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의 시대
우리에게 가족은 사랑의 근거지이고, 친밀성의 원천이며, 소속감과 연대 의식을 제공하는 둥지다. 독일 작가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에 따르면 “가족은 가장 자연스럽고, 견고하며, 내적으로 연결된 혈육”으로, 인간 존엄과 공동체의 기초를 이루는 세포에 해당한다. 그 구성 원리는 피를 공유하는 혈연과 밥을 같이 나누는 식구다. 가족이란 말의 어원에는 이러한 특성이 선연히 반영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인은 가족을 오이키아oikia라고 했는데, 이 말은 ‘한 거주지에 모여 사는 사람들’을 뜻했다. 오이키아에는 피를 나눈 친인척뿐만 아니라 계약으로 맺어진 존재, 즉 노예나 가축 등도 포함되었다. 가족이란 성(sex)을 나누어 인간 재생산을 담당하는 혈연 공동체이자 살림살이를 함께하면서 사회를 뒷받침하는 경제 공동체였다.
누구도 부모 없이 태어날 수 없고, 인간 아기는 돌봄 없이 생존할 수 없으므로 가족은 가장 오래되고 널리 퍼져 있는 제도다. 그러나 오늘날 부부와 아이로 이루어진 이른바 ‘정상 가족’은 서서히 과거의 유물로 변해가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는 변화 속도가 급격하다. 2023년 국내 1인 가구 숫자는 7백50만 2천 가구로, 전체 2천1백77만 4천 가구의 34.5%를 차지했다. 2인 가구 비율은 28.8%, 3인 가구 비율은 19.2%, 4인 이상 가구 비율은 17.6%이므로, 1인 가구가 다른 모든 가구 형태를 압도하는 상황이다. ‘홀로’라는 삶의 형식, 그러니까 반려 없는 생활, 가족 없는 일상이 인생 표준이 된 셈이다.
이에 따라 혼밥, 혼술, 혼행(혼자 하는 여행), 혼영(혼자 보는 영화)등 타인과 함께하지 않고 단독으로 삶을 꾸려가는 라이프스타일이 유행하고, 협동과 조력에 바탕을 둔 사회적 삶보다 독립성과 주체성에 근거한 단독자의 삶이 더 나은 삶으로 여겨져 당연시되는 중이다. 안토니오 네그리 등 현대의 많은 철학자가 혈연에 얽매여 있는 억압적 가족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주체적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체를 새롭게 이룩하자고 주장한다. 바야흐로 대안 가족을 향해 가족 탈출이 대세를 이루는 시대다.
트렌드가 알려주는 관계의 이상향
<가족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에서 독일 사회학자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은 현대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가족해체의 원인을 “자기만의 독자적 삶에 대한 요구”에서 찾는다.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제 뜻대로 삶을 꾸려가고자 하는 욕구가 정상 가족이라는 낡은 형식과 충돌하면서 ‘홀로’라는 삶의 형식을 낳는다는 것이다.
특히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가족이 불편하다. 남성과 똑같이 사회생활을 하는 존재이자 가정을 보살피는 아내이자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라는 세 겹의 무거운 역할을 떠안기 때문이다. 러시아 작가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말처럼 “남성과 동등한 경력을 쌓고 가족을 부양하려 하지만, 자연적 본능을 거절하지 않는, 느끼고 사랑할 권리를 끊지 못하는” 여성들은 무섭고 끔찍한 고통에 사로잡힌다. 이들은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흔히 ‘비혼’을 택하곤 한다. 심각한 가부장제 사회인 한국에서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이유다. 성 평등이 실현되지 않은 모든 자유국가에서 가족은 더욱 빠르게 해체된다.
그러나 속 편하게 홀로 사는 삶이 자유만 가져다주는 건 아니다. 그것은 흔히 고립과 외로움을 낳는다. 벡 게른스하임은 가족 이후 시대에 독자적 삶에 대한 욕구와 아울러 “결합과 친밀함과 공동체에 대한 동경”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진화했으므로 내적 친밀성 없이는 좋은 삶을 살 수 없다. 연대하고 결합하고 삶을 나누는 일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준다. ‘함께’의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면 삶은 갈수록 나빠진다. 최근 비혼 공동체, 생활 동반자, 동거 커플 등 정상 가족의 억압에서 벗어나면서도 내적 친밀성을 지켜갈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끝없이 모색되는 이유다.
비밀이 없는 사이
문제는 혈연적 관계가 아닌 사이에서 새로운 친밀성을 구축하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이다. 독일 사회학자 니콜라스 루만에 따르면, 친밀한 관계란 소통에 어떤 비밀도 없는 사이를 뜻한다. 친밀한 이들은 서로 내접해 있다. 한 사람의 세계와 다른 사람의 세계가 겹치고, 서로가 그 겹침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어떤 사이가 진짜 친밀하다면 서로 대화할 때 숨김이나 거짓이 있을 수 없다. 이들은 어떤 내용이라도 서슴없이 말할 수 있고, 때에 따라 소통을 거부할 수도 없다. “날 좀 내버려둬”라고 말하거나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이들은 아직 친밀하다고 할 수 없다. 친밀한 사이는 서로 경청할 권리가 있고, 각자에 대해 모든 걸 이야기할 의무가 있다. 서로를 향해 완전히 투명해지는 것, 상대의 사소한 변화도 놓치지 않는 것이 친밀성의 증거다. ‘나의 가족’에서 김수영은 이러한 종류의 친밀성이 어떻게 탄생하는가를 보여준다.
가족, 낡아도 좋은 것
“고색이 창연한 우리 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
‘나의 가족’의 첫머리다. 이 시는 혹독한 포로수용소 생활에서 풀려난 시인이 서울에 돌아와 헤어진 가족들과 만나 함께 살았을 때 쓴 작품이다. 시인이 8남매의 맏이였던 걸 생각하면, 말 그대로 대가족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의 폐허에서 살림을 꾸리고, 큰 식구를 먹이는 게 만만치 않았을 테다. 가난은 자주 갈등과 다툼을 부르므로 말 못할 사연도 넘쳐 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시인은 고난을 함께 나누며 식구들 사이에서 생겨난 변화의 물결과 바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조금씩 묻혀서 들여온 공기에서 일어난 바람이고,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으로 가족 전체가 함께 분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물결이다. 고되고 쓰라린 생활의 힘으로 온 식구가 일으킨 것이기에 그 변화는 오랜 세월 동안 쌓여 이룩한 지층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을 품고 있다.
인간은 고통의 물결 속에서 각성하고 고난의 바람 속에서 지혜를 얻는다. 소시민적인 일상, 그 안의 비루한 안락에 경멸과 분노를 보냈던, 생계의 급박함보다 이념의 위대함에 기꺼이 헌신하고자 했던 시인에게는 가족이 힘을 합쳐 빚어낸 자잘한 행복감이 아주 낯설다. 그래서 시인은 그 물결과 바람이 고색창연한 집안에 새롭고 산뜻한 기운을 불어넣었다고 이야기한다.
하루의 노동을 마친 가족들은 때로는 안방에, 때로는 사랑방에 모여 유순한 얼굴로 “죄 없는 말”들,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말들을 도란도란 주고받는다. 오직 책 속에 담긴 추상과 관념에만 귀 기울였던 그는 더 이상 “조용하고 늠름한 불빛” 아래 식구들이 둘러앉아 하루의 일을 나누고 서로를 위안하는 수다가 귀에 거슬리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묻는다.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에 돌연 생겨난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것이냐.” 그 대답은 사랑이다.
시인의 가슴은 여전히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식구들과 어우러져 가난을 견디면서 시인은 점차 서책에 실린 “위대한 고대 조각의 사진”과 “나의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 을 똑같은 무게로 저울 달게 된다. 위대함은 성스러운 사상이나 눈부신 혁명에만 있지 않고, 험한 세상에서 가족이 오랜 세월에 걸쳐 함께 밥을 벌면서 이룩해가는 오순도순한 단란함, 즉 친밀성의 공동체에도 존재한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에게 되묻는다.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문제는 가족보다는 사랑의 유무다. 시련과 아픔을 자양분 삼고, 절제와 헌신과 인내가 밑바탕이 된 돌봄과 공생의 공동체는 낡았을지라도 여전히 좋다.
writerJang Eunsu 출판 편집인・문학평론가
editorJo Sohee
intern editorKang Ju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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