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승과 수완가 사이, 우고 론디노네
물리적인 혹은 형이상학적인 조각과 인간 너머의 세상.
Installation view: Ugo Rondinone, burn shine fl y, Scuola Grande San Giovanni Evangelista, Venice, 2022
세상과 자연을 조망하는 방식
스위스 태생의 우고 론디노네Ugo Rondinone는 맨해튼에서 2시간 남짓 떨어진, 롱아일랜드 끝자락에 자리 잡은 해안 도시 매티턱Mattituck에 거주하는 현대미술가다. 수많은 갤러리와 미술계 종사자 그리고 잠재적 고객들이 밀집해 있는 맨해튼에 근접 하면서도, 풍광이 아름답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매티턱에 거주한다는 사실은 그의 작업 세계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단서를 제공한다. 우선 해, 구름, 나무, 돌같이 문명의 발달에도 고유한 모습을 유지하는 듯한 자연이 작업의 지속적 소재가 되어왔다는 점을 떠올려볼 수 있다. 잠시 매티턱을 생각해보자. 이 도시의 위치를 살펴보면 직업적 편의성과 개인적 선호를 적절히 타협한 우고 론디노네의 영민한 선택이 엿보인다. 사실 실리성에 대한 고려는 그의 작업 과정에서 일련의 선택을 할 때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가까운 예는 최근작 ‘넌스 앤 몽크스nuns+monks’와 ‘스몰 블랙 그린 실버 마운틴 하이Small Black Green Silver Mountain High’. 두 작품에 사용한 매체는 실제 돌이 아니라 그가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돌의 미니어처 모형을 확대시킨 뒤 3D 작업을 거쳐 본을 떠낸 청동이다. 그는 이러한 작업 과정에 대해 “순전히 실용적인 면을 고려한 결정”이라고 답한 바 있다. 이와 유사하게 그는 작업을 의뢰한 단체, 후원 자본의 출처, 그들의 지향점 그리고 작품이 놓일 위치의 특성을 적절히 버무려 작가로서 보유한 가능성과 장점을 작품으로 구체화한다. 이러한 론디노네의 전략적 명민함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실행력만큼이나 그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인간과 자연의 인공성과 가변성을 말하다
누군가는 론디노네를 그저 자연의 변하지 않는 모습을 사랑하는 현대미술가로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론디노네의 작업을 꼼꼼히 살펴보면 그가 자연을 모방의 대상, 즉 이상 세계(칸트의 이데아)로 보거나, 문명의 지배 이전의 순수한 상태로 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관심은 서구 근대 철학의 기반이 되는, 문명의 반대항으로서 이분법적으로 고정된 자연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 문명의 발달과 쇠퇴의 곡선과 상호적으로 관계하며 역사적으로 꾸준히 재정립된 인간과 자연의 인공성과 가변성에 있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남성과 여성,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정, 과거와 현재, 인식론과 존재론, 상징성과 물질성 등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활용한 무수한 이분법적 관계 중 하나로 고려해야 한다. 론디노네의 작업 형식은 이러한 관계의 인공성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그가 연출한 무대 안에서 이를 일시적으로 무너뜨리거나 재조립하는 과정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동조 또는 개입
30여 년 전부터 전시 공간을 적극 활용하는 작업과 야외 설치 작업을 주로 선보인 그는 2000년대 이후부터 하늘의 구름과 바람 등 만질 수 없는 것들을 공감각적으로 재현하거나 마치 건축의 일부처럼 빌딩 위에 무지개를 띄우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후 ‘퍼블릭 아트 펀드Public Art Fund’ 같은 비영리 단체의 후원을 받은 공공미술 프로젝트와 IBM 같은 사설 기업이 의뢰한 설치 작업 등을 통해 공적인 장소와 사유지를 오가며 조경 미술과 순수 미술의 경계를, 자본 시스템에 대한 동조와 공공의 선이라는 가치 사이를 짚으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 중에서도 흔히 론디노네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돌 쌓는 작가’라는 수식어와 지금의 명성을 얻는 데 탄탄히 일조한 작업은 퍼블릭 아트 펀드의 후원으로 제작한 ‘휴먼 네이처Human Nature’다. 뉴욕 록펠러 광장에 우뚝 세워진 2.7m의 청석 조각 작품 9개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생경한 풍경을 선사하며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거대한 돌덩이들은 원시시대 이누이트족이 소통의 도구로 사용한 북미의 이눅슈크Inukshuk와 이눈구아크Inunnguaq를 참고해 만든 것이다. 즉, 작가는 식물 모티브로 장식한 아르데코Art Deco 마천루 사이에 인간의 모습을 모방한 원시적 랜드마크를 삽입함으로써 과거와 현재가 중첩된 이미지를 만들었고, 이를 통해 ‘인간의 본성’이라는 제목처럼 도구의 사용과 재현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욕구를 이야기하는 셈이다.
우고 론디노네를 향한 한 가지 질문
그린란드어 이눅슈크는 ‘인간의 능력 안에서 발현되는 그 어떤 것’을 뜻한다. 이와 함께 맨해튼에 굵직하게 응집한 돌 더미 들이 단순히 이동 경로의 표식뿐 아니라 낚시터·주거지·식량저장고의 표시, 사냥을 하기 위한 울타리, 종족 번영을 기원하기 위한 조상 숭배, 영적 활동 등을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어쩌면 작가가 도심 한가운데 연출한 기이한 풍광이 일깨우는 것은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일지 모른다. 정보, 물질적 자원과 부의 축적에 대한 욕구는 근대 자본주의에 의해 형성된 특정 형태의 욕망이 아니라 모든 활동의 기본이 되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 그도 그럴 것이 론디노네의 이눅슈크가 점유한 장소는 현대의 물질성을 상징하는 부동산 개발부터 금융권, 문화 자본까지 투자 영역을 확대하면서 건설한 자본주의 제국 록펠러 그룹의 사유지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허물어진 이 순간,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과연 자본주의의 탐욕은 공공의 선과 이분법적으로 대립되는, 눈살을 찌푸릴 만한 악인가? 이렇게 론디노네가 도시개발 프로젝트, 건축물, 조경, 관광산업 등 자본주의의 확장에 ‘동조’하는 듯한 모습은 네바다 사막의 ‘세븐 매직 마운틴Seven Magic Mountains’, 마이애미의 바스 미술관 야외에 설치된 ‘마이애미 마운틴Miami Mountain’, 자신이 존경하는 시인 존 지오르노John Giorno에 대한 오마주이자 협업 전시로 선보인 ‘I ♥ John Giorno’처럼 대규모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 강조된다.
작가도 자본주의 역사의 일원일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론디노네가 자신의 동조적 자세 사이사이에 비판적 자세를 교묘하게 숨겨놓은 것을 발견했을 때다. 그가 뉴욕, 파리, 취리히 등 대도시 곳곳에 심어놓은 올리브 나무들은 형태는 비슷하지만 각각 다른 제목이다. 특히 그가 2007년 뉴욕의 리츠칼튼 플라자에 설치한 두 그루의 나무 중 한 점의 제목이 ‘에어 게츠 인투 에브리싱 이븐 낫싱Air Gets IntoEverything Even Nothing’인 것을 확인했을 때 뇌리를 스친 것은 미국의 철학자 마셜 버먼Marshall Berman의 책 <현대성의 경험>이었다. 이 책은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탐구와 비판의 맥을 잇는다. 어디든 침투하는 자본의 유연성과 그 유연성으로 재조직된, 완전히 새로운 근대 자본주의 체제와 그것의 (허위) 유토피아니즘에 대한 비판을 다룬다.
과연 론디노네는 작품을 통해 비판적 자세를 넌지시 암시하며 관객이 알아채기를 바라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자신의 작업을 ‘기생충’이라 칭하는 작가는 스스로가 자본주의 체제 역사의 일원임을 공공연히 또는 암묵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는 결코 어떠한 체제에 저항하는 영원한 비제도권 투쟁가 페르소나를 섣불리 연기하지 않는다.
인간 너머의 세상
이처럼 론디노네의 작품은 그것을 둘러싼 특정 관념이나 이데올로기를 재현하기 위한 수동적 이미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외부 세계의 지속적 변형에 적극 가담하는 ‘행위자’와 다를 바 없다. 예를 들어 ‘nuns+monks’의 경우, 전시 공간에 놓인 가짜 돌들이 단순한 형태, 강렬하고 인공적인 색상, 압도적 크기 등 물질적 현존을 뽐내는 동안 관객은 두 단어 수녀(nuns)와 수도사(monks)가 조합된 제목을 살펴보며 영적 세계를 추구하는 종교적 수행자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뒤이어 눈앞의 (가짜) 돌 덩어리들의 요철이 빛을 반사하는 것을 수행자들의 펄럭이는 실크 옷자락으로 연결시키고, 더 나아가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상상할지 모른다. 결국 작가가 치밀하게 계획한 광경의 연출은 관객이 작업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다층적으로 동원하는 요소들과 함께 완성되는 것이다. 곧 관객은 인간이 ‘온전히 인지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세계란 사실 인간 너머 세상과의 상호작용에 의한 일시적 판단이었음을 깨닫는다.
한때 작가는 “돌에 내재된 아름다움과 기운, 그것이 무언가를 구축할 수 있는 힘, 표면의 질감 그리고 돌이 시간을 수집하고 응축할 수 있는 능력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에게 돌(자연)은 단순히 예술가(인간, 창조자)인 그의 힘을 일방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우고 론디노네는 우리가 세상의 관습, 규칙, 위계질서의 틈새에서 능동적으로 길을 찾아나가는, 따라서 그 과정에 동참하는 인간 세상과 인간 너머의 세상 모두와 상호 관계하는 ‘일원’임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스스로가
자본주의 체제 역사의 일원임을
공공연히 또는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그는 결코 어떠한 체제에 저항하는
영원한 비제도권 투쟁가 페르소나를
섣불리 연기하지 않는다."
1. Ugo Rondinone, still. life. (80 candles), 2013~2022, bronze, lead, oil paint
1. Ugo Rondinone, the sun II, 2018, gilded bronze, 508515.571cm
Courtesy the artist; Galerie Eva Presenhuber, Zurich; Esther Schipper, Berlin;
Sadie Coles HQ, London; Gladstone, New York; Kamel Mennour, Paris; Kukje Gallery, Seoul Photo © Andrea Rossetti
ARTIST PROFILE우고 론디노네 UGO RONDINONE1964년 스위스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활동 중인 아티스트다. 주로 조각, 드로 잉,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무지개, 돌 등 자연을 소재로 작품을 만든다. 이는 살아 있는 우주에 대한 기록이자 인간 내면에 대한 시적인 성찰의 표현이다. 2001년 뉴욕 뉴뮤지엄 외관에 설치한 무지개 형태의 작품 ‘헬, 예 스!Hell, Yes!’, 2016년 네바다 사막에 설치한 돌을 이용한 작품 ‘세븐 매직 마운틴Seven Magic Mountains’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
writer Jon Ihnmi 미국 시라큐스대학교 현대미술사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