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털링 루비의 저항적 예술
Sterling Ruby, HORIZON. EXHAUSTED FROM THE ENCOUNTER., 2024, Acrylic, oil, and cardboard on canvas,
32.7*42.9×3.5 cm (framed)
© Sterling Ruby Courtesy Sterling Ruby Studio and Sprüth Magers Photo: Robert Wedemeyer
동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가로 꼽히는 작가 스털링 루비 (Sterling Ruby, 1972~). 그는 전통적인 소재부터 최신 패션 트렌드까지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사회적 편견에 저항하는 미국 아티스트다. 스털링 루비는 현대의 미니멀리즘과 개념 미술이 사물의 본질을 탐구한다는 명목으로 작품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만들어왔다고 보고, 예술의 리얼리티와 개성을 되살리려는 저항적 제스처의 작품을 선보여왔다. 무겁고 경직된 관념을 떨쳐버렸을 때에만 미술은 고급 문화의 성역에서 벗어나 비로소 현실의 삶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있다는 것. 버려진 천을 덧대 만든 퀼트, 거칠게 분사된 스프레이 페인트, 다듬어지지 않은 강철 조각, 분출되는 언어와 분열증적 풍경으로 구성된 스털링 루비의 예술 세계에는 해체와 재구성을 반복하며 계층적 벽 허물기를 시도하는 예술가적 소명이 깃들어 있다.
스털링 루비의 작품 세계를 특정한 매체와 스타일로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합성섬유, 캔버스, 페인트, 청동, 강철, 플라스틱 등 다루는 재료도 셀 수 없이 많으며 접합, 해체, 패치워크, 콜라주, 조각, 페인팅, 리코딩, 의류 제작 등 영감의 원천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전략 역시 기발하고 변화무쌍하다. 그렇다면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는, 그야말로 복합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그의 작업 스타일에 대해 우리는 어떤 이해를 구축할 수 있을까.
사실 미술계에서 정해진 틀을 깨부수는 것을 소명으로 삼는 악동 같은 이미지의 작가들은 적지 않다. 이들은 다양한 재료와 테마를 탐닉하면서 거칠고 즉흥적인 표현으로 기성 시스템에 대항해 적대감을 표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스털링 루비의 다양성 추구는 이들과 조금 다른 맥락에 위치해 있다. 어쩌면 정반대의 지향점을 갖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1990년대 미국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루비는 대학에서 르네상스 미학, 형식주의, 추상표현주의 등 고전적인 예술 사조를 섭렵했다. 그리고 그가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즈음에는 개념주의와 미니멀리즘 세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한 인터뷰에서 대학 시절 ‘미니멀리즘과 개념주의의 선구자들은 모두 실패한 사조이며, 예술을 만들거나 예술가의 동기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이론과 철학’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작가는 이러한 미술사적 맥락을 모두 의식하는 동시에 아카데미로부터 강요받았던 형식적 훈련에 대한 저항의 증표로 해체적 작품을 선보이기에 이르렀다.
Sterling Ruby, TURBINE. HYMN TO HESTIA., 2024 Acrylic, oil, and cardboard on canvas 251.1 ×327.3×8.3cm (framed)
© Sterling Ruby Courtesy Sterling Ruby Studio and Gagosian Gallery
즉, 루비가 추구한 소재와 주제의 다양성에 대한 지향은 기성 예술 자체를 부정하는 저항이라기보다는 미술사 전반에 걸친 모순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비판적 예술 사조라는 특징을 지닌다. 예컨대 2008년 로스앤젤레스 MOCA에서 열린 ‘슈퍼맥스Supermax’ 전시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루비는 미니멀리즘에서 유래한 조각 형태를 거칠게 긁고 집요하게 상처 내 1960년대 미국 미니멀리즘과 감옥 사이의 연결 고리를 만드는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미술사를 반성적으로 조망하고 이를 해체적으로 재구축하는 것. 다양한 소재를 기발하게 활용하는 스털링 루비의 이 같은 물성 탐구는 미술사적 고정관념을 시각적 비유로 치환하고 미술사적 맥락으로 다시 돌아와 그 대안적 위치를 선점한다는 점에서 다중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구질서에 헌정된 기념비에 꼬리표를 붙이고 무너뜨리는 그의 작업 방식은 미술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념을 읽는 데도 적용된다. 2010년 뉴욕에서 열린 ‘2Traps’ 전시에서 초기 모습이 잘 드러나는데, 작가는 캘리포니아 수감자를 운송하던 LA 경찰 버스를 개조해 차량 내부에 철창이 달린 독방을 만들고 관객이 이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두 개의 덫’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마치 동물 우리와 같은 이 배열을 통해 작가는 동물 학대, 인간 학살과 같은 근대 이후 생겨난 사회 시스템의 억압적 측면을 경고한다. 이후에는 퇴역한 미국 잠수함의 파편을 활용해 모더니즘 조각의 형상으로 재구성한 작품, 미국 국기를 닮은 대형 벽걸이 ‘깃발’ 시리즈 등 2010년대 전반에 걸쳐 미국 사회 시스템의 어두운 측면을 은유적으로 고발하는 작업에 집중한다.
Sterling Ruby, Basin Theology/HUM BOM!, 2023, Ceramic, 49.2×193×106.7 cm
© Sterling Ruby Courtesy Sterling Ruby Studio and Sprüth Magers Photo: Robert Wedemeyer
하지만 큐레이터 케이트 파울Kate Fowle의 말처럼 스털링 루비는 단순히 반미주의자는 아니다. 파울은 오히려 독일의 미군 기지에서 미군 아버지와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루비의 생애사적 이력이 미국이라는 조국이 수행하는 무력 분쟁을 어떻게 조망하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을 권한다. 성조기 천으로 만든 비행기, 미사일과 뱀파이어 입을 형상화한 크고 부드러운 조각품은 작은 천 조각을 바느질로 덧대는 패치워크 기법으로 완성되었는데, 이는 19세기 초 아메리카 개척자들이 개발한 전통 기법이다. 즉, 루비가 작품을 경유해 조국에 전하는 메시지는 엄격하고 신랄하지만 이를 직시하기 위해 선택한 기법은 민속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사방에서 마약과 폭력이 난무하지만 미디어는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믹서를 이용해 시스템의 부재를 철저히 은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스털링 루비는 도덕과 가족이라는 상투적 표현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음을 자전적 삶의 경험에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다. 루비는 자신의 작업 방식이 “불편을 야기하기 때문에 문제가 될” 주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응시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저항임을, 화려하고 매혹적인 재료를 통해 생생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뱀파이어Vampire’(2011~) 시리즈는 스털링 루비의 다양한 작품 중에서도 가장 친숙한 작품으로 꼽힌다. 뱀파이어가 입을 벌린 모양을 천을 꿰어 형상화한 입체 조각으로, 살을 뚫고 피를 마시는 송곳니가 부드럽고 푹신한, 다채로운 색상의 봉제 인형을 통해 묘사되면서 특유의 반전 매력을 발산한다. 편안함을 선사하는 재료 덕분에 관객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지만, 사실 이 작품에도 사회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선이 담겨 있다. 문제의식은 특히 재료 선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루비는 일부러 천을 이용해 뾰족한 이빨을 제작함으로써 값싼 담요를 대량생산하기 위한 원단 조달, 이를 꿰매는 데 필요한 수작업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노동 절차에 숨은 착취 과정에 주목한다. 겉으로는 따뜻하고 안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피를 빨아먹는 괴물이라는 것. 빨간색과 흰색 옷을 입은 루비의 조각은 쿠션과 같이 안전한 가정의 상징과 피에 굶주린 송곳니 형태의 폭력과 탐욕의 상징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우리의 편안한 삶을 지탱하기 위해 치러지는 대가가 과연 무엇인지 돌아보기를 독려한다.
그런데 작가가 유독 천과 퀼트로부터 저항적 문제의식을 소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지역의 경매장에서 180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낡은 직물 조각과 담요를 구입해두었다가 작품에 사용하는데, 출처를 알 수 없는 천 조각을 재조합하는 과정에서 젠더적 요소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는 작가의 자전적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데, 펜실베이니아의 농업 공동체에서 성장한 루비는 마을 곳곳에서 화려하면서도 불완전한 퀼트를 자주 접했다고 한다. 처음 예술가가 되기로 다짐했을 때 현대미술에서 퀼트가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움츠러들기도 했지만, 루비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미학적 토대에 공예가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고 이를 개인적 역사의 일부로 적극 수용하기 시작한다. 그가 속했던 볼티모어와 워싱턴 D.C.의 지역사회에서 퀼트가 저항 도구로서 시위의 배너와 깃발로 사용된 배경을 발견하게 된 것도 이러한 깨달음과 연관이 있다.
지난 15년간 패치워크 조각, 퀼트, 깃발 등 텍스타일 작품을 만들어온 스털링 루비의 노하우는 의류 제작 활동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조각품이 될 천을 가져다가 바지 한 벌을 만들곤 하면서 시작된 소소한 작업은 피렌체 패션 아트페어 ‘피티 우오모Pitti Uomo’(2019)에서 공식 론칭되었고 디올, 캘빈클라인, 반스 등과 협업할 만큼 본격적인 프로젝트로 병행되고 있다. 루비의 1990년대 보이 밴드를 연상시키는 화려하고 전위적이면서도 컬트적인 패션 작업은 조각의 소재와 연동되며 삶과 예술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는 추세다. 여전히 낯선 동반자로서 예술과 패션의 상업적 협업에 대해 염려하는 한 평론가의 질문에 대해 루비는 바우하우스 사례를 들어 대답한다. 패션과 예술의 프로젝트도 바우하우스의 산업화처럼 새로운 가능성을 가질 수 있을지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에 교조적이지 않으며, 상업과 순수 미술의 세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스털링 루비의 유연한 태도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것’을 인생의 소명으로 삼는 예술가의 존재 탐구와 맞물려 있다.
ARTIST PROFILE스털링 루비 STERLING RUBY, 1972~ |
writerShin Iyeon 독립기획자
editor Kim Minhy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