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 • ISSUE 35
writerJang Eunsu 출판편집인, 문학평론가
editorKim Jihye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우주의 질서에 참여한다. 음악은 듣기만 할 수 없다. 좋은 음악은 우리 자신의 공명통을 움직여 함께 연주하도록 만든다."
영혼의 아주 자잘하고 미시적인 부분들
누구에게나 자기를 위로하는 궁극의 비결이 하나쯤은 있다. 친구를 만나 긴 수다를 떨 수도 있고, 맛있는 음식을 쌓아놓고 먹을 수도 있고, 몽롱할 때까지 술을 마실 수도 있고, 등산이나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수도 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신이 마음에 찾아들 때까지 명상하거나 기도하거나 절할 수도 있다.
상처 난 마음이 도저히 아물지 않을 때, 나는 욕조에 따스한 물을 가득 받아두고 입술만 물속에 넣은 채 노래를 부른다. 물결을 일으키면서 소리가 서서히 퍼지는 모습이 꼭 내 마음이 번져가는 듯하다. 돌고래가 음파를 내보내 동료와 신호를 주고받듯, 세상 저 어디에선가 내 소리를 듣고 답해줄 이가 있을 것 같다. 소리가 욕실 벽에 닿아 메아리를 일으키면서 돌아와 피부에 닿는 기분이 들면 아픔은 잦아들고 슬픔은 줄어들어 천천히 마음의 피가 멎는다. 비통한 공명이 따스한 위무가 되어 울음이 멈추고 마음이 후련할 때까지 몇 곡이고, 몇 곡이고 노래를 거듭한다.
비참함이란 무엇인가. 언어가 심정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일이다. 사랑의 마음조차 충분히 전하지 못하면 울화가 된다. 단어와 문장이 모자라 애타는 마음에 흡족하지 못할 때도 있고, 두려움 탓에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때도 있다. 용기는 있었으나 언어가 부족하면 더욱 한스럽다. 많은 연인이 사소한 말다툼 직후에 헤어질 마음을 먹는다. 말을 덧붙일수록 오해가 커지고 간극이 벌어지면 야속함에 사랑도 얼어붙는다. 비참한 기분이 자칫 애정의 높이를 증오의 깊이로 만든다. 현명한 사람은 잘못이 분명할 때는 곧장 사과하고, 책임이 모호할 때는 침묵할 줄 안다. 사랑에는 언어로 해결 못 할 일이 있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다른 일들은….
마음에는 언어가 도저히 가닿지 못할 곳이 있다. 일찍이 니체는 이를 “영혼의 아주 자잘하고 미시적인 부분들”이라고 했다. 이곳은 너무 자잘해 성긴 손으로는 움켜쥘 수 없고, 너무 좁아 너른 걸음으로는 지나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도 무시하지는 못한다. 심장에 박힌 가시처럼 아려서 도무지 외면할 수 없다. 니체는 “아주 작은 것의 대가”인 예술가, 특히 음악가만이 작은 마음을 체질해서 감각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어디에도 기대지 못하는 찢긴 마음을 음악만이 위안할 수 있는 이유다. 형언하지 못할 감정이 몰아칠 때 나도 모르게 음악을 듣거나 노래를 부르는 이유다.
세상 어딘가 나와 공명하는 것이 있다
물속으로 보내는 노래에 상처받은 내 마음이 온전히 담긴 것은 아니다. 정민 교수의 말처럼 언제나 “비슷한 것은 가짜”다. 이미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지금 내 심정을 대신할 수 없다는 근본적 절망만이 인간을 창조자로 만든다. ‘상처받았을 때 듣는 음악’ 같은 플레이리스트는 아무리 많이 담아놓아도 소용없다. 누군가 제 기분을 위해 모아놓은 음악을 그저 반복하는 것 만으로 ‘내 상처’가 사라져 치유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어떤 기분은 도저히 공유될 수 없다. 미리 마련해둔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도 별로 쓸모없다. 지금의 이 상처는 그때의 그 상처가 아니다. 좋은 신은 기도할 때마다 항상 새로운 언어로 응답한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자잘하고 미시적인” 영혼에는 또 다른 “아주 작은 것의 대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오늘의 노래는 모두 옛 노래에서 한 소절을 더해 만든다. 머릿속에 무작위로 떠오르는 노래를 한 소절씩 물 속으로 내보내다 보면, 소리가 저 멀리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을 “자잘한 마음”을 데리고 돌아오는 가슴 찡한 순간이 있다. 피부가 올올이 일어서고 등뼈가 한 칸씩 곤두서는 순간이다. 인간은 단지 음악을 듣고 노래를 부름으로써 위로받는 게 아니라 마음의 미세한 주파수가 우주 어딘가의 적절한 파장과 마주쳤을 때 잠깐이라도 상처를 잊는다. 천지간에 나 홀로 외로이 있지 않고 어딘가 나와 공명하는 것이 있음을 깨달을 때 구원을 얻는다. 음악이 우리를 이끈다.
자기 몸을 악기로 만든 사람만이 좋은 소리를 낸다
학창 시절 음악대학 뒤쪽 잔디밭에 누워 있는 걸 좋아했다. 등 뒤로는 오랜 시간 떨어져 쌓인 솔잎들이 푹신하고, 머리 위로는 감청색 하늘에 구름이 천천히 흘러간다. 따스한 봄볕은 얼굴을 간질이고 썩어가는 흙냄새는 마음을 평안하게 한다. 연습실에서 쏟아지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 온갖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온다. 익숙한 한 줄기 가락에 집중해 다른 소리를 골라내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으로 연습실에서 홀로 악기를 연주하는 이가 떠오른다. 몇 번이고 같은 소절을 연습하는 장면을 그려내고 싶었다.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따뜻이 흐르는 공기를 즐기다가, 때때로 노트를 무릎에 받치고 시나 소설을 쓴다. 어느 순간 아리아나 가곡이 다른 소리를 제압하고 치솟아 오르기도 한다. 놀라운 폐활량, 강한 횡격막, 세 옥타브 이상을 능숙하게 오르내리면서 수많은 장식음을 정교하게 처리하는 기술이 놀랍다.
‘말하기’와 ‘노래하기’는 다르다. 언어 능력은 뛰어나나 음악 능력은 형편없는 사람들이 많다. 가벼우면 음치, 박치라 불리지만, 때때로 말은 할 수 있는데 음악은 전혀 할 수 없는 ‘실음악증’도 나타난다. 먹는 입과 키스하는 입이 다르듯, 말하는 입과 노래하는 입은 똑같지 않다. 같은 기관을 쓴다고 양자가 통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인간의 말하는 기계와 노래하는 기계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아리아든 판소리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자기 몸을 악기로 만든 사람만 좋은 소리를 낸다. 사실 사람의 일은 대부분 비슷하다. 성악가가 바라는 소리를 내려면 오랜 연습이 필요하듯, 꾸준한 실천을 통해 자신을 단련하는 사람만이 삶을 원하는 형태로 바꿀 수 있다. 인생은 예술을 닮을 때에만 진실에 가까워진다.
언제 어디에서나 바라는 소리를 자유롭게 내려고 성악가들은 벨칸토bel canto라는 창법을 익힌다. 이탈리아어로 벨bel은 ‘아름답다’ 이고, 칸토canto는 ‘노래’다. 벨칸토는 가수의 몸을 ‘아름다운 소리’ 를 내는 악기로 단련시킨다. 다채롭고 화려하며, 아득히 높고 단단한 소리는 흉내조차 낼 수 없다. 다져지지 않은 낮은 소리는 쉽게 무너지고, 훈련받지 않은 높은 소리는 찢어진다. 함부로 따라하면 성대를 다치기까지 한다. 작곡가들은 더 아름다운 소리를 요구함으로써 성악가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성악가들은 놀라운 기교를 연출함으로써 작곡가들을 자극한다.
©Winfrief Satzger / EyeEm / Getty Images
"어디에도 기대지 못하는 찢긴 마음을 음악만이 위안할 수 있는 이유다. 형언하지 못할 감정이 몰아칠 때나도 모르게 음악을 듣거나 노래를 부르는 이유다."
가수는 노래로 인간의 모든 것을 다룬다
하나의 오페라에는 온화하고 부드럽고 유쾌한 서정성부터 극한의 공포와 증오와 슬픔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장면이 들어가고, 가수들은 각 장면이 담고 있는 다양한 감정적 진실을, 즉 ‘아주 자잘하고 미세한 마음’을 각기 다른 음색으로 연주할 것을 요구받는다.
베르디 오페라의 최고 절창 중 하나인 <라 트라비아타>의 ‘안녕, 지난날이여’에서 가수는 죽음을 앞둔 자의 쓸쓸함, 사랑을 잃은 아픔, 달콤한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 구원에 대한 갈망 등을 3분 30초의 짤막한 연주를 통해 모두 담아야 한다. 목소리는 돌아볼 때는 낮게 읊조리고, 그리워할 때는 아련히 퍼지고, 고통을 호소할 때는 높아지고, 신을 부를 때는 간절해진다. 인간의 감정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이를 목소리에 실을 수 있는 탁월한 표현력을 함께 갖추어야 이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다. 바그너는 소프라노에게 이와는 완전히 다른 자질을 요구한다. 이 탓에 베르디와 바그너를 둘 다 잘 부르는 가수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가수가 된다는 것은 무수한 연습을 통해 ‘아름다운 소리’를 낼수 있도록 신체를 진화시키는 과정이다. 연주자가 신체를 악기에 맞도록 꾸며가듯, 성악가는 신체를 다채로운 소리에 공명하는 울림통으로 바꾸어간다. 어떤 음정이든 표현할 수 있는 단단한 목소리, 기쁨과 슬픔을 전할 수 있는 섬세한 표현력, 감미로운 속삭임과 강렬한 카리스마를 함께 갖춘 목소리를 타고나는 사람은 없다. 생물학적 유전자에는 없고 문화적 유전자에만 있는 것을 능숙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을 전문가라고 한다. 우리 문명의 수준은 타고난 것으로 이룩할 수 있는 것을 아득히 넘어서 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자신을 단련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경탄을 자아낸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인 성악가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음악이 우리를 이끈다.
음악 안에는 신이 있다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우주의 질서에 참여한다. 음악은 듣기만 할 수 없다. 좋은 음악은 우리 자신의 공명통을 움직여 함께 연주하도록 만든다. 가령 음악은 우리 동작을 춤으로 바꾼다. 우리 근육을 자극해 저절로 어깨가 들썩이고 팔이 올라가며 다리를 움직이게 만든다. 음악은 우리 신체를 춤추는 육체, 예술가의 몸으로 변이시킨다. 유한한 몸을 무한한 질서에 맞추어 움직이도록 바꾸어간다. 노래는 우리 마음을 끌어올린다. 일찍이 괴테가 말했듯, 노래는 “우리 내부에 있는 더 나은 자아를 자극해 자기와 함께 날아오르도록” 만든다. 음악 안에는 신이 있어 노래할 때 우리 숨결은 신의 호흡을 닮아가고, 우리 정신은 신의 질서를 흉내내며, 우리 마음은 날아올라 신의 영역에 닿는다. 음악이 우리를 높은 곳으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