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투리두)가 제대를 하고 돌아와보니 여자(롤라)가 고무신을 바꿔 신었다. 실연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남자에게 이내 다른 여자(산투차)가 생겨 새로운 사랑이 시작된다. 일이 이렇게끝나면 인간 세상은 평화롭겠지만 소설이나 오페라가 만들어지기는 어렵다. 롤라는 투리두가 산투차와 잘 지내는 꼴을 못 본다. 버린 떡도 다른 사람이 먹는 것은 아까운 법. 롤라는 투리두를 유혹해 두 사람은 다시 불타오른다. 산투차는 자신이 일시적 대용품이었음을 알고 분노한다. 그녀는 투리두의 어머니를 찾아가 하소연해보지만 별 소용이 없다. 투리두를 붙잡고 눈물로 애원해도 미안해하기는커녕 귀찮아한다. 이쯤 되면 아무리 선량한 여자라도 참기 힘들다. 산투차는 롤라의 신랑 알피오에게 그들의 탈선을 일러바친다. 알피오는 짐 마차꾼이어서 집을 자주 비웠다. ‘믿었던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다니.’ 이렇게 해서 비극은 피 흘릴 준비를 마친다. 마스카니의 단막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전반부 줄거리다.
투리두는 알피오의 귀를 물어뜯는다. 결투 신청이다. 알피오는 잘못한 것이 없다. 예쁜 색시를 얻어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을 뿐이다. 그런데 별안간 아내의 옛 애인이 사생결단을 내자고 덤빈다. 어쨌든 시칠리아 남자라면 결투를 피할 수는 없다. 과수원 뒤에서 만나기로 하고 두 남자는 헤어진다. 하지만 누가 죽을 것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극 초반에 투리두가 롤라의 문지방을 넘으며 부르는 노래가 암시한다. “그대의 문에서 피 냄새가 나네/ 하지만 이곳에서 죽는다 해도 상관없어/ 내가 죽어 천국에 간다 해도/ 당신이 없으면 돌아오리라.” 한번 떠났던 여자는 남자를 맹목적으로 만들었다. 투리두는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결투장으로 가서 칼에 찔려 죽는다.
이 오페라는 나쁜 여자, 어리석은 남자, 버림받은 여자, 억울한 남자가 펼치는 멜로드라마다. 제목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시골 기사)’에는 조롱의 뜻도 담겨 있다. ‘촌놈들이 무슨 기사 흉내를 내서 결투를 한다고…’ 하는 뉘앙스다. 이 정도 사건은 내가 사는 아파트 옆집에서도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베리스모(사실주의) 오페라’라고도 불린다. 오페라 거장 베르디는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은 사진이지 예술이 아니다”라고 평했다. 개인적으로 나도 이런 건 썩 좋아하지 않는다. 오페라극장까지 가서 막장 드라마 수준의 치정극을 봐야만 하겠는가. 한데 이 작품은 인기가 좋다. 왜 그럴까. 사람들이 네남녀의 배역에 자신을 대입해보고 ‘나라면 어떨까’ 생각해보는 것은 아닐까.
스토리야 어떻든 ‘시골 기사’의 음악은 아름답다. 전주곡부터 아름다운 선율이 줄줄이 이어진다. 마을 사람들의 합창 ‘오렌지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는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리움, 봄, 사랑의 음악이다. 오렌지꽃 향기가 내 얼굴을 스친 적이 있다. 에스파냐 코르도바의 해 질 무렵, 메스키타(이슬람 사원) 뜰을 거닐 때 하얀 오렌지꽃이 바람에 날렸다. 지금도 합창을 들으면 그날 저녁으로 시간 여행을 한다. 최고의 음악은 ‘간주곡’이다. 뜨겁게 달아오른 무대를 식히듯 고요히 흐른다. 산투차가 알피오에게 두 사람의 부정을 속삭여 비극적 결말로 치달을 준비를 마쳤을 때, 체념과 달관의 선율이 오래도록 연주된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인간의 운명이고 누구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오페라 원작 못지않게 이 음악을 멋지게 사용한 영화가 있다. <대부> 3편 마지막 장면이다. 마피아 두목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 분)는 고향 시칠리아의 오페라극장에서 딸을 잃고, 또 많은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되었다. 퇴락한 저택 뜰에서 해바라기를 하던 그는 마지막 마른 잎이 떨어지듯 픽 쓰러져 죽는다. 이 장면에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이 흐른다. 삶은 덧없고 모든 것은 부질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