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계의 장르 파괴? 패션계에 불어온
‘우리 몸을 향한 긍정적 시선’에 대한 이야기.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 소비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계급주의, 인종주의를 기반으로 ‘미인’의 기준점이 만들어졌다.
마른 몸, 하얀 피부의 여성이 사회적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미디어는 획일화된 이상형을 더욱 강화했다.
이는 곧 성공한 사람의 모델이 되었고 모든 현대인의 ‘자기 검열’과 더 나아가 ‘자기 관리’의 기준이 되었다.
지젤 번천, 미란다 커, 켄달 제너까지…. 당대의 슈퍼모델이 아찔한 속옷 차림으로 런웨이를 워킹하는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는 사회적으로 만들어낸 이상형과 자본이 뒤엉켜 형성된 일그러진 판타지의 끝판왕이었다.
타고난 몸매의 모델조차 고통스러운 다이어트를 통해 만들어낸 판타지는 전 세계 1천만 명의 인구가 함께 지켜보는 ‘패션계의 슈퍼볼’로 불렸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새롭게 등장한 MZ 세대는 “나는 엔젤이 아니다”라며, 장식품 같은 화려한 속옷을 사느니 차라리 신형 아이폰이나 운동복을 사겠다고 했다.
실제로 빅토리아 시크릿의 미국 시장점유율은 2013년 31.7%에서 2018년 24%로 급감했다.
결국 빅토리아 시크릿은 2018년 엔젤쇼를 폐지하는 대신 빅토리아 시크릿을 대표할 7명의 홍보대사를 꼽는 ‘빅시 컬렉티브(The VS Collective)’ 제도를 도입했다.
빅시 컬렉티브는 미국 여자 축구 대표 팀 선수인 메건 러피노Megan Rapinoe, 수단 난민 출신의 모델 아두트 아케치Adut Akech 등 문화, 인종, 직업이 다양한 이들을 선발했다.
이른바 ‘보디 포지티브(body positive, 자기 몸 긍정주의)’의 열기가 뜨겁다.
이는 사회가 부여한 이상적인 미의 기준에서 벗어나 자기 비하와 증오를 멈추고 “나를 보이는 그대로 사랑하자”는 사회적 움직임이다. 즉, 몸이 완벽해야 아름답다고 보는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자신의 몸매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움직임이다.
이는 단순히 뚱뚱한 신체 사이즈에서 더 나아가 인종, 장애, 젠더 등 세상의 모든 규정과 차별에 도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디 포지티브의 시작은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엔지니어 빌 파브레이Bill Fabrey는 세상이 자신의 뚱뚱한 아내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분노하며 미국 뉴욕에서 비만인 권익 단체 NAAFA(The National Association to Advance Fat Acceptance)를 조직했다. 비슷한 시기 캘리포니아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을 주축으로 ‘더 팻 언더그라운드The Fat Underground’를 결성했다.
이들 단체는 다이어트 산업을 ‘적’으로 규정하고 비만인이 평등하게 대우받을 권리를 주장했다. 하지만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았고 ‘틀’에 맞지 않는 이들의 좌절은 계속 이어졌다.
팔로마 엘세서Paloma Elsesser도 태어날 때부터 통통한 몸 때문에 수없이 눈물을 흘린 이들 중 하나다.
그녀는 청바지를 사기 위해 성인용부터 남성용 코너까지 쇼핑몰 전체를 뒤졌지만 실패한 열두 살 때 경험을 들려주었다.
자신의 몸에 맞는 청바지를 도통 찾을 수 없었던 소녀는 탈의실에서 눈물을 흘리며 세상에서 완전히 소외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반전은 시작됐다! 뒷날 이 소녀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되어 2020년 모델스닷컴 랭킹 1위를 찍고, 미국 <보그> 매거진의 2021년 1월호 표지를 장식한다. 팔로마 엘세서는 규격에 맞지 않는 자신의 몸 때문에 좌절하고 이를 극복하기까지의 경험을 진솔하게 털어놓으며 패션계에 만연한 제로 사이즈를 탈피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최근에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보디 포지티브를 세상에 알리는 이들도 많다. 플러스 사이즈의 흑인 모델 니콜라스-윌리엄스Nyome Nicholas-Williams는 자신이 모델로 등장한 사진이 인스타그램의 가이드라인을 준수했음에도 거듭 제재를 받자 ‘왜 몸집이 큰 흑인 여성은 검열을 받아야 하는가? 나는 모든 체형을정상으로 인지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다’라는 게시물을 올렸다.
이는 #IWantToSeeNyome 캠페인을 촉발했고, 인스타그램의 정책을 바꾸어놓는 계기가 되었다. 보디 포지티브를 뜻하는 #BOPO 해시태그는 2022년 현재 인스타그램에서 1백33만 개까지 생성되었다.
보디 포지티브에서 사이즈 큐레이션은 특히 중요한 화두다
패션 산업은 다양한 신체의 아름다움에 주목하고 있다
다운증후군 모델의 활동도 활발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매들린 스튜어트Madeline Stuart는 최초의 다운증후군 프로 모델이다. 2014년 패션쇼에 갔다가 모델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집에서 한껏 꾸민 자신의 모습을 촬영해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18세에 뉴욕 패션 위크에 올랐고, 이후 1백여 회가 넘는 패션쇼에서 종횡무진하고 있다.
구찌 뷰티의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많은 ‘좋아요’를 받았던 포스팅의 모델 역시 다운증후군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은 엘리 골드스타인Ellie Goldstein. 그녀는 구찌 뷰티 외에도 마이테레사, 잘란도, 빅토리아 시크릿과 협업한 경험이 있다.
패션과 미디어의 다양성을 옹호한다는 목적 아래 장애인을 포함해 트랜스 및 논바이너리(non-binary,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으로 뚜렷이 구분하는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 모델 등을 전문으로 하는 에이전시도 등장했다. 2017년 영국에서 론칭한 ‘제베디 매니지먼트Zebedee Management’가 대표적으로, 엘리 골드스타인 역시 제베디 매니지먼트 소속이다.
이곳은 현재 영국, 미국과 남아프리카 등에서 약 5백 명의 모델과 계약했다. 제베디 매니지먼트의 꿈은 ‘사람들이 어디서나 장애인을 보고 더 이상 장애인 모델 전문 에이전시가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영국에는 2014년 설립한 ‘안티에이전시Anti-Agency’와 2016년 설립한 ‘브라더Brother’가 있다. 미국에서는 ‘슬레이 모델 매니지먼트Slay Model Management’가 트랜스젠더 모델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보디 포지티브 운동에도 건전한 비판은 필요하다
writerMyung Sujin 패션 칼럼니스트editorJeong Pyeonghw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