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그 뜨거움 속으로
한여름 뙤약볕이 머문 자리, 그곳에서 당신과 나의 찬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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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여름이면 꿈을 꾼다. 누군가는 휴양지의 나른함을, 또 다른 이는 바다의 청량함을 기대한다. 다만 여름은 우리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때론 세찬 태풍을 일으키고, 한 달 내내 폭염을 선사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여름을 얼마나 알차게 채워갈 것인가가 아닐까. 여기 여름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풍성히 채워간 책들을 소개한다.
제주의 여름을 살아낸다는 것
출판사를 운영하며 “작은 이야기들을 엮고” 있는 작가 정세진의 <우리의 여름은 거기에 있어>는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 매해 제주에서 보낸 여름의 기록을 담 은 에세이다. 모녀에게 제주의 여름은 “짙은 초록, 높은 습도, 캔디바 색깔의 바다, 뭉게구름, 타오르는 햇볕, 때 없이 쏟아지는 장대비, 빨갛게 불타는 노을, 악을 쓰는 매미 소리”로 기억된다. 산촌에서 태어난 저자는 바닷가 출신 남편을 만났고, 결혼을 앞둔 제주 여행에서 바다, 아니 제주를 좋아하게 되었다. 딸과의 제주 한 달 살기는 거기서부터가 출발이었다. “결정을 했으면 어떻게든 좋은 결정으로 만들어가는 것도 나의 몫”이라는 생각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보니 역시 내가 가장 행복하단 것을 알게 됐다”는 마음, 즉 제주행으로 이어졌다.
여름을 제주에서 나면서 배운 것은 하나 둘이 아니다. 아이가 그 원천이었다. 살면서 필요한 것은 대개 어른이 아이에게 가르쳐주지만 “육신으로 노는 원초적인 건강함”만큼은 아이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눈앞에 파도가 일렁일 때, 소금기를 씻어낼 일이나 갈아입을 옷도 없이 젖어버린 후의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겁 없이 성큼성큼 바다에 들어가버리는 것, 모래를 주물주물 만지고 젖은 머리로 모래밭에 확 드러누워버리는 것. 선크림을 발랐네 안발랐네, 자외선 차단 지수가 얼마네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햇볕에 민낯을 드러내는 건강함과 통쾌함.” 아이는 노는 데 선수였고, 그 선수에게 엄마는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제주의 여름을 한껏 즐기고자 했던 일 아니던가.
바다뿐 아니라 숲도 제주의 여름을 누리는 방법 중 하나였다. 비 오는 비자림에서 저자는 인생의 지혜 하나를 건져 올렸다. “수령이 오래된 큰 나무 아래 서면 나의 보잘것없음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승복하게 된다. 짊어진 온갖 고민이 자잘하고 하찮게 느껴지고, 나도 모르게 이 사람 저 사람과 비교하던 마음도 시시해진다.” 모두 자기가 잘났다고 떠드는 세상 아니던가. 하지만 수백 년 된 나무들 앞에서 그 잘남은 한낱 미망에 불과할 뿐이다.
제주 살기를 마칠 때쯤 저자는 생각한다. “꽃과 단풍을 즐기는 것처럼 여름의 한낮을 즐기는 것도 꽤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 늦여름의 깨달음이다.” 책은 특별하다면 특별하지만, 작고 소박한 일상이 주는 아름다움을 듬뿍 담아낸다. 소담한 글과 함께 이어지는 제주 사진을 보는 즐거움도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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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대관령, 작은 삶이 주는 기적
독사회학자 천선영이 대관령에서 보낸 여름의 기록을 담은 에세이. 해발 700m 이상의 고원에서도 자신들만의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함께 경험하며, 시작과 끝이 분명한 삶이라는 명제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썼다. 멋진 풍경일수록 사진을 찍기보다는 한 번 더 눈에 담아두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저자는 ‘작은 삶’에서 시작해야만 ‘큰 삶’도 우리 앞에 도래한다고 말한다. 작은 고무 대야 하나도 놀리지 않는 동네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카페 ‘청춘떡방’에서 일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발견하기도 한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정주형, 모든 주변인이 나의 가이드라는 기생형, 휴대전화와 가이드북, 지도 없이 하는 3무 여행을 실천하는 저자의 용기가 빛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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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의 여름을 살아낸 작가 카뮈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여름>은 지중해 여러 도시의 매력과 함께 창작의 원동력이 된 배경 등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책의 배경이 된 알제리의 오랑을 배경으로 쓴 에세이 ‘미노타우로스 또는 오랑에서 멈춘 발걸음’에서 카뮈는 자신의 친구와 아랍인들이 충돌한 장면을 바탕으로 <이방인>의 살인 장면을 구상했다고 밝힌다. 한편 카뮈는 ‘지중해인’이라는 자의식을 평생 간직하며 살았는데, 그런 생각을 키운 중해 특유의 느긋하고 낙천적인 정서에 대해 여러 편의 에세이를 통해 보여준다. 엄혹한 냉전의 시대를 살면서도 마음만큼은 ‘불굴의 여름’을 살아내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카뮈의 아름다운 문장을 만날 수 있어 반가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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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그리고 자연이 주는 감동
프랑스의 그림책 작가 델핀 페레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은 광활한 자연을 배경으로 여름 한때를 보낸 엄마와 아들의 대화를 담아낸 작품이다. 축축한 풀밭 위에 누워 새로운 감촉을 경험하는 일, 누가 볼 것을 염려하지 않고 마음껏 춘 춤, 커다란 풍뎅이를 찾아 풀밭을 누비고 다닌 경험, 따뜻한 모닥불을 쬐며 엄마와 오순도순 나눈 이야기 등은 아이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남겼다. 아이는 엄마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엄마, 그거 알아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이었어요.” 작가는 어릴 적 가족과 함께 여름을 보낸 할아버지의 농가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자연과 교감하는 일이 아이는 물론 성인들의 삶에 깊고도 기쁜 자국을 남긴다고 말하는 듯하다.
writer Jang Dongsuk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출판평론가
intern editor Kang Juhee
photographer Ryu Hose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