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보다 그릇에 먼저 눈이 가는 경우가 있다. ‘바다의 도시’ 베네치아에 갔을 때 리알토 다리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먹물 파스타를 주문했다. 운하를 오가는 검은 곤돌라를 바라보며 잔뜩 기대하며 기다리기를 한참, 이윽고 눈앞에 음식이 놓였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파스타가 먹음직했다. 그러나 시선은 곧 그릇으로 향했다. 흰 바탕에 푸른 물감으로 바다 생물을 가득 그린 접시였다. 그릇은 오래돼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온갖 물고기, 새우, 고래가 춤추듯 헤엄치는 모습은 생동감이 넘쳤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림의 전체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마찬가지로 음악보다 만듦새가 애호가를 매료시키는 음반이 있다. 미국 RCA 음반사의 소리아Soria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RCA는 1960년 전후로 소리아 시리즈를 발매했다. 음반들은 재킷이 고전 장서를 닮았고, 고급스러운 북클릿을 함께 제공했다. 북클릿은 정교한 인쇄 지면에 별도로 인쇄한 고해상도 그림을 하나하나 손으로 붙였는데, 제작을 스위스 디자인 회사 스키라Skira에 맡겼다. 한마디로 소리아는 최고의 사치를 부린 음반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풍요와 LP 전성기를 대표하는 기념물이라 할 만하다.
얼마 전 음반 가게에서 소리아 LP 한 장을 발견했다. 다리우스 미요Darius Milhaud의 ‘세상의 창조(La Cre´ation du Monde)’였다. 만지작거리다 내려놓고 왔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다음 날 다시 가서 들고 왔다. 재킷에 실린 페르낭 레제의 새 그림이 밤새 머릿속에서 펄럭였다. 레제는 프랑스 화가로 미요의 ‘세상의 창조’ 초연 때 무대와 의상 디자인을 맡았다. 원시적이고 대담한 새 그림은 무용수의 의상에 사용한 것이었다.
다리우스 미요는 프랑스 음악가다. 현대 작곡가로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하는데, 좀처럼 그의 음악을 찾아서 듣게 되지는 않는다. 바로크, 고전, 낭만의 틀을 벗어난 현대음악은 여전히 즐겁게 몰두하기 어렵다. 그래서 음반점에서 소리아를 발견하고도 그냥 두고 온 것이다. 미요의 음악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현대음악인 줄 알았는데 스피커에서 재즈가 흘러나와 놀랐다. 재즈는 고민하지 말고 느끼면 된다. 미요는 1920년 런던에서 처음 재즈를 접했다. 상당히 짜릿했던 모양이다. 2년 뒤에는 본고장 미국으로 건너가 재즈에 푹 빠졌다. 뉴욕 할렘의 한 클럽에서 들은 재즈를 그는 이렇게 묘사했다. “드럼 비트가 깔리고 멜로디 라인이 깨지고 비틀어진 리듬 패턴으로 숨 가쁘게 교차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미요는 즉시 작곡에 돌입해 1923년 ‘세상의 창조’를 완성했다. 아프리카 민속 신화에 뿌리를 둔 천지창조였다. 15분가량의 발레 음악으로 연주자는 지휘자를 포함해 20명이 넘지 않았다. 통통 튀는 리듬, 블루지한 멜로디, 스윙감 넘치는 클라이맥스가 본격 재즈 음악이다. 그해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도 했다. ‘세상의 창조’를 좋아한 레너드 번스타인은 이렇게 평가했다. “재즈에 잠깐 추파를 던진 게 아니라 진짜 연애를 했다.”
나는 소리아 LP로 ‘세상의 창조’를 연거푸 들었다. 샤를 뮌슈가 보스턴 심포니를 지휘한 연주는 날것처럼 생생해 오디오적 쾌감이 대단하다. 음악은 여섯 파트로 이루어졌는데 쉬지 않고 연주된다. 서곡은 텅 빈 우주처럼 어둡고 신비롭다. 색소폰이 이끄는 첫 부분이 바흐 칸타타 BWV 82 ‘Ich Habe Genug(나는 만족하나이다)’ 서두의 한량없는 슬픔과 닮았다고 느꼈다. 1곡은 창조 이전의 혼돈이다. 콘트라베이스, 트롬본, 색소폰, 트럼펫, 타악기가 한바탕 난장을 벌인다. 2곡에서는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꽃과 나무, 곤충과 새, 들짐승이 차례로 태어난다. 3곡은 떠들썩하다. 바이올린, 피아노가 놀이터에서 노는 어린이처럼 즐겁다. 탄생한 동물들이 뛰어노는 것이다. 이윽고 고요한 조화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태어난다. 아프리카 대지의 첫 인간이다. 그런데 탄생의 신비를 감싸고 흐르는 음악이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느린 악장과 흡사하다. 미요가 거슈윈의 영향을 받았나 싶지만, ‘랩소디 인 블루’가 작곡된 것은 ‘세상의 창조’ 초연이 이루어진 다음 해다. 4곡에서 남녀는 원초적 욕망에 이끌리고, 5곡에서 봄이 온 대지는 평화로운 기운으로 충만하다. 세상의 창조는 이렇게 완성된다.
하이든의 ‘천지창조’는 구약성경 창세기를 음악으로 바꿔놓은 작품이다. 감동적이지만 종교적 엄숙함이 압도한다. 미요의 ‘세상의 창조’는 재즈풍 천지창조라고 할 수 있다. 소파에 편안히 기대앉아 발장단을 맞추며 와인 한잔과 함께 듣는 게 어울리는 음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