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 침대에서 천천히 내려와 물기가 말라 있는 여탕의 돌바닥 위를 거닐었다. 발바닥의 감촉은 건조하고 거칠었지만, 대중탕 특유의 축축한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 일렁이는 청록색 물 위에 비친 내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여성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현실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에서조차 남성 이야기의 곁가지처럼 여겨졌다. 남자 주인공 옆에 여자라는 공식 아닌 공식은 긴 시간 소설의 문법이었다. 박완서 선생 등이 여성 서사를 소설의 중심으로 삼았지만, 대개 여성은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데 필요한 하나의 소재였다. 일상에서 여성이 어떻게 삶의 주인이 되는지 보여주는 작품들을 읽다 보면, 그것이 곧 우리 모두의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이완의 자세>는 2020년 신동엽문학상을 수항한 김유담의 작품으로, 경기도 외곽의 ‘24시 만수 불가마 사우나’를 무대로 온전히 자신으로 살고자 애쓰는 모녀의 삶을 그렸다. 엄마 오혜자는 때밀이다. 한때 명동 중심가 백화점 화장품 매장에 근무하는, 나름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인생은 아빠를 만나면서 꼬였다. 본사 영업 사원인 줄 알았던 남편은 화장품 매장을 돌며 재고를 조사하고 주문서를 받는, 번듯한 영업 사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남편이 딸이 걸음마를 시작하기도 전에 유명을 달리했다. 산업재해로 인한 순직을 인정받기까지 무려 2년의 시간이 걸렸다. 엄마는 그제야 남편의 회사, 즉 “본사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되었다.
지리멸렬한 싸움 끝에 받아낸 보상금으로 엄마는 아파트 단지 앞에 ‘오혜린 뷰티 케어’라는 간판을 걸고 피부 관리실을 시작했다. 촌스러워도 세련된 미모와 절로 눈길이 가는 몸매, 거기에 장사 수완도 좋았다. 스포츠카를 몰 정도로 돈을 모았다. 하지만 엄마의 삶은 탄탄대로가 아니었다. ‘사파이어 아저씨’라 불리는 다단계 장사꾼에게 엄마는 마음을 빼앗겼다. “새로운 마케팅, 새로운 삶이라고 읊조릴 때마다 엄마의 눈에서는 전에 없던 의욕이 샘솟는 것”처럼 보였다. 끝내 모든 돈을 날리고 빚까지 졌다. 한동안 엄마의 눈은 초점을 잃었지만, 거기서 무너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새로 정착한 곳은 경기도 외곽의 선녀탕. 모녀는 탈의실 옷장에 짐을 부리고 거기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남은 것이라곤 빚과 어린 딸뿐이던 엄마는 모질게 때를 밀었다. 유라는 엄마의 때밀이 실습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모녀의 애증은 그렇게 골이 깊어만 갔다. 그래도 엄마는 딸만큼은 번듯하게 키우고 싶었다. 그때 목욕탕 단골 ‘윤금희 고전무용학원’ 원장 윤금희가 “딸내미가 재주가 쫌 있어 보이던데, 엄마를 닮아가 몸꼴도 좋고, 한번 시키보는 기 어떨랑교”라며 솔깃한 제안을 한다. 그날로 유라는 학원에 등록한다.
<이완의 자세>는 목욕탕, 아니 ‘여탕’이라는 공간에서 여성들의 이야기를 펼쳐냄으로써 여성 서사가 이토록 찬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메이저리거가 되고 싶었으나 부상으로 백수가 된 목욕탕집 아들 만수가 모녀 이야기에 양념처럼 등장하며, 주인공 유라와 함께 젊은이들의 성장사를 나름 유쾌하게 보여준다. 여성의 서사라고 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 로, 삶은 여성과 남성을 가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