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디귀한 어란
오래전부터 생선 알이 지닌 가치를 귀히 여긴 이유는 무엇일까. 어란의 기원부터 영양학적 정보까지 알아보자.
어란이란?
어란은 역사가 긴 음식이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수천 년 전부터 만들어왔다. 생선 알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알과는 다르다. 물고기는 체외수정을 하므로 암컷의 알은 난소, 수컷의 알은 정소다. 우리는 이런 생물학적 구분보다 음식과 요리 재료로서 알을 구분하는 데 더 익숙하다. 서구에서는 생선 암컷의 알을 하드 에그hard egg, 수컷의 알은 소프트 에그soft egg로 부르기도 한다. 수컷의 정소인 성게 알은 소프트 에그, 암컷의 난소인 명란이나 연어 알은 하드 에그라 할 수 있다.
어란의 기원을 찾아서
지중해 방식의 어란이 어느 나라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이탈리아어 보타르가는 그리스어에서 왔지만 기원전 10세기에 이미 이집트에서 어란을 만들어 먹었다는 주장이 있다. 소금에 절이고 말리는 식으로 어란을 만드는 방법은 페니키아 사람들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유대인이 어란의 원조라는 주장도 있다. 사실 누가 언제부터 어란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어란의 역사는 인류가 처음 생선을 먹은 때와 그리 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란을 이용한 자반은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기록을 찾기 힘들지만 중기에는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2011년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규곤시의방>, <증보산림경제>, <시의전서>에 숭어 알 말리는 법이나 어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1670년에 쓰인 <음식디미방>에는 연어 알로 어란 만드는 법이 소개됐다. “연어 알을 볕에 말려두고 쓸 때 물에 담가 간장국에 달여서 쓰라. 또 작은 단지에 넣어 장독에 묻어두었다가 쓰고, 소금을 많이 하여 담갔다가 쓰면 좋다.” 하지만 세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 어란을 만들어 먹은 것도 문서 기록보다 훨씬 오래되었을 것이다.
명인들의 노하우
전남 영암에서 시어머니의 뒤를 이어 70년 넘게 어란을 만든 김광자 명인의 회고에서도 문서보다는 구전이 앞서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명인의 시어머니 때부터 어란을 만들어온 걸로 치면 1백 년 넘게 어란을 만들어온 셈인데, 명인은 문서나 책이 아니라 시어머니에게 직접 설명을 듣고 시연을 통해 어란 만드는 법을 배웠다. 어란을 만드는 과정은 알이 적당히 밴 생선을 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미숙하거나 지나치게 성숙한 생선 알은 어란을 만들기에 적당치 않다. 음식에 대한 과학적 설명으로 유명한 작가 해럴드 맥기는 자신의 책 <음식과 요리>에서 “너무 미성숙한 알은 작고 단단하며 특별한 맛이 없고, 산란하기 직전의 알은 너무 물렁물렁하고 쉽게 으깨지며 금방 이취가 발달한다”고 설명한다. 남도에서 어란을 만들기 좋은 시기는 참숭어(가숭어)가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알집이 댕댕하게 부풀어 오르는 4~5월이다. 잡은 지 얼마 안 된 참숭어에서 싱싱한 알을 터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빼낸다. 알 두 편을 나누지 않고 그대로 한 쌍으로 하여 소금물에 담가 핏물과 불순물을 제거한다. 지리산에서 어란을 만드는 양재중 요리사에 따르면 피를 제거하지 않으면 비린내가 난다. 그는 핀셋으로 핏방울을 제거하는 방식의 섬세한 손질로 어란을 만든다. 일본식 어란(가라스미)은 생선 알을 소금으로만 절이지만 한국 어란은 간장에 담가 감칠맛을 높이고 색을 진하게 한 다음 햇볕에 말려 만든다. 어느 정도 마르면 앞뒤로 뒤집어가며 참기름을 바른다. 과거에는 참기름을 여러 번 발랐지만 요즘에는 냉장·진공 기술 덕분에 참기름 바르는 횟수가 많이 줄었다. 양재중 요리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참기름 대신 문배주를 사용해 어란을 닦아준다. 이렇게 건조하는 과정에서 다갈색으로 색깔이 진해지고 윤기가 흐르며 감칠맛과 향이 깊어진다.
알이 지닌 가치, 영양
어란을 먹으면 생선 수백만 마리를 먹는 것과 같다는 부모님의 말씀은 틀린 것이 아니다. 어란에는 생선 그 자체보다 영양이 더 농축되어 있다. 하나의 알세포가 성장해 물고기가 되는 것이니만큼 성장을 위한 영양소가 모두 들어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무게가 동일한 어육에 비해 어란의 지방, 단백질 함유량이 더 높고 세부 구성도 좋다. 어란 단백질 중 필수아미노산 함량이 높고 어란 지방의 대부분을 이루는 것은 오메가 3 지방산이다.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과 핵산도 많이 들어 있어 맛과 영양이 뛰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가 생선 알이 지닌 가치를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게 맞다.
냄비에 아귀와 무를 넣고 표고버섯 채수를 부어 청주, 맛술, 다진 마늘을 더해 끓인다. 아귀가 익고 무가 투명해지면 두부와 명란을 넣고 푹 끓인 다음 손질해둔 청경채와 쑥갓, 갈색팽이버섯, 흰목이버섯, 청·홍고추를 넣고 소금, 후춧가루로 간을 맞춘 뒤 어란 슬라이스를 듬뿍 올려 완성한다.
어란을 얇게 슬라이스해서 구운 은행과 번갈아 꼬치에 꽂아 석쇠에 한번 굽는다. 여기에 잣과 생크림, 구운 감자를 갈아 소금으로 간해 만든 부드러운 잣크림소스를 곁들인다. 한식 애피타이저 또는 술안주로 즐기기에 적당하다.
블렌더에 쌀과 물을 넣어 갈아준다. 또 다른 블렌더에는 잣과 물을 넣어 곱게 갈아준다. 냄비에 간 쌀을 먼저 넣고 끓이다가 간 잣을 넣고 저어가며 부드럽게 끓여 잣죽을 완성한다. 그릇에 담고 위에 어란을 가루 내어 올리고 잣을 고명으로 올린다.
TIP 잣죽은 오래 끓이면 삭아 물처럼 변할 수 있으므로 너무 오랜 시간 끓이지 않도록 주의한다.
생선 종류에 따른 조리법
생선 알은 그대로 두면 변질되기 쉽다. 인류가 오래전부터 생선 알을 염장해 어란을 만든 이유다. 세부 방식은 나라와 생선별로 다양하다. 한국에서는 숭어, 민어와 같은 생선 알을 소금, 간장에 절이고 참기름을 바르면서 햇볕에 말려 만든다. 그런 반면에 명란은 주로 소금에 절여 젓갈처럼 만든 명란젓으로 먹는다. 날치 알, 연어 알은 가볍게 소금물로 처리해 거의 날것으로 먹는다. 철갑상어 알에는 조심스럽게 적은 양의 소금을 뿌려 캐비아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알 속 단백질 분해 효소가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분해해 감칠맛을 증가시킨다. 소금은 물성에도 변화를 주어 입에서 톡톡 터지는 연어 알의 탱탱한 식감을 만들고, 알 속 액체를 찐득한 꿀처럼 흘러내리는 점도로 변화시킨다. 어란 속 단백질은 소금 때문에 서로 엉긴다. 숙성한 어란을 얇게 썰어 입에 넣고 씹으면 쩍쩍 달라붙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리스, 이탈리아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에서는 참치나 숭어의 알을 염장해 누르고 햇볕에 말려 보타르가를 만든다. 지중해 방식은 참기름 대신 밀랍으로 감싸 수분이 날아가는 것을 막는다는 면에서 한국의 어란과 다르다. 이러한 가공 처리 과정에서 알 속의 풍미 물질이 농축되고 서로 반응해 색깔과 풍미가 짙어진다. 생선 알로 만든 어란에도 달걀처럼 콜레스테롤이 많이 들어 있다. 하지만 음식으로 섭취하는 콜레스테롤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은 데다 값비싼 어란을 많이 먹기는 어려우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종에 따른 풍미와 식감
어종에 따라 어란의 풍미와 텍스처가 달라진다. 갯벌에서 잡
은 참숭어를 사용해 만든 어란에서는 갯 냄새가 난다. 지중해에서는 숭어나 참치 알로 보타르가를 만든다. 참치 알로 만든 보타르가는 짠맛과 말린 생선 냄새가 더 강하다. 그런 이유로 부드럽고 고소한 숭어 알 보타르가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참치 알 보타르가의 강렬한 맛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이나 대만의 어란은 소금 처리만 하여 반건조하므로 지중해식보다 촉촉하고 부드럽다. 소금과 간장으로 절인 한국 어란은 일본식 어란보다 맛과 색이 더 진하다. 역시 취향에 따라 진한 맛의 한국 어란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일본식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민어 또는 대구 알로 만든 어란은 숭어 알 어란보다 맛이 순하다. 노르웨이에서도 대서양 대구의 알로 보타르가를 만든다. 숭어 알 보타르가의 지방 함량이 20~30%로 높은 편인 데 반해 대구 알 보타르가는 지방 함량이 3% 정도로 매우 낮다. 밝은 오렌지색을 띠는 숭어 알 보타르가에 비해 대구 알 보타르가는 좀 더 진한 갈색이다. 어란 맛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대구 알 어란 또는 보타르가가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어종에 대한 제한이나 규칙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에 따라 황새치, 농어 알로 어란을 만들기도 한다.
어떤 생선 알로 만드느냐에 따라 어란의 색깔과 식감도 다르다. 생선 알에는 노란색 또는 주황색을 띠는 카로티노이드, 흑갈색의 멜라닌이 들어 있다. 날치 알, 새알고기 알처럼 가공 처리 과정에서 염색하는 경우도 있고 어란을 숙성하는 중에도 색깔이 더 진하게 변화하기도 한다. 보통 숭어 알로 만든 어란 또는 보타르가는 얇게 썰어 그대로 먹거나 다른 요리에 곁들이지만 참치 알 보타르가, 대구 알 보타르가는 연한 편이어서 얇게 썰기 힘들고 잘 부서진다. 살짝 얼린 뒤에 썰거나 마이크로플레인을 써서 갈아내는 것이 좋다. 보타르가를 가리켜 ‘가난한 사람의 캐비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란이나 보타르가도 상당히 고가임을 생각하면 이게 맞는 비유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란을 먹는 방법에서 캐비아와 어란에는 맥락이 닿는다. 값비싼 캐비아를 강한 불로 익혀 조리한다면 허비가 지나치다. 그대로 먹거나 요리 마지막 단계에 뿌려 아주 살짝 데우는 정도면 충분하다. 마찬가지로 어란을 요리에 쓸 때도 불을 끄고 잔열로 가볍게 가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모두가 어란을 아껴 쓰기만 하는 건 아니다. 그리스에서는 어란을 갈아서 올리브유, 레몬주스, 감자 또는 빵과 함께 섞어 만든 타라마살라타를 즐겨 먹는다(타라마는 염장해서 만든 어란을 뜻한다). 스웨덴에서는 훈제하거나 삶은 대구 알을 갈아 설탕, 소금, 토마토페이스트, 딜을 섞어 만든 스프레드(Smo¨rga°skaviar)가 인기 있다. 단순하지만 정제된 요리로 유명했던 미국 셰프 故 주디 로저스는 보타르가에 살짝 훈제한 가지 딥을 곁들여 내는 걸 좋아했다. 보타르가의 야성적 짠맛이 통통하며 흙내 나는 가지를 으깨 만든 딥과 완벽한 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주디 로저스가 남도의 어란을 맛보았다면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르겠다.
생선별 어란의 특징
숭어
주로 영암 지역에서 잡은 숭어 알을 염장해 만든다. 4~5월 참숭어가 영산강으로 올라오면 포획해서 알을 채취한다. 숭어는 비타민 A와 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해 시력 개선과 치매 예방에 좋다.
민어
7~8월경 살이 통통하게 오른 민어를 잡아 염장한다. 3~4개월 동안 소금에 절여 빳빳해지면 물속에 4시간 담갔다 꺼내 쓸어내리기를 반복한다. 어란 막에 물이 고이지 않도록 꼬리를 위로 두어 말린다.
연어
일본식 ‘이쿠라’로 유명한 연어 알. 다른 생선의 알에 비해 소금물로 간단히 간을 한다. 연어 알을 소금물에 넣어 돌리면서 간이 고루 배게 한다. 금방 건져내 건조시키며 수분기를 없앤다.
그리고 새로운 어란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어란도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최고기술경영자(CTO)를 지낸 요리 과학자 네이선 미어볼드는 공동 집필한 책 <모더니스트 퀴진 앳 홈>에서 성게 알로 어란을 만들라고 제안한다. 우리가 대구나 명태의 이리(정소)를 탕에 넣어 먹는 것처럼 유럽에서도 청어 수컷의 이리에 밀가루를 묻혀 팬프라이해 먹는다. 하지만 생선 수컷의 정소를 어란으로 만드는 경우는 드물다. 전통적으로 어란과 보타르가는 주로 암컷 생선의 알을 날것 그대로 염장한 뒤 말려서 만든다.
<모더니스트 퀴진 앳 홈>의 성게 알 보타르가는 재료와 만드는 방식이 전통적 어란 가공법과 다르다. 생선이 아닌 극피동물 성게 수컷의 정소를 써서 만들고 가열 처리한다. 성게 알을 진공 팩에 넣어 64°C에서 50분간 수비드 조리한 뒤 얼음물에 담가 20분 동안 식힌다. 그런 다음 성게 알 무게의 2.5배에 달하는 소금으로 감싸 12시간 동안 냉장하고 물로 헹구어 종이 타월로 가볍게 두드려 말린 뒤 면포로 싸서 2~3개월 동안 냉장 건조한다. 건조된 성게 알 보타르가에 밀랍을 씌우면 완성이다. 진한 노란색 결과물은 숭어 알, 참치 알 보타르가와는 다른 맛이지만 영락없는 어란의 모양이다. 먹는 방법도 여느 보타르가와 마찬가지로 파스타에 올려 낸다.
해럴드 맥기는 “물에서 얻는 모든 음식 가운데 가장 비싸고 사치스러운 것이 생선 알”이라고 단언했다. 얇게 썬 어란이 입속에 쫀득하게 달라붙는 동시에 올라오는 고소한 풍미와 꽉 찬 감칠맛을 느낄 때마다 맥기의 말이 1백 퍼센트 사실이라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된다.
영암 어란 제조 과정
숭어를 도마 위에 올려 배를 가른다. 이때 알주머니가 터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꺼내야 하며, 잡아온 직후 바로 피를 제거해야 알이 싱싱하다.
까만 씨간장을 어란에 붓고 재운다. 어란 장인의 경우 집안 대대로 2백50년 정도 이어받은 간장독이 비법이지만, 직접 빚은 청주와 간장을 섞어도 좋다.
아침저녁으로 어란을 말려가며 수시로 참기름을 바른다. 보통 2백여 번 기름칠을 한다. 이후 알갱이가 뭉치지 않게 고루고루 주무른다.
1일 15일 40일
어란 색은 15일 단위로 변하기 시작한다. 누런색에서 선홍빛으로, 40일경에는 검은색으로 변한다. 기름칠과 건조 과정을 반복한다.
어란을 얇게 포 뜬 뒤 붓으로 참기름을 앞뒤로 골고루 발라 팬에 굽는다. 다진 잣가루를 어란포 위에 솔솔 뿌린다. 보통 어란포는 우리 술 또는 위스키와 궁합이 잘 맞아서 술안주로 곁들이기 좋은 메뉴다.
취나물, 원추리나물, 돌나물, 어린싹 채소(적색무, 알파파, 브로콜리, 콜라비, 유채)를 밥 위에 돌려 담고 어란포를 채 썰어 듬뿍 올린다. 달래간장을 곁들여 비벼 먹는다.
TIP 달래간장은 달래, 청·홍고추, 양파, 간장, 고춧가루, 맛술, 참기름을 넣어 만든다.
취나물과 원추리나물은 데쳐서 다진 마늘, 다진 파, 소금과 참기름을 넣어 조물조물 무친다.
설기 위에 감태 페스토와 감자 크림을 바르고 데친 두릅, 감태, 필러로 얇게 슬라이스한 어란과 다진 호두를 올려
완성한다.
TIP 감태 페스토는 감자 크림에 감태 가루와 잣, 소금, 후춧가루를 넣고 갈아 만든다.
감자 크림은 매시드포테이토에 생크림, 마늘 가루, 파르메산 치즈 가루를 넣고 갈아 소금, 후춧가루로 간해 완성한다.
writerJeong Jaehoon 약사·푸드 칼럼니스트
editor Kim Minhyung
photographerSim Yunsuk
stylist Kim Jinyoung
illustrator Soo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