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읽는 10대의 심리
영화평론가 심영섭이 10대 성장기의 복잡다단한 마음을 다독여줄 영화 4편을 소개한다.
사춘기 시절, 처음 깨닫고 경험한 자아를 이미지화시켜보면 소다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엔 그 소다 병 속에 무한한 가능성의 버블이 마법처럼 떠다녔다. 어린아이였던 나는 기체처럼 쉽게 흥분하고 들뜨고 행복하기도 했다. 그땐 누가 “커서 뭐가 되고 싶니?” 하고 물어보면 대통령부터 노벨상 작가, TV 속 배우까지 서슴지 않고 진심을 담아 말했으니까. 그러다가 사춘기가 되면, 커가는 가슴과 훌쩍 자란 키가 뚜렷이 알게 해준다. 이제 자아라는 소다 병의 뚜껑을 열 때가, 즉 진짜 현실의 내 모습과 가능성을 직면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자아 정체감. 나의 본모습을 찾기 위해 반드시 찾아야 하는 것. 육체는 성인 버전으로 업데이트를 마쳤지만, 뇌는 계속해서 리모델링을 하고 있는 어수선한 공사판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바로 자아다. 그것은 편의점 한편에서 인스턴트 커피나 라면처럼 간편하게 선택할 수도 없고, 가족이나 선생님 또는 어떤 어른이 가만히 있는 내 손에 쥐여줄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특히 사춘기의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은 시중에서 재고가 단 한 개뿐인 상품을 내 손에 넣기 위해 여러 루트를 헤매는 것과 같다. 차이점이라면 재고가 단 한 개 남은 상품은 실제로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지만, 자아 정체감은 때론 이상적인 그저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
영화 <레이디 버드>(2017)의 주인공 크리스틴은 자아를 찾아 방황하는 사춘기 소녀의 전형을 보여준다. 자신이 직접 지은 독특한 이름 ‘레이디 버드’로 불리기를 열망하는 그녀는 새크라멘토의 서부 지역에서 자라며 꿈에 그리는 뉴욕의 예술 대학에 가고자 한다. 하지만 간호사인 어머니는 형편이 넉넉지 않고 크리스틴의 아버지 또한 실직 상태. 어머니에겐 꿋꿋이 ‘동부의 예일’을 꿈꾸는 딸이 마치 세계적 호텔을 짓겠다는 야심 찬 건축가가 아직 설계 도면도 펼치지 못한 것처럼 여겨질 뿐이다. 그래서 현실적인 우려를 품고 크리스틴에게 “너는 시립대나 감방 밖에 못 갈 거야”라고 냉소하기 일쑤다. 모녀의 갈등은 차 안에서의 말다툼으로 정점에 다다르고, 크리스틴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차문을 열고 그대로 도로로 떨어져 손에 깁스를 하게 된다.
청소년기에는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가족과 사회로부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외딴섬처럼 느껴지는 순간으로 가득하다.
영화 <보이후드>(2014)를 살펴보자. 주인공 메이슨은 이러한 불안정한 감정을 숨긴 내향적 청소년의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12년간 매년 1주씩 촬영해 주인공들의 시간적 변화를 고스란히 담은 이 영화에서, 어머니는 세 번 이혼했고, 그중 두 번은 주정뱅이 의붓아버지와 살았다. 영화에는 유난히 이사 다니는 장면이 많은데, 아마도 메이슨은 항상 ‘떠나는 자의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듯하다. 손톱에 네일아트 를 한 메이슨에게 세 번째 아빠가 힐난한다. “여름에는 귀고리를 달고 다니더니 이젠 매니큐어냐.” 주변 사람들도 메이슨을 이상한 아이로 생각한다. 메이슨은 이에 대해 답답함을 토로한다. “주변 사람들이 내 인생을 간섭하는 게 너무 화가 나는데, 정작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고. 청소년기에는 비정상・비일관성・비상식이 정상이고, 일관이고, 상식인데 어른들은 때때로 자신이 지나온 바로 그 시기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청소년을 대한다. 물론 객관적으로 더 힘들어 보이는 쪽은 메이슨의 어머니 올리비아일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뒤늦게 심리학 공부를 하고, 남편들에게도 지지받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메이슨이 더 힘들 수 있다. 방황이 처음이니까. 그래서 사춘기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경험, 또 경험이다. 그리고 시간이 소요되는 방황과 경험을 가능케 하는 어른들의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하다.
크리스틴의 어머니는 크리스틴이 늘 깔끔하게 옷을 입고 다니고 옷장을 정리하길 바란다. 하지만 정작 크리스틴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날은 말끔하게 어떤 날은 지저분하게 입기도 하고, 한 주는 특정 친구를 좋아했다가 다음 주는 그를 경멸하기도 하는 어떤 종류의 성격 실험 또는 불안정함 속에서 굽이친 길을 저 멀리 가보는 시간 같은 것이다.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이러한 시기를 심리적 유예기 (psychological moratorium)라 명명했다.
〈레이디 버드〉(2017)
사춘기, 신체와 내면이 함께 성장하는 시간
소년이 소녀로, 소녀가 소년으로 변할 수 있는 심리적 유예의 시간은 성 정체성의 경계도 가변적으로 만든다. 성장의 문턱에서 매 순간 몸과 생각의 변화가 양상을 달리하는 예민한 시기에 갖게 되는 성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 또한 지극히 당연한 현상일지 모른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자전적 영화 <톰보이>(2011)는 이사 온 낯선 동네에서 자신을 ‘미카엘’이라 소개하는 로레라는 소녀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영화는 학교 벨이 울리지 않는 방학을 배경으로 축구와 달리기, 수영, 서로 밀어 넘어뜨리기, 진실 게임 등 놀이로 가득 찬 세계를 따라간다.
로레는 소년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자리 잡는다. 침을 퉤 뱉는 그들의 모습을 거침없이 모방하며, 씩 웃음을 지어 보인다. 축구 경기 중에는 자신감 넘치게 웃옷을 벗어 던지고 자기 몸을 드러낸다. 수영복을 개조해 팬티를 삼고, 그곳에 찰흙으로 만든 가짜 남근을 붙여 숲속의 전사로 거듭난다. 잘린 수영복 윗부분은 로레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탐색하며 내린 선택의 상징으로 보이며, 소년과 소녀의 분리된 성 정체성을 나타내는 듯하다. 로레는 미카엘이 되어 가족 몰래 소년 행세를 하는 것을 즐긴다. 이상하게도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보다 아버지 무릎에서 운전을 배우는 시간에서, 동생과 놀아주는 순간보다 소년들과 함께 뛰노는 순간에서 로레는 진정으로 생기를 발산한다. 하지만 로레가 미카엘로서의 삶을 살아왔음을 알게 된 어머니는 로레에게 파란색 원피스를 입히고, 서로 애틋한 감정을 나누었던 친구 리사의 집으로 가 사과하도록 한다. 이때 로레는 벽에 기대어 초조한 마음으로 리사를 기다리고 카메라 는 로레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로레가 자라면서 어떤 성 정체성을 선택하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청소년기의 액체 같은 유동성은 육체적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동생 잔은 로레의 짧게 잘린 머리카락을 장난기 어린 콧수염으로 변신시켜 로레의 얼굴에 붙여준다. 사춘기의 육체는 단순히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결여를 보완하며 역할의 실험실이자 놀이터로 변모한다.
주변인이라는 존재
이렇게 사춘기 아이들의 자아는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자기 인식, 성 정체성, 직업적 포부 등은 모두 친구, 학교, 가족 등 주변 사람 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며 더욱 변화의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영화 <컴온컴온>(2021)의 독특한 소년 제시도 마찬가지다. 유명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아버지의 조울증 증세가 심해지자 어머니 리브는 남편이 있는 곳으로 잠시 떠난다. 그렇게 잠시 부모가 부재한 상황에서 제시는 자신을 고아원 아이로 상상하고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도피하려 든다. 그를 임시로 맡아준 사람은 리브의 오빠이자 라디오 칼럼니스트인 삼촌 조니. 조니는 미국을 누비며 ‘미래, 죽음, 자아’와 같은 주제에 대해 청소년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자료를 모으고 있다. 제시는 조니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져 당황하게 만든다. 노래가 나오는 칫솔을 사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삼촌과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기도 한다. 그런 제시에게 조니는 숲속에서 “네가 편안한 구간에서 벗어났다면 안 괜찮아도 괜찮아. 낙심해도 되고, 상심해도 되고, 발로 차도 되고, 소리 질러도 돼”라며 진심을 공유한다. 제시는 이에 화답하듯 “예상했던 일은 안 일어날 거예요.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날 거예요. 그러니 그냥 해요. 하면 돼요. 해요. 해요. 해요. 해요. 해요. 해요(come on)”라고 말한다.
영화 〈컴온컴온〉(2021)
영화 〈보이후드〉(2014) / 영화 〈레이디 버드〉(2017)
앞서 언급했듯, 사춘기와 성장기를 맞이한 10대에게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들을 에워싼, 지척에서 함께하는 이들이야말로 기다림, 인내, 여유로 그들의 방황을 너그럽게 포옹해주어야 한다. 성장기의 방황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혼란스러운 이들에게 삼촌 조니와 같은 주변인의 존재는 든든한 버팀목처럼 여겨지기에 충분하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인물을 살펴보면 주변인들의 영향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제시뿐 아니라 조니가 마이크를 들고 인터뷰하는 청소년들의 답변은 여러 대목에서 성장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고민하게 하고, 사춘기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엎기도 한다. 한 아이는 엄마의 “강해져야 한다”는 말에 “인간은 울기도 하는 존재”라며 부드럽게 저항한다. “부모님이 내 아이라면 어떤 것을 배우게 하고 싶냐”는 질문에 “이기적이지 않은 것, 무례하지 않은 것, 화내지 않는 것, 리더십” 이라고 답변하는 아이도 있다. 외로움에 대한 고백은 더욱 가슴을 울린다. “외로움은 두려움이고, 이해받지 못한다면 그냥 혼자인 것이다.”
“너다운 곳이 천국이란다”
현재보다 너무 길게 펼쳐져 있는 것 같은 미래, 그 미래의 불확실성을 헤쳐나가는 일은 분명 두렵다. 이 시기를 지나는 이들이라면 누구든 그렇다. 중요한 건 나와 타인 모두가 겪는 이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깨달음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부정적 감정을 단순히 부인하거나 숨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경험하며 지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자신감으로 이어진다. 누군가와 고통스러운 순간을 함께 견디고 그 속에서 감정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은 인간에게 귀중한 체험이다. 그러니 주변에서 10대를 지나는 자녀가, 사춘기 조카가 어깨를 떨구면 이렇게 말해주자. “너다운 게 진짜고, 너다운 곳이 천국이란다.”
영화<보이후드>의 메이슨은 대학생이 된 뒤 산 정상에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흔히 이런 말을 하지. 이 순간을 붙잡으라고. 난 그 말을 거꾸로 해야 될 것 같아. 이 순간이 우릴 붙잡는 거지.”
초록색이 지구를 덮어가는 5월, 사춘기를 겪는 모든 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자아라는 먼 우주에서 깨어난 것을 환영한다. 너무 진지해질 필요는 없어. 모든 우주적인 여정도 웃음 없이는 반쪽짜리니까.”
영화 〈톰보이〉(2011)
writer SimYoungsub 한국영상응용연구소 대표
editor Kim Minhyung
© Alamy, Getty Ima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