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균열을 포착하는 풍경화
다양한 인종과 성, 힙합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의 문화적 배경을 새로운 회화적 정체성으로 승화시키는 타이슨 리더.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자.
Tyson Reeder, Grape, acrylic and graphite on canvas, 81.3111.8cm, 2022 Courtesy of BB&M
최근 뉴욕 미술계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 타이슨 리더. 시카고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그는 하위문화의 일상을 차용한 몽환적 풍경화를 통해 미국 구상주의 회화의 명맥을 잇는 주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다양한 회화적 실험과 우연적 개입을 통해 풍경화가 짊어지고 있는 예술사적 짐을 벗어던질 것을 독려하는 그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 매디슨 현대미술관, 루벨 패밀리 컬렉션 등 주요 미술관에서 꾸준히 선보이며 소장되고 있다.
도시와 자연이 겹쳐지는 몽환적 풍경
타이슨 리더의 작품 세계를 톺아보려면 실로 다양한 매체의 영역을 넘나들어야만 한다. 그는 회화뿐만 아니라 장소 특정 비디오 설치작가, 영화감독, 퍼포먼스 작가이자 아트 페어 기획자, 갤러리와 코미디 클럽 운영자까지 ‘예술’이라는 거대한 대지 위를 종횡무진 횡단하는, 그야말로 모험가형 아티스트의 행보를 몸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 중에서도 그가 지난 수년 동안 꾸준히 회귀하며 탐색해온 매체는 ‘앙플레네르en plein air’ 기법을 활용한 풍경화다. ‘야외에서(outdoors)’로 해석되는 이 기법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화가가 스튜디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자연환경 속에서 즉흥적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일종의 ‘풍경 초상화’방식이다. 실내에서 오랜 시간 고심하는 과정을 거치기보다는 야외에서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해 내는 것이 특징인 만큼 19세기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이 특히 이 기법에 매진했다.
"그림은 발견의 행위이며
그 발견을 많은 사람과 나눌 때
예술은 비로소 무한한 즐거움의원천으로 거듭난다."
타이슨 리더 역시 인상파 기법을 활용해 자연의 풍광 속에서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공기와 빛과 바람, 강의 흐름과 수풀의 순간적인 움직임 등 현장에서 전해지는 즉흥적 감상을 자유분방한 필치로 화폭 위에 옮겼다. 하지만 두꺼운 유화를 활용해 빛의 강렬한 인상을 피력하는 대신 파스텔 톤의 아크릴 물감으로 가벼우면서도 안정적인 분위기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의 풍경화는 인상파 작품과는 확실히 구분된다.
‘리더 스타일 풍경화’라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독창적인 면모는 그의 풍경화가 도시와 자연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AVE Z’(2021)를 보자. 작품 제목‘AVE Z(애비뉴 Z)’가 실제 뉴욕 브루클린의 거리명인 것을 감안하면, 그가 브루클린 거리 어딘가에 나와 앉아 이젤 앞에서 그림 그리는 모습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연필로 가로수가 늘어선 해질 녘 도시의 모습을 스케치한 뒤 그 위에 수채화 톤의옅은 터치를 얹는 방식으로 풍경을 채집한다. 무엇보다 이채로운 것은 배치다. 일렁이는 건물 형상, 이와 대조적으로 시원하게 뻗은 야자수는 마치 콜라주가 된 듯 화면 전면에 무심히 놓여 있다. 색상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에메랄드빛의 달, 노랗게 빛바랜 건축물, 파스텔 톤의 핑크 패턴을 입은 나무와 야자수 등 대상 위에 예상치 못한색상을 입히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풍경화 패턴을 탈피한다.오랜 시간 풍경화에 매진해온 타이슨 리더가 구성과 채색에 변주를 감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는 그동안 너무 익숙해서 자주 간과해온 일상의 의미에 대해 관객이 다시금 주의를 기울이길 바랐던 것 같다. 다만 그는 도시의 풍경을 완전히 비틀어 보여주는 방식보다는 오히려 익숙한 풍경에 약간의 변화를 가하는 방식으로 말을 걸어온다. 우리는 드라마틱한 변화보다는 일상의 사소한 변주 속에서 더 자주 삶의 균열을 감지하곤 한다. 타이슨 리더는 바로 이 지점을 이용해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와 자극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색감만으로도 작품에 묘한 긴장과 향수를 불어넣는다.
Tyson Reeder, Mango, acrylic and graphite on canvas, 81.3111.8cm, 2022 Courtesy of BB&M
Tyson Reeder, Ave Z, acrylic and pastel on canvas, 91.4121.9cm, 2021
Tyson Reeder, Blueberry, acrylic and graphite on canvas, 91.44124.6cm, 2022 Courtesy of BB&M
인상파에서 야수파, 미국 구상주의까지
형식적이고 정제된 화풍을 지양하며 현실적인 소재와 자유로운 표현을 중시하는 타이슨 리더의 작품은 종종평단에서 ‘야수파의 기운’을 풍기는 작품으로 읽히기도한다. 하지만 타이슨 리더의 작가적 행보를 눈여겨본 관객이라면 그의 예술 세계를 하나의 미술사적 용어에 수렴시키기 어렵다는 데 쉽게 동의할 것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인상주의 회화의 주된 작업 방식인 앙플레네르 기법을 사용한다는 이유에서 인상주의 회화의 현대적 재해석으로 읽히기도 하고, 현실적인 삶의 모습을 특유의 몽환적 분위기로 표현해낸다는 점에서 ‘야수파(fauvism)’의 맥락으로 읽히기도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일어난 미술 운동인 야수파의 화풍이 인상파의 타성적인 화풍에 반기를 든 젊은 작가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즉 타이슨 리더의 작품에서는 19세기 인상파의 작업 기법을 경유해 그 타성에 반기를 든 20세기 야수파의 화풍까지, 상반되는 두 화풍의 흔적이 포개져 읽힌다. 더욱이 최근 그의 회화에 모터바이크, 해안 도로 풍경, 대중문화와 힙합 등의 소재가 만화 같은 스타일로 가미되면서 미국 동시대 미술계에서는 그를 미국적인 구상주의의 명맥을 잇는 주요작가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자신만의 형태와 색상, 질감등에 대한 꾸준한 탐구를 통해 전통적인 예술 방식인 회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실천적 행위로서의 예술
이처럼 형식과 내용 면에서, 또 예술사적 맥락에서도 절충적인 동시에 하나의 특징으로 수렴되지 않는 작품 감상에 대해 타이슨 리더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한 인터뷰에서 그는 스스로가 ‘게으른 거장’이 되지않기를 바란다면서 자신의 작품이 하나의 예술사적 맥락 안에서만 읽히지 않는 데 대해 오히려 반가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러한 반응에는 영상 제작자이자 큐레이터인 맷 블랙Matt Black, 친형이자 작가인 스콧 리더Scott Reeder와 그룹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데에서 받은 영향이 자리하고 있다. 타이슨 리더는 동료들과 스튜디오 밖으로 나와 아트 페어 기획, 갤러리 운영 등을 함께하면서 그림은 발견의 행위이며, 그 발견을 많은 사람과 나눌 때 예술은 비로소 무한한 즐거움의 원천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처럼 미술 밖에서의 실험적인 매체를 탐색하던 그에게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셀린느Celine와의 협업은 어쩌면 아주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아우토반’(2021)의 노란 야자수는 옷으로 재해석되어 많은 사람들의 신체 위에서 더욱 추상적인 패턴으로아름답게 반짝인다.
최근 서울에서도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지금 성북동에 위치한 갤러리 BB&M에서는 타이슨 리더를 비롯해 알렉스 도지Alex Dodge, 미코 벨드캄프Miko Veldkamp 등 미국 현대미술계의 주요 아티스트로 부상 중인 5명을 선정해 <드림 라이프DreamLife>라는 이름의 전시로 다채로운 회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7월 2일까지 열리는 전시에서 타이슨 리더의 최신 풍경화는 물론 뉴미디어, 뉴테크놀로지, 팬데믹 상황 등 동시대 라이프스타일을 자신만의 고유한 기법으로 반영한 새로운 시각언어를 향유할 수 있다. 문화적 배경과 주제 의식, 스타일은 제각각이지만 다섯 작가의 작품에는 전통 회화의 틀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부단한 시도가 공통적으로 담겨 있다. 지난봄, 타이슨 리더와 셀린느의 협업을 취재한 조 로이드Joe Lloyd가 시각문화 전문지 <엘리펀트 매거진Elephant Magazine>에서 밝혔듯이 미묘하고 독특한 정서를 지닌 타이슨 리더의 내면에도 분명 풍경화를 대하는 자신만의 질서가 숨어 있다. 그 질서가 어떤 형태인지 지금은 정확히 알 수없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의 예술적 모험이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ARTIST PROFILE타이슨 리더TYSONREEDER1974년생으로 미국 시카고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다. 스튜디오가 아닌 야외에서 자연과 도시 풍경을 관찰하는 기법인 ‘앙플레네르’ 작업 방식을 사용한다. 덕분에 자유분방하고 기묘하면서도 아름다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의 풍경화 연작은 전통 회화의 명목을 유지하는 동시에 작가 자신의 고유한 표현 기법을 더했다는 평을 들으며 현재 미국 미술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 패션 브랜드셀린느와 협업한 남성복 아이템으로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
writer Shin Iyeon 독립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