른이와 주고받으며, 집단의 관습인 문화를 일으키고, 집합적 협력을 통해 뛰어난 기술을 고안해낼 수 있었다. 인류는 호모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등보다 똑똑해서가 아니라 친구로 지내는 능력이 뛰어나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 네안데르탈인은 인류보다 뇌가 크고 몸도 건장했으나, 무리규모가 고작 10~15명 정도였기에 1백 명 넘는 무리가 협력하는 인류를 이길 수 없었다. 타인과 다정히 살아가는 능력은 ‘우리 존재의 정수’다.
인간은 이 다정함으로 무정한 세계에 맞선다. 그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익숙한 다정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잠시 후 따라온 어머니가 울고 있는 나를 꼭 안아주었을 때, 나는 더없는 안락을 느끼면서 배시시 웃었다. 이것은 고착이자 퇴행이다. 세계의 거센 눈보라를 견디지 못하고 어린 시절에 영원히 머무르려고 하거나(고착), 더 어린시절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퇴행)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에 등장하는 홀든 콜필드가 그 좋은 예다. 홀든은 호밀밭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욕망하지만, 사실은 영영 어린아이로 살면서 항상 자신을 든든히 지켜주는 파수꾼이 곁에 있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른 들판에 어린아이만 수천 명 뛰노는 세상은, 홀든의 말 그대로 바보 같은 환상에 불과하다. 아이한테 정말 필요한것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껏 뛰놀되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만큼 달리는 법이다. 다정함이 바깥에만 존재할 때 인간은 절대 성숙해지지 않고, 세계는 다정해지지 않는다.
다른 길도 있다. 무정한 세계를 다정한 세계로 조금씩 바꾸어나가는 일이다. 학생들은 한 학기 내내 강의실에서 거의 똑같은 자리에 앉는다. 처음 두세 번 정도 이곳저곳 옮기다가 자리가 어느 정도 정해지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자리를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 한번은 한 여학생 자리를 다른 학생이 먼저 와서 차지한 적이 있는데, 여학생이 흠칫 놀라면서 한참 째려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다음 시간에 그 여학생은 더 일찍 와서 기어이 자기 영역을 되찾았다. 낯선 곳을 익숙하고 친밀한 장소로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다. 모든 생명체는 특정한 생태계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생태적 지위niche를 차지하려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모든 회사는 자신한테 친숙한 틈새시장niche을 발굴해 가능하면 생존이 걸린 경쟁을 회피하려 한다. 다정함은 낯선 존재를 친밀히 길들여 평화를 만드는 힘이다. 무정한 세계에 뛰어들어 타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이 편안하고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는 영토를 적극적으로 확보해나갈 때 세계는 비로소 아늑해진다.
다정함은 기적을 일으킨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존재의 가벼움>에서 주인공 토마시는 그를 운명의 연인으로 생각하고 무작정 프라하로 찾아온 시골 처녀 테레자가 “바구니에 담긴 아기” 같다고 여긴다. 길 잃은 미아가 된 채 낯선 도시에서 열병에 시달리는 테레자에게 토마시가 손을 내미는 순간, 비로소 무정한 세계에서 헛된 섹스를 반복하며 공허에 몸부림치던 잘나가는 의사 토마시의 세계가 끝나고 테레자와 충만한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는 시골 농부 토마시의 세계가 시작된다. 외로운 토마시가 다정한 토마시로 바뀌면서 사랑이란 섹스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연인과 함께 잠들고 싶은 욕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것이다. 모든 역사는 ‘버려진 아기’, ‘길 잃은 아이’를 구하는 누군가의 손길에서 시작된다. 파라오의 딸이 모세가 담긴 대바구니를 강물에서 건져내지 않았다면 성서에 기록된 장대한 인간 구원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사람이 미아로 버려졌을 때 때마침 공주가 거기에 있어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세계는 여전히 파라오의 폭정 밑에서 고통받을 것이다. 공주의 손길은 낡은 세계의 끝이자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내면에서 연민을 느끼고 다정함을 일으켜 타인에게 건네는 환대의 손이 세계의 무정함을 이긴다. 쿤데라에 따르면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은 세계라는 “슬픔의 형식”을 “행복의 내용”으로 채워가는 일이다. 버려진 아이만 미아는 아니다. 어느 날 친인이 세상을 떠나거나,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받거나,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질병이나 재해나 전쟁 등으로 삶의 루틴에서 쫓겨난 이는 모두 무정한 세계를 떠도는 미아가 된다. 그러니까 미아는 나그네이고 난민이며 이방인으로, 이전의 삶에서 뿌리 뽑혀 낯선 세계에 던져진 인간 전체를 말한다. 우리 중 그 누구도 미아 됨을 피할 수 없다. 예수는 우리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라고 요청한다. 나그네를 따뜻하게 맞이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나그네를 히브리어로 게르ger라고 한다. 이 단어는 ‘자신이 본래 속했던 장소 이외의 땅에서 사는 것’을 뜻한다. 게르는 먼 나라에서 온 이방인을 뜻하기도 하지만 집이나 고향에서 쫓겨나 낯선 곳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를 지칭하기도 한다. 예수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사람이, 한 사회의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에게 손 내미는 사람이, 즉 다정한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하는 셈이다.
다정함의 반대편에 업신여김이 있다. 다정함은 타자를 존중하는 일이고, 업신여김은 타자를 깎아내리는 일이다. 타자를 다정히 대하면 그를 평온하게 하고, 타자를 업신여기면 그를 화나게 한다. 분노는 증오를 낳고, 증오는 다툼을 낳고, 다툼은 흔히 폭력과 투쟁으로 이어진다. 다정함 없이 인간이 행복할 길은 없다. 기쁨과 평화를 원한다면 약자를 환대할 줄 알아야 한다.“네가 두 발을 들고 일어서면/ 나는 앉는다/ 나의 사회와 너의 사회가 만나는/ 촉촉한 뽀뽀.”(‘접속’) 이 시에서 박세미 시인은 다정함이 나를 향해 누군가가 발돋움할 때 기꺼이 몸을 낮추어 맞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럴 때 비로소 “나의 사회와 너의 사회가 만나”서 “촉촉한 뽀뽀”를 나누는 반려 관계가 성립된다. 우리는 강자를 반려로 삼는 것을 아첨이라 하고, 약자를 반려로 삼는 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신이 몸을 낮추어 인간의 몸을 입는 육화incarnation를 실천함으로써 예수는 다정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약자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어라. 평화와 구원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