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더샵에서 만나는 K-패션
넥스트 K-패션의 인큐베이터, 분더샵이 선정한 국내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의 면면.
2021/11 • ISSUE 41
writerPark Sohyun 패션 칼럼니스트editorJo Sohee
‘대한민국’ 하면 떠오르는 단어에 2021년에는 BTS, 오징어 게임을 추가했다. 그다음은 뭘까? 먹고, 듣고, 보는 것들이 주를 이뤘으니 이제는 ‘입을거리’가 되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다. 프렌치 스타일, 브리티시 스타일 등 패션을 포함한 라이프스타일에 나라 이름이 붙는 것은 자국보다 타국에서 먼저 시작된다. 한 나라의 이름에 따라오는 수많은 이미지가 추려지고, 공통점이 스타일로 불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 그런 점에서 K-패션은 아직 ‘이거다’ 하는 스타일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는, 사람으로 따지면 다듬어지고 만들어가는 시기인 유아기에 있는 것 같다.
2000년대 초 한국 드라마가 세계로 진출하며 불어온 ‘K 열풍’은 음식과 언어에 이어 패션에도 영향을 미쳤다. 때마침 해외 유명 패션 하우스에서 스태프로 일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실력을 쌓아오던 한국 디자이너들이 런웨이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세계는 대한민국의 패션에 반응했다. 정욱준의 준지, 우영미의 솔리드 옴므 등을 거쳐 오늘날의 김해김, 유돈초이, 레지나 표, 록, 잉크 등이 단단한 뿌리 위에 싹을 피우고 있는 상황. K-패션이라는 이름 아래 묶여 있는 이들은 트렌드를 대중적으로 고급스럽게 풀어낼 줄 알며, 한국적 요소를 과하지 않게 녹여내고, 무엇보다 열정을 담아 옷을 짓는다.
패션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착용했을 때 느껴지는 전체적인 조화가 타인으로부터 ‘판단당하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K-패션이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기 위해 서양에 맞춰야 할 필요는 없다. 나날이 발전하는 소셜미디어 덕분에 전 세계 트렌드가 근소한 시간 차로 하나가 되어 흘러가는 이 시대엔 더더욱 그렇다.
가끔은 한국 디자이너들이 K-패션이라는 지붕 아래 독립 전사처럼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를 악물고 ‘나 홀로 앞으로 나아가다’가는 좋은 타이밍이 와도 남은 에너지가 없어 높이 뛰어오를 수 없는 게 요즘 현실이다. 좀 더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집단 문화 없이, 팬덤없이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이제는 우리가 기꺼이 지갑을 열어주는 응원을 해야 할 타임. 록의 로고플레이 니트에 유돈초이의 원피스를 오픈해서 아우터처럼 입고, 잉크의 아이코닉한 휴대폰 케이스를 장착한 휴대폰을 레지나 표 보자기 모티브 핸드백에 넣어 들어보면 어떨까? 이런 행위는 K-패션이 세계가 명명하는 수준 높은 스타일에 도달하는 시간을 단축해줄 세련된 소비가 될 것이다.
BONBOM
조본봄
2021 S/S 시즌에 갓 데뷔한 디자이너 조본봄이 전개하는 유니섹스 패션 브랜드 본봄. LCF(London College of Fashion)에서 맨즈 웨어를 전공한 그는 실험적 디자인을 바탕으로 과장된 실루엣과 쿠튀르적 요소를 한껏 가미한다. 탐구하고자 하는 형태를 만들고 테마를 입히며 컬렉션을 구상하는데, 이는 그가 런던에서 배운 1960~1970년대 패션 하우스가 의상을 제작할 때 쓰던 방법을 재현한 것이다. 브랜드를 한 단어로 정의하고 싶지는 않다고 밝힌 그는 드레스 입은 남성을 런웨이에 올리며 성별의 경계를 허물기도 하고, 공식 사이트 대신 디자이너 본인의 개인 계정에서 소통한다. 이번 윈터 컬렉션은 다양한 간격의 플리츠를 구조적이면서도 관능적으로 조합해 완성했다. 뫼비우스의 띠같이 칼라에서 시작해 몸을 휘감고 다시 칼라로 돌아가는 아우터처럼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브랜드의 정체성을 구축해 가고 있다.
EENK
이혜미
쟈뎅 드 슈에뜨, 시스템 옴므, 먼데이 에디션 등 다양한 분야의 브랜드에서 디자이너로 활약한 이혜미가 2013년 론칭한 여성복 브랜드 잉크EENK. ‘레터 프로젝트’라는 타이틀 아래, 알파벳 이니셜에서 영감을 얻어 시즌 컬렉션 및 다양한 프로젝트를 전개하고 있다. 패턴은 물론 단추와 원단까지 직접 개발해 완성도 높은 패션 아이템을 선보이는데, 아이폰 케이스나 향초 같은 라이프스타일 제품까지 제작해 눈길을 끈다. 2022 S/S 뉴욕 패션위크 공식 프로그램인 ‘콘셉트 코리아’에 한국 브랜드 3개 중 하나로 초청되기도 했다. 2021 F/W 시즌에는 ‘T forTemptation’을 주제로 빅토리안 시대의 복식을 재해석했다. 부드러운 실크와 레이스, 구조적인 실루엣을 구현해주는 가죽과 벨벳 소재를 자유자재로 매치해 소재의 대비에 집중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ROKH
황록
2017년 한국인 최초로 LVMH 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특별상까지 거머쥔 패션 디자이너 황록. 그는 세계 3대 패션 스쿨 중에서도 혹독한 교육과정으로 유명한 영국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한 뒤 끌로에와 루이비통, 셀린느 같은 저명한 패션 하우스를 거치며 경력을 쌓고 2016년, 자신의 브랜드 록ROKH을 론칭했다. ROKH은 2000년대 초반의 음악과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유스 컬처를 기반으로 전개하는 여성 브랜드. 트렌치코트, 더플코트 같은 클래식한 아이템을 변형하고 뒤트는 해체주의적 기법의 다채로운 아이템을 선보인다. 2021 F/W 컬렉션에서는 친숙한 형태를 낯설게 만드는 창의적 커팅 디테일이 특징인 데님 스커트, 태슬을 달아 걸을 때마다 형태가 부서지는 펜슬 스커트 등 다양한 의상을 ROKH의 관점에서 풀어냈다.
EUDON CHOI
최유돈
유돈초이는 런던 패션위크에서 과감하고 다채로운 컬러와 대담한 디자인으로 주목받는 여성 패션 브랜드다. 유돈초이를 이끄는 디자이너 최유돈은 2009년 브랜드를 론칭한 뒤, 2011년 세계적인 WGSN 글로벌 패션 어워드에서 ‘이머징 탤런트 프라이즈’를 수상해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같은 해 ‘보그 탤런트’에 2012 S/S 컬렉션을 출품하며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에게 호평을 얻기도 했다. 남성복 디자이너로 시작해 영국 유학 시절에 여성복 디자이너로 전환한 그는 맨즈 웨어에서 볼 수 있는 디테일을 자연스럽게 여성복에 녹여낸다.이번 시즌 그의 컬렉션은 스위스 게슈타드에서의 호화로운 스키 휴가에서 영감을 받았다. 가볍고 따뜻한 울, 부드러운 촉감의 캐시미어 소재를 주로 사용했으며, 뒷부분을 절개한 컷아웃 백 니트 등 대범한 디자인에 실용성을 더했다.
REJINA PYO
표지영
표지영은 셀린느, 록산다 등의 패션 하우스에서 디자이너로 풍부한 경험을 쌓은 뒤, 2014년 자신의 세례명을 딴 여성 패션 브랜드 레지나 표를 론칭했다. 2015년 LVMH 선정 ‘톱 50 디자이너’에 뽑혔고, 2019년에는 영국 패션협회가 주관한 ‘런던 패션 어워즈’에서 여성복 신인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았다. 항상 자신이 만든 옷을 직접 입고 다니며 실제 여성들의 라이프스타일에 적합한 옷인지를 늘 고심한다. 뻔하지 않은 색과 질감의 조합, 강렬함을 잃지 않는 아름다운 실루엣, 유니크한 프린트 등을 통해 브랜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다. 레지나 표의 2021 F/W 컬렉션 콘셉트는 건물 지하에서 불법 파티를 여는 사람들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빌리 몽크가 1960년대 술집에서 촬영한 사진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크랙 레더 재킷과 독특한 패턴 스커트를 매치해 레트로한 매력을 극대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