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나무가 전하는 말
나무가 지키는 땅
오래된 나무는 척박한 곳에서 자란다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나무는 파키스탄 카라코람에 있는 향나무로 1천4백67살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도 1천 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나무가 열세 그루 있다. 울릉도 도동의 향나무는 2천5백 년, 정선 두위봉 주목이 1천4백 년,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가 1천1백 년 묵었다고 추정한다. 학자들은 이런 나무들은 대부분 전설을 품고 있어 생물학적 나이보다 오래된 것으로 여긴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줄여 잡아도 이 나무들에는 수백 년 세월이 온전히 응축돼 있다.
인생이 꼬여서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 오래된 나무들이 생각난다. 종말의 위기를 맞은 엘프들이 어머니 나무 아래 모여들듯 ‘이번 생은 망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 몸이 저절로 세월의 온갖 풍파를 견뎌온 거대한 뿌리 앞으로 이끌린다. 집에서 차로 1시간, 용문사 은행나무 앞으로 가서 숙연히 말을 듣고, 마음에 그 형상을 담아온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은행나무는 높이 42m, 둘레 14m이고 크게 세 갈래로 뻗은 가지는 폭이 동서와 남북 각각 28m 정도 된다. 나무는 어릴 때는 키가 자라지만 나이 들어 한계에 다다르면 둘레만 늘어난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오래된 나무답게 몸통은 원기둥 형태로 우람하게 솟아오르고, 굵은 뿌리는 울퉁불퉁 땅 위에 노출되어 있다. 아직은 힘이 남아 있는 듯 묵직한 가지에 잔가지들이 달려 울울창창 잎을 맺는다. 예전보다 줄었다 해도 가을이면 은행 열매가 몇 가마다. 자연은 공평하다. 풍요로운 땅에서 웃자라는 나무는 이상하게도 바삐 늙어 스러진다.
미국 식물학자 발레리 트루에에 따르면, 오래된 나무 대부분은 오지에 있는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다. 인간 가까이에 있는 나무는 오래 살기 힘들다. 튼튼한 건물을 짓고 좋은 가구를 만드는 데는 나무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좋은 환경에서 자란 나무는 나이테 간격이 넓고 목질이 대개 무르다. 이런 나무는 곤충과 세균이 침투해 서식하기 좋으므로 쉽게 병들고 썩어 부스러진다. 반대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나무는 영양분이 부족하므로 나이테를 크게 불릴 수 없어 천천히 성장하지만 촘촘하고 단단하다. 바람이 강하거나 추위가 거세기 쉬우므로 온몸에 상처가 가득하다. 바람과 타협하며 뒤틀리고, 추위를 기억해서 움츠리며, 때때로 두껍게 쌓이는 눈을 견디려고 껍질을 단단히 한다. 천천히 끈기 있게 자라는 만큼 이 나무들은 강하고 튼튼하다. 해충도 세균도 함부로 침투할 수 없다. 영국 작가 리처드 메이비는 세월의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빅 트리big tree에는 마나(mana, 우주의 힘)가 깃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곳곳에 불거진 옹이, 깊게 팬 구멍, 튀어나온 혹은 나무가 견뎌온 고난의 시간을 환기한다. 흉터의 크기와 개수가 마나의 깊이와 넓이를 만들어낸다. 용문사 섬돌에 앉아서 가만히 나무를 보고 있으면 어머니 나무가 내 마음의 귀에 속삭인다. 상처 없는 영혼은 없다. 꽃길만 걸었던 삶은 쉽게 무너진다. 잔혹한 상처를 견디는 영혼만이 인생을 기념비로 만들 수 있다.
"행복은 신이 우리를 나무 삼아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나무를 잃으면 인간도 소멸한다
나무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
켈트 신화에서 나무를 섬기는 사제를 드루이드druid라고 한다. 이 말은 열매 달린 나무를 뜻하는 희랍어 덴드로(dendro-)와 관련이 있다. 이 말은 고대 인도·유럽어 데루(deru-)에서 왔는데, 데루는 ‘단단한, 견고한, 불변하는’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삶이 덧없고 짧고 변화무쌍하다면, 나무의 삶은 영구히 변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기나길다. 나무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변하는 것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보는 일과 다름없다. 우리는 이를 ‘가치’라 부른다. 시간을 견뎌서 얻을 수 있는 삶의 비결 말이다. 독일 바이올린 장인 마틴 슐레스케는 오래된 나무를 골라서 악기를 만들며 그 안에서 신의 음성을 듣는다.
“충만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을 통해 무엇이 실현되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행복은 신이 우리를 나무 삼아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늘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것, 그것이 행복의 본질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신의 악기로 사는 것, 오래된 나무는 우리에게 그 삶을 떠올려보라고 속삭인다. 상처를 견디고 흉터를 쌓으면서 네가 연주할 노래는 무엇인가. 너는 삶으로 어떤 노래를 작곡하고 있는가. 오래된 나무를 만나러 가는 길은 이러한 질문 앞에 마주 서는 일이다.
writerJang Eunsu 출판 편집인, 문학평론가 editorLim Ji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