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명상, 눈 속의 북한강을 산책하다
2022/02 • ISSUE 44
순백한 세상, ‘아아, 아아!’ 감탄할 뿐
피어오르는 안개에 감싸인 채 반짝이는 얼음 강은 천천히 흐르고, 눈이 내려앉은 나무에는 가지마다 흰 꽃이 열려 있다. 하얀 뭉게구름 같은 갈대 군락은 저 끝까지 뻗어 있고, 때때로 그 사이에서 다리를 쭉 뻗은 물새가 긴 울음과 함께 날아올라 강물 위를 우아하게 비행한다.
투명한 햇빛은 맑고 따스하며, 뺨에 닿는 바람은 차갑고 서늘하다. 가는 눈이 공중에 산산이 날리면서 순간적으로 오색 무지개를 연출한다. 들판 가득 흰 눈이 쌓여서 만물은 색깔을 잃고 형태와 명암만 남았다. 천지가 오로지 순백한 세상이다. 이곳에 나 홀로 점으로 있다.
인간은 작은 존재다. 기껏해야 대여섯 자 눈높이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그나마 시시하고 사소한 이해에 붙들려 눈이 좁아진다. 기억은 길어야 수십 년을 넘지 못하는데, 뇌는물렁물렁해 경험을 단단히 붙잡지 못한다. 흐르는 시간 앞에서 흩어지고 무너져서 윤곽선조차 흐릿할 뿐이다. 무한히 큰 존재나 영원히 이어지는 세계를 몸이 혹여 느껴도, 그 성스러움을 마음이 감당하지 못하고 언어가 다가서지 못한다. 그저 ‘아아, 아아!’ 감탄할 뿐이다. 지금이 그 순간이다.
일찍이 붓다는 눈 덮인 산이 곧 열반이라고 말했다. 차가운 기운이 정신을 맑히고 어지러운 마음을 깨끗이 씻어서 세속에 얽매인 모든 분별을 넘어서면 어느덧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걸음마다 차가운 꽃이 맺히고, 말마다 철저하게 맑다.” 순백의 눈은 정신을 일깨우는 차가운 꽃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맑은 언어를 가져다준다.
눈은 이처럼 우리 마음에 어떠한 깨달음을 일으킨다. 아등바등 욕망으로 물들인 세계가 자연의 작은 변동만으로 한나절도 안 돼 헛되이 스러지는 것을 보면, 우리의 운명 또한 같을 것을 예감할 수 있다. 눈 내린 풍경에서 우리는 우주의 영구성과 인간의 무상성이 선연히 겹치는 걸 본다. 쓸쓸한 기운이 일어나고, 삶을 돌봐야겠다는 마음이 강물처럼 끝없이 밀려든다. 그래서 눈 속 산책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걷는명상으로 저절로 바뀐다.
우리 안에는 심오함이 있다
2007년 시카고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마크 버먼은 자연 속을 산책하는 것이 인간의 흩어진 주의력을 충전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까다로운 문제를 낸 직후 실험 참여자 절반은 수목원을 산책하게 하고 절반은 도심을 걷게 한 다음, 불러들여 다시 시험을 치르게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숲을 산책한 사람들의 성적이 크게 높아진 것이다. 자연을 산책하면 인지 기능이 향상되고, 기분이 한결 좋아지며, 불안이나 우울 같은 증세가 완화되고 집중력이 높아진다. 자연은 내적 목소리를 조절하는 도구를 제공하므로 자연을 접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신 건강도 좋아진다. 미시간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이선 크로스의 <채터, 당신 안의 훼방꾼>에 나오는 이야기다.
내면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잦아들면 훼방꾼을 무찌르고 평온과 안정 속에서 내면의 우주를 탐구할 수 있다. 자연과 비교해 인간은 유한한 존재지만, 헤겔이 말하듯 다행히 우리 안에는 내밀함이 있다. 유리처럼 허약해 순식간에 파괴되는 삶일지라도 우리가 이룩한 내면은 바다보다 넓고 태산보다 높을 수 있다. 우리 마음에는 무한히 파 들어갈 만한 한계 없는 심오함이 깃들어 산다. 바깥의 우주에 대응해서 내면의 우주를 가꾸는 것이 영성이고, 글이든 그림이든 노래든 두 우주의 마주침을 적절한 언어로 바꾸어 보여주는 힘이 예술이다.
자신의 영혼을 낚는 어부
"풍경의 아름다움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이기지 못한다.
정작 찾아야 할 것은 자기 안의 아름다움이다."
눈 내리는 세상은 온통 고요하다. 새도 날지 않고, 사람도 오가지 않으며, 다른 낚싯배도 존재하지 않는다. 쏟아지는 눈 속에서 노인은 홀로 자신을 만나고 있다. 끊어짐(絶), 없어짐(滅), 외로움(孤)이라는 단어들이 눈송이처럼 한 행씩 내려서 마지막 행의 ‘혼자서(獨)’에 쌓인다. 노인은 지금 무엇을 하는 중일까. 물고기를 낚는 게 아니라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영혼을 낚는 중이다.
노인이 바라보는 강물은 시간이다. 살아온 인생이고 남은 인생이다. 노인은 자신의 기억에 침잠해서 파편으로 흩어진 수많은 사건을 돌이켜 살펴서 하나의 흐름으로 꿰는 중이다. 자아가 물리적 실체라기보다 일종의 환각이고 하나의 이야기로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상황이 달라지고 관계가 변할 때마다 인간은 몇 번이고 자기를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것이다.
잘못을 저질러도 뉘우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고, 실수를 저질러 함정에 빠져도 성찰해서 헤어나올 수 있다. 연인을 만나고 친구를 사귀고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는 자기 이야기를 다시 써서 인생의 새 출발을 선언한다. “너를 만나려고 내가 지금까지 살았구나.”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은 엄청난 사건이 아니라 봄에 꽃이 피어도, 여름에 비가 내려도, 가을에 바람이 불어와도, 그때마다 자기 내면의 줄거리를 새롭게 지어내고, 그로부터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간다. 눈 내리는 풍경 속에서 시인은 지금 삶을 다시 발견하는 중이다.
시인이 그려낸 것은 현실의 풍경이 아니라 마음의 풍경이다. 이미 주변 산야는 백색으로 가득하고, 쏟아지는 눈은 강물에, 고깃배에, 삿갓과 도롱이에 내려 쌓이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눈에 덮여 순일한 백색의 세계로 변할 것이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아득한 세계에서 시인은 범속한 것을 모두 씻어버리고 내면에서 고고한 청정함을 이룩한다.
차가운 강(寒江)은 노인이 등에 진 현실의 크디큰 고통을 상징한다. 그러나 엄혹한 추위에 몸을 웅크리면서도 노인은 한시도 낚시를 멈추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것은 몸의 아픔이 아니라 영혼의 결핍이다. 뺨에 닿는 눈을 오히려 차가운 각성의 재료로 삼아 노인은 청정하고 명징한 정신의 세계를 열어간다. 그리하여 강물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은 그윽하고 형형하다. 천지에 눈꽃이 가득 피어나는 것처럼, 노인의 내면에는 진리의 꽃이 맺히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라
눈 내린 강가의 맑고 쓸쓸하고 황량하고 차가운 세계는 잡스럽고 북적이고 번화하고 뜨거운 세상에 대비되는 탈속한 분위기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희디흰 눈은 마음의 더럽고 어두운 기운을 씻어주고, 끝없이 펼쳐진 청정한 세계는 정신을 아득한 무한을 향해 치닫게 한다. 눈에 덮인 하늘과 땅, 강물과 산이 귓가에 속삭인다. “좋은 삶을 살고 싶으면 보이는 것을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라.”
걸을수록 영혼이 쩌렁쩌렁 울린다. 눈 내린 북한강에는 고깃배가 한 척도 없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서 낚싯줄 드리운 어부를 찾아서 오늘도 눈 덮인 강가를 몇 시간이고 산책한다.
writerJang Eunsu 출판 편집인, 문학평론가 editorJang Jeong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