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의 여지가 없는 몇 안 되는 역사 법칙 중 하나는 공해가 언제나 가장 가난한 사람, 가장 가난한 동네, 노동자가 많은 도시, 남반구 국가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공해의 역사 전체에 걸쳐 철저하게 따져봐야 하는 점이 바로 지배와 배제, 위계와 불평등의 논리다.”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말을 주변에서 종종 듣는다. 두꺼운 외투를 벗고 화사한 봄의 여운을 만끽하기도 전에 이내 여름이다. 한겨울 삼한사온三寒四溫이 사라진 지 오래, 한반도의 사계四季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 비단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달라진 이상기후에 신음하고 있다. 과도한 개발, 그것을 부추긴 인간의 욕망, 그 욕망을 먹고 자란 자본은 지구를 병들게 한 원인이지만 여전히 기후변화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은 미미하다. 기후 위기, 이제 강 건너 불구경할 때가 아님을 지금 소개하는 책을 통해 만나보자.
3백 년, 지구 오염의 역사를 밝히다, 〈지구 오염의 역사〉
프랑스 부르고뉴 대학교에서 현대사를 가르치는 프랑수아 자리주 교수와 프랑스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연구소장 토마 르 루가 함께 쓴 <지구 오염의 역사>는 18세기부터 20세기 말에 이르는, 약 3백 년의 시간에 걸쳐 일어난 산업 오염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산업 오염의 시초는 당연히 산업혁명. 물론 그 이전부터 인간은 지구를 오염시켰다. 하지만 18세기부터 힘을 얻기 시작한 산업자본주의는 환경오염의 성격과 규모 그리고 범위를 전례 없는 수준으로 바꿔놓았다.
우선 각종 채굴 공정에서 발생하는 유독성 강한 중금속을 함유한 잔류 폐기물이 전 유럽으로 빠르게 퍼졌다. 산업화에 따라 도시는 비대해졌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곧바로 오염으로 이어졌다. 신선한 육류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 도축장이 우후죽순 늘었고, 도살된 가축의 기타 부위를 활용한 양초나 연료용 기름을 제조하는 업체들이 난립하면서 악취와 폐기물이 도시 전체를 감쌌다. 가죽·염색·섬유 공장들은 깨끗한 물을 끌어다 쓰고는 극도로 오염된 물을 도시 하천으로 몰래 흘려보냈다.
문제는 19세기 들어 ‘공해’라는 단어 자체가 근대화의 구성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석탄은 진보의 가장 어두운 민낯이었음에도 그것을 연료로 배출하는 공장 굴뚝의 연기는 노동자 가족의 행복을 연상시키는 당대의 상징과도 같았다. 스모그에 이어 수질오염도 부쩍 늘며 소시민의 삶을 위협했는데도 말이다. 20세기, 그중 1914년에서 1973년 사이의 환경오염에 대한 인식은 두 차례 세계대전과 냉전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사건으로 가려졌다. 그 사이 화석연료 에너지 체제는 공고해졌고, 그중 석유가 왕좌를 차지하면서 지구상의 공해는 악화일로惡化一路였다. 흔히 선진국이라 일컫는 북반구의 몇 나라에 사는 인구의 15%가 광물 및 화석 자원을 절반 정도 소비했다. 그들의 소비를 위해 여타의 사람들이 각종 폐기물을 감당해야 하는 사회·경제·환경적 불평등도 덩달아 심화됐다.
21세기 들어 우리는 ‘더 많이’, ‘더 빨리’를향해 달리고 있다. 결과는 뻔하다. 지구를 더럽힌 주체는 인간이며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도 인간이다. 저자들은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현대 환경문제에 직면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배열의 출현” 을 기대하며 책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