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비는 소원
예로부터 정월에 뜨는 보름달을 보며 한 해의 건강과 풍요를 빌던 것이 정월 대보름이다.
이날은 음식 하나에도 특별한 의미를 담았다.
오곡밥과 묵은 나물
정월 대보름 전날 저녁에는 찹쌀, 수수, 팥, 차조, 콩 등 농사지은 곡식을 모두 섞어 오곡밥을 짓고, 묵은 나물로 반찬을 해 먹었다. 그해의 곡식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겼는데, 오곡밥을 지은 날은 일찍 저녁을 먹고 다음 날 아침도 일찍 먹어 1년 내내 부지런히 살자는 다짐을 했다. 또 ‘세성받이밥’이라 하여 성이 다른 세 집이 오곡밥을 서로 나누어 먹었다. 이렇게 하면 1년간 운이 좋고 더위를 타지 않는다는 풍속이다.
정월 대보름을 즐기는 법
대보름은 음력 정월 보름에 맞는 명절이다. 한자어로는 ‘상원上元’이라고 한다. 지금이야 부럼, 오곡밥, 묵나물, 약밥 등 먹을거리쯤으로 명맥을 잇고 있지만, 전통 사회에서는 동지와 설 못지않은 명절이었다.
동지는 한 해의 마무리로서 농한기에 접어드는 즈음에 있는 절기다. 농업이 모든 일의 중심이던 때에는 온 나라가 휴가철에 접어드는 시기였던 셈이다. 설에 이르러서는 무사히 한 해를 맞은 기쁨을 만끽한다. 이어 대보름을 지나면 새봄 농사가 코앞이다. 휴일이 끝물이자 절정에 달한 것이다. 전통 사회 대보름의 의의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먹을거리만 해도 그렇다. 농한기니 뭐든 더 할 수 있다. 갈무리한 견과, 곶감, 나물 등도 마침 맛이 들 만큼 든 때다.
비지땀 흘리며 불 앞을 지키는 여름보다 팥죽, 묵, 두부 따위를 쑤기도 좋다. 겨울 꿩 사냥, 멧돼지 사냥 덕분에 육류도 여유가 있다.
이때의 감각은 정학유(丁學游, 1786~1855)가 쓴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 여실히 드러난다.
“[전략] 보름날 약밥 제도/신랏적 풍속이라/묵은 산채 삶아내니/육미肉味를 바꿀쏘냐/귀 밝히는 약술이요/부(스)럼 삭는 생률이라/먼저 불러 더위팔기/달맞이 횃불 켜기/흘러오는 풍속이요/아이들의 놀이로다 [하략]”
동시대 사람 김형수金逈洙는 <농가십이월속시農家十二月俗詩>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전략] 말리고 묵힌 이 나물 저 나물 데치니(爛炸各種枯陳菜)/담박한 그 맛 어포, 육포에 비하랴(淡味豈可鱐腊鱐腊比)/모인 노인들은 귀밝이술 서로 권하고(社翁相屬治聾酒)/아이들은 앞다투어 부스럼 막는 부럼을 깨무네(村兒爭嚼消瘍栗) [하략]”
아이들에게도 놀이와 먹을거리가 돌아갔으니 대보름이란 전통 사회에서 상하귀천 없이 모두가 즐긴 휴일이라고 하겠다. 휴일 어른과 노인에게는 귀가 더욱 밝아진다는 술이 돌아가고, 아이들한테도 귀하디귀한 견과가 돌아갔다.
부럼은 특히 당장의 치아 건강을 가늠하는 동시에 한 해의 건강을 비는 의미가 깃든 풍속이다. 홍석모(洪錫謨, 1781~1857)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보름날 이른 아침에 밤·호두·은행· 잣·무 등을 깨물며 ‘1년 열두 달 아무 탈 없이 평안하고 부스럼 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고 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처럼 예전 부럼에는 견과뿐만 아니라 무도 있었다. 땅콩이 아메리카에서 동아시아로 건너온 뒤에는 부럼에 새로 껴들었다. 부럼의 세목에도 이와 같은 역사적인 변화가 깃들어 있다.
밥도 여느 밥에 견주어 손이 몇 번이나 더 가는 오곡밥을 지었다. 문헌에는 <동국세시기>에 ‘오곡잡반五穀雜飯’이라는 말로 처음 등장한다. 홍석모는 이 밥은 이웃과 나누어 먹는 밥이라고 했다. 오곡은 지역에 따라 내용이 다르다.
쌀은 빠질 수 없지만 기장·수수·콩·팥·차조·녹두·보리 등의 구색은 제각각이다. 아무튼 오곡을 통해 ‘나를 먹여 살리는 주곡’을 돌아보는 효과가 있다. 대보름의 묵나물 또한 기본 식생활에서 이어지는 먹을거리요 풍속이다. 나물은 그대로는 장기간 저장할 수 없다. 더구나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하는 한반도에서 묵은 나물 갈무리는 김장 못지않은 일이었다.
제철에 무·무청·가지·호박·박·고사리·취· 고추·고춧잎 등을 말리거나 삶거나 데쳐 잘 갈무리하면 새봄에 새순을 뜯기 전까지 밥상이 든든하다. 대보름의 묵은 나물 상차림은 일상의 안녕을 확인하고 기원하는 의례였다.
보다 공들인 별미도 빠질 수 없다. 대보름의 약밥은 가장 귀한 한 시절의 별미였다. 이번엔 <경도잡지京都雜志>를 펴보자. “찹쌀밥에 대추 과육, 곶감 그리고 찐 밤과 잣을 섞은 다음, 다시 꿀·참기름·진장으로 맛을 낸 것을 약밥[藥飯]이라고 한다.
대보름에 제일 좋은 음식으로 옛 신라 때부터 이어진 풍속이다.” 이미 조선시대부터 대보름과 약밥은 신라시대 이래의 유서 깊은 풍속이자 멋진 음식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약밥의 기본 조리법은 면면하다. 한편 허균(許筠, 1569~1618)은 중국인들도 약밥을 좋아해 배워서 해 먹는데 약밥을 ‘고려반高麗飯’이라 부른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으니 약밥은 국제적으로 매력을 뽐낸 음식인 셈이다.
이울 때가 되어 절정인 휴일, 새봄은 바라보인다. 마침 깨끗한 보름달이 뜰 테고, 그 아래서 힘든 가을걷이를 지나며 잘 갈무리한 곡물과 묵은 나물로 새로 상을 차려 공동체의 안녕을 빈다. 여기에 견과 몇 알 있으면 더 좋다. 약밥 같은 멋진 별미가 있으면 더욱더 좋을 테다. 조상들은 대보름을 이렇게 쇠며 새봄으로 건너갔다.
정월 대보름의 아홉 가지 묵은 나물
오곡밥 반찬으로 풍성하게 담아 먹던 것이 아홉 가지 묵은 나물이다. ‘진채’라고도 부르는데, 전해에 말려둔 나물을 물에 삶고 불려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했다. 이때 먹는 나물의 종류는 지역마다 달랐는데 강원도 같은 산간 지역에선 취나물을, 바다 가까운 곳에서는 모자반 같은 해초를 말려 먹기도 했다.
갈증을 해소하는
박고지
어린 박의 과육을 긴 끈처럼 오려서 가을볕에 말린 것으로 ‘박오가리’라고도 한다. 항노화 물질이 있어 임금님 수라상에 꼭 사용하던 재료로 전해지는데 〈동의보감〉에는 열을 내리고 갈증을 해소한다고 소개돼 있다. 또 섬유질과 칼슘, 철, 인이 두루 풍부하다. 나물을 무칠 때는 찬물에 불려 부드러워지게 하고 물기를 짜서 국간장, 다진 마늘, 다진 파를 넣고 버무린 다음 들기름을 두른 팬에 멸치·다시마 국물을 넣고 빠르게 볶아낸다. 마지막에 깨를 더한다.
빈혈을 예방하는
시래기
가을에 무를 수확하고 잘라낸 무청을 겨우내 말리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 생채소일 때보다 영양이 풍부한 시래기가 된다. 시래기에는 식이 섬유가 가득해 노폐물 배출을 돕고 빈혈을 예방하는 철분, 칼슘, 비타민 D도 풍부하다. 나물로 무칠 때는 물에 충분히 불려 삶고 물을 여러 번 갈아가며 담갔다가 물기를 짠다. 질긴 껍질은 벗기고 부드러운 부분을 먹기 좋게 손질해 국간장, 어간장, 다진 마늘, 다진 파 등으로 양념해 멸치·다시마 국물과 들기름에 구수하게 볶는다. 들깻가루를 넣어도 좋다.
불면증을 완화하는
토란대
토란보다 베타카로틴, 칼슘, 칼륨을 3배 이상 풍부하게 함유한 토란대는 골다공증 개선이나 불면증 해소에 도움을 준다. 또 무기질과 식이 섬유도 풍부해 소화기 건강에도 좋다. 껍질을 까서 가을볕에 말리면 풍미와 식감이 더욱 좋아지는데, 무칠 때는 토란대를 삶은 뒤 물에 충분히 담가 아린 맛을 제거한다. 국간장, 어간장, 다진 마늘, 다진 파로 버무리고 볶을 때 들깻가루를 넣으면 구수한 맛이 난다.
머리를 맑게 하는
말린 고사리
봄철에 나는 줄기가 굵고 부드러운 햇고사리를 꺾어다가 소금을 넣고 데쳐 햇볕에 말린 것을 보관해두고 먹는다. 나물로 무칠 때는 물에 충분히 불려 부드러워질 때까지 삶고 여러 번 헹군다. 물기를 꼭 짜서 국간장, 다진 마늘, 다진 파로 양념해 들기름을 두른 팬에 볶아낸다. ‘산에서 나는 소고기’라 불리는 고사리는 칼륨과 인이 특히 풍부해서 머리를 맑게 하고 치아와 뼈 건강에 도움을 준다.
기침을 가라앉히는
말린 도라지
옛말에 “오래된 도라지는 산삼보다 낫다”고 했다. 1~3년근은 나물로 먹고, 3년근 이상 되어 쓴맛이 강한 것은 차와 약용으로 쓰이는 이유다. 껍질을 벗기고 찢어서 말린 도라지를 충분히 불린 뒤 소금과 설탕을 약간 뿌려 문질러주면 쓰고 아린 맛이 빠진다. 여기에 소금, 다진 마늘, 다진 파로 양념하고 들기름을 두른 팬에 빠르게 볶는다. 도라지의 사포닌 성분은 기침, 가래, 염증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다.
면역력을 높이는
말린 표고버섯
표고버섯을 말리면 더 깊은 향과 맛을 내고 영양도 좋아진다. 〈본초강목〉에는 표고버섯이 기를 북돋고 허기를 느끼지 않게 하며 풍을 고치는가 하면 피를 잘 통하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연 면역 증강제인 베타글루칸이 풍부해 감기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 나물로 무칠 때는 찬물에 충분히 불려 물기를 짜고 국간장, 다진 마늘, 다진 파에 버무려 들기름에 볶아내고 깨를 뿌린다.
이뇨 작용을 돕는
호박고지
애호박이나 호박을 얇고 길게 썰어 가으내 햇볕에 말린 나물로 저장성이 좋아 오래전부터 즐겨 먹어왔다. 햇볕에 말리는 동안 비타민 D가 더 풍부해지며, 〈본초강목〉에 호박은 기운을 북돋고 이뇨 작용과 부종 제거에 좋다고 했다. 나물로 조리할 때는 물에 불려 물기를 꼭 짜고 국간장, 소금 등으로 간해 들기름과 멸치·다시마 국물로 빠르게 볶는다.
혈액순환을 촉진하는
말린 취나물
정월 대보름에는 오곡밥을 김이나 취나물에 싸서 ‘복쌈’을 먹으면 복이 달아나지 않는다 여겼다. 취나물은 어린잎이 아니면 수산이라는 독성 성분이 있어 주로 데치거나 말려서 먹는데 칼슘, 칼륨, 철분, 비타민 A가 풍부하다. 물에 충분히 불려 삶아 물기를 제거하고 국간장, 다진 마늘, 다진 파로 버무려 들기름을 두른 팬에 멸치·다시마 국물로 볶아낸다.
열을 내리는
말린 가지
가지는 섬유질이 단단하지 않아 삶거나 찌면 부피가 줄고 물이 많이 나온다. 물에 불리면 5배 정도 불어나는 가지를 서너 번 헹구어 물기를 짜고 설탕, 소금, 국간장, 다진 마늘, 다진 파, 생강즙 등의 양념으로 버무려 볶아낸다. 가지에는 열을 내리고 혈액순환을 도우며 통증과 부기를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건강과 풍요를 비는 밥상
정월 대보름에 먹는 음식에는 저마다의 소원과 의미가 담겨 있었다. 오래전 풍습이지만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으로 복을 비는 마음만은 오늘날 우리의 식탁에도 전해진다.
명길이 국수
정월은 음력으로 한 해의 첫 달이다. 이달 14일에 정월 대보름 명절이 시작되는데 이날을 작은 보름, 15일을 대보름이라 불렀다. 작은 보름날 점심에 별식으로 먹던 것이 명길이 국수로, 국수 면발처럼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국수를 쫄깃하게 삶고 달걀지단, 볶은 소고기, 애호박, 홍고추 고명을 올린 후 다시마 국물로 만든 장국을 부어 완성했다.
섬만두
‘섬’은 짚으로 엮은 곡식 가마니를 이르던 말.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는 평소보다 크게 속을 꽉 채운 만두를 빚었는데, 여기에는 벼농사가 잘되어 큼지막한 만두처럼 쌀섬이 많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미리 빚어둔 만두는 달맞이를 하고 들어와 만둣국을 끓여 먹기도 하고 쌀섬을 쌓아두는 광에 보관했다가 꺼내 먹기도 했다.
귀밝이술
‘명이주明耳酒’라고도 하는 귀밝이술은 정월 대보름날 아침 데우지 않은 청주나 소주 한 잔을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귓병이 생기지 않으며, 한 해 동안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해서 마셨던 술이다. 아이들은 입술에 술을 묻혀주는 등 남녀노소 모두 덕담을 주고받으며 귀밝이술을 즐겼다. 술을 빚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설날 아침 차례상에 올리고 남은 술을 사용한다.
약밥
정월 대보름에 대해 가장 오래된 기록이 남아 있는 <삼국유사>에는 신라 소지왕이 까마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덕분에 대보름에 검은 찰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정월 대보름에 짓는 약밥의 유래인데, 찰밥에 약으로 치던 꿀이 들어가 약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밖에도 대추, 밤, 잣, 참기름, 간장 등을 넣어 버무린다. 오늘날에도 지역에 따라 약밥을 까마귀나 까치가 먹도록 밖에 내놓는 곳이 있다.
생떡국
오래전부터 새해 아침에 떡국을 먹으면 한 살을 더 먹는다고 했다. 정월 대보름에도 농사가 잘되기를 기원하며 떡국을 먹는데, 이때는 가래떡 대신 집에서 만들기 쉬운 생떡국을 주로 먹었다. 쌀가루를 뜨거운 물에 익반죽한 뒤 치대 가래떡 모양의 반죽을 만들어 엽전처럼 동글게 썰거나 떼어내 새알처럼 빚고, 소고기 장국에 끓여낸다. 가래떡과 달리 경단처럼 부드러운 맛이 특징이다.
editor Kim Joohye객원 에디터 writer Koh Young음식 문헌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