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해체에서 비롯되는 예술
크리스토퍼 울은 다양한 붓질과 그 붓질을 취소하는 과정을 거듭한다. 그는 자신이 남긴 궤적을 구태여 모호하게 만드는 작업을 통해 ‘그리기’의 개념을 무너뜨린다.
Christopher Wool, Untitled, 2020, Oil and inkjet on paper, 55.9 x 43.2 cm.
©Christopher Wool. Photo: Tim Nighswander/IMAGING4ART
크리스토퍼 울은 1955년생 미국 작가로 ‘그리기 방법’을 스스로 만들며 활동을 지속해왔다. 그는 대형 캔버스에 단색 이미지를 반복해서 찍어낸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그리기 방법’은 물감을 질척하게 바르는 기법이나 스프레이 회화, 붓 대신 손을 사용해 그린 그림, 실크스크린 기술을 활용한 그림 등을 포함한다. 특히 흰 화면에 실크스크린으로 이미지를 얹고, 그 위에 다시 물감을 쌓아 올린 뒤 그 위에 다른 물감층을 계속 올리면서 깊이감을 더하기도 한다. 그는 그리는 것과 지우기, 움직이는 것과 멈추기, 깊이와 납작함처럼 극과 극에 있는 행위와 그 행위로 만들어진 다른 형태 사이를 오가며 화면 위에 일종의 긴장을 부여한다.
스텐실과 실크스크린
울은 1980년대부터 날카로운 관점으로 회화의 여러 특성을 실험해왔다. 초기에는 페인트 롤러를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바로 흰 바탕에 짙은 흑색 에나멜로 기하학적 형태를 그리기 시작한 때다. 롤러로 이미지를 복사해내는 것은 직관적인 그리기 방식을 통제함과 동시에 화면 구성을 위한 자의적 결정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패턴을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하고 비껴 나간 많은 부분이 오히려 작가의 감정적 흐름을 보여주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그는 1990년대부터 주로 실크스크린을 사용했다. 초기에 작업했던 실크스크린 회화에서 그는 패턴을 사용해 자신만의 시각언어를 구축해나갔다. 꽃이나 식물 형태 모티브를 확장해 추상에 가까운 요소를 만들어 화면을 구성하기도 했다. 특히 이러한 형태는 빠르고 반복적으로 이미지를 쌓아 올리기 적합한 실크스크린의 매체적 특징을 극대화한다. 이렇게 완성한 회화 안 도상은 도식적이고 기계적인 성격까지 띤다. 이 기간에 울은 기존 형식을 스스로 파괴하면서 새로운 형식을 만들고자 했다. 예를 들어 꽃 아이콘을 여러 번 쌓아 올려 하나의 시꺼먼 덩어리처럼 보이게 만든다거나 과한 덮어쓰기로 형태를 지워버리는 식이었다. 또 이 시기에 스프레이를 사용해 둥그런 선을 반복해서 그리는 식의 자유로운 드로잉을 그리기도 했다. 이러한 이미지는 도시 한복판에서 볼 수 있는 그래피티처럼 반 달리즘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다른 매체로 확장된 반복적 이미지
울의 작품은 특정한 형태를 보여주거나 의미를 전달하려 하기보다 기법 자체를 탐구하면서 탄생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평면 작품은 ‘모노크롬’ 회화라고도 할 수 있다. 모노크롬의 시작은 여러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미술사에서는 주로 20세기 초 절대주의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 같은 바우하우스 계열 작가들과 데 스틸De Stijl, 러시아 구축주의 작가 알렉산더 로드첸코(Alexander Rodchenko, 1891~1956) 의 작품에 근간을 둔다고 본다. 이렇게 단일한 색조를 기반으로 명도와 채도에만 변주를 주어 그린 단색화를 모노크롬이라고 하는데, 크리스토퍼 울의 작품은 로드첸코의 이미지와 형식적으로 가장 닮아서 그 계보를 따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자는 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매체에 대한 집중이나 환원주의적 이미지 같은 특징 때문에 1960년대 이후 미국 모더니즘 회화 양식에서 매체의 순수성을 강조했던 시기와 궤를 같이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니멀리즘과 같은 회화의 절대성이나 순수한 물질성에 기반하는 엄격한 태도는 그가 의 존하는 가치가 아니다. 그보다 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모노크 롬은 긴 시간 반복되면서 결국 스스로 형식을 재생산할 수 있는 구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이후 반복과 재생산의 논리를 회화뿐 아니라 조각이나 사진을 포함한 다양한 매체에 적용해 작품의 범위를 넓혔다.
직접 시작한 10년 만의 개인전 〈See Stop Run〉
크리스토퍼 울은 지난 3월 14일 뉴욕 그리니치 101번가에 위치한 자신의 작업실에서 회고전 형태의 개인전을 열었다. 7월 31일까지 진행되는 이 전시는 2013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의 대규모 개인전 이후 처음 연 개인전으로, 총 74점의 작품을 공개했다. 흥미로운 점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기관 중 하나인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난 뒤 결국 제도를 벗어나 낡고 허름하고 정리되지 않은 뉴욕의 19층 사무실을 전시 공간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약 5백 평 (1,652m 2 )에 달하는 이 넓은 공간은 갤러리나 미술관의 화이트 큐브의 한계나 제약에서 벗어나 작품을 보다 ‘자연스럽게’ 전시할 수 있는 곳이었다. 특히 총 11점의 회화 작품 중 9점이 검고 굵은 필치를 보여주는, 최근 리넨 위에 펼친 실크스크린 기반의 작품이었고, 종이에 잉크와 유화물감을 여러 겹 쌓아 올린 작품 30여 점, 사진 작품 시리즈 4점, 꼬인 강철같이 보이는 조각 25점과 거대한 모자이크 작업을 공개했다. 울이 최근 작인 모자이크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미술 시장에서의 탈피와 자유
한 가지 눈길을 끄는 점은 이번 전시에서 스텐실을 사용한 회화 작품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울은 스텐실로 만든 반복적 패턴이 보이는 작업을 하지 않은 지 꽤 되었다. 이런 종류의 작품은 사실 컬렉터들이 가장 좋아하던 형식이었다. 실제로 크리스토퍼 울은 한때 미술 시장에서 작품이 꽤 고가에 거래되었던 작가다. 그는 이에 대해 지난 2022년 <뉴욕타임스> 와의 인터뷰에서 미술계가 미술 시장에서 분리되지 않았던 시기를 회고했다. 그 시기는 크리스토퍼 울을 포함한 제프 쿤스, 리처드 프린스 같은 작가들이 많이 활동하던 때였다. 그들의 작품은 하늘을 치솟는 가격으로 미술 시장에서 순환되었기 때문에 많은 이가 미술 시장의 특혜를 본 흔치 않은 성공적 사례로 기억한다. 흥미롭게도 울은 자신의 작품이 이런 환경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상황을 “유감스럽다(unfortunate)”고 표현한다. 많은 사람이 작품이 가장 비싸게 팔리던 때의 자신의 작품만 기억하고, 그의 작가적 특성이나 작품 세계가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라고 언급했다. 울은 이번 전시에서 소개한 작품은 판매하지 않기로 했다.
Installation view Christopher Wool, Xavier Hufkens, 2022.
© Christopher Wool. Photo: Allard Bovenberg.
Installations views: See Stop Run, 2024. © Christopher Wool.
Installations views: See Stop Run, 2024. © Christopher Wool.
Installation view Christopher Wool, Xavier Hufkens, 2022. © Christopher Wool. Photo: Allard Bovenberg.
지난 10년간 울의 작업은 점점 더 추상화되었고, 화면 위에 올라온 형상의 부분 부분에서 다채로운 질감을 엿볼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회화 작품에 나타난 어떤 이미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관람자의 시야를 방해하는 듯한 이미지가 유령처럼 남아있다. 울의 회화 작품에서 나타난 이미지들이 과거의 한순간에 갇혀버린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울은 다양한 붓질을 하고, 다시 그 붓질을 취소하는 과정을 거듭한다. 그는 자신이 남긴 궤적을 구태여 모호하게 만든다. 시간이나 효율면에서 보면 그리 경제적이지 않은 방식이다. 이렇게 구현과 그 구현된 것을 부정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울의 그림은 곧바로 ‘~이다’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고, 동시에 그 어떤 것도 아닌 것으로 정의될 수도 있다. 울은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사진까지 수십 년간 여러 매체를 다양한 차원에서 실험해왔다. 결국 이렇게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완성한 작품들은 모두 그가 어떠한 ‘그리기 방법’으로 화면을 구성하려는 논리를 통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이렇게 고집스럽고 일관된 태도를 근간으로 크리스토퍼 울은 약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쉼 없이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ARTIST PROFILE크리스토퍼 울 CHRISTOPHERWOOL, 1995~ |
writerJeon Hyogyoung 리움 미술관 큐레이터
editor Kim Minhy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