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 지휘자는 서울시향 음악감독 시절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는
대장정을 야심 차게 이끌었다. 나는 세종문화회관 시향 연습실에서 그가 음악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지켜본 적이 있다. 곡은 말러의
3번 교향곡이었다. 연습실은 좁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하프 두 대 등 대편성 오케스트라 악기
와 연주자들로 가득 차 겨울인데도 열기가 후끈했다. 나는 오케스트라 뒤에서 망원렌즈를
들고 현악기 활의 숲속에서 지휘 삼매경에 빠진 마에스트로를 지켜보았다.
저녁이 이슥해질 무렵 정 감독은 “이제 현악 파트는 가도 좋아요” 하고 선언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주자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야호!” 밖에서는 다들 ‘선생님’인 단원들이 아이처럼 좋아하며 재빨리 악기를 챙겨 들고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정 감독은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힌 얼굴로 악보를 노려보며 장내가 정돈되기를 기다렸다. 이제부터는 관악과 타악
파트를 점검해야 한다. 현악기 주자들이 썰물처럼 사라지자 오케스트라 맨 뒤 높은 자리의
팀파니 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양손에 말렛을 들고 팔짱을 낀 채 체념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말러의 3번 교향곡은 6악장 종말에서
거인 발소리 같은 팀파니 강타와 함께 긴 여정이 마무리된다. 팀파니 주자는 연습 마지막까지 붙들려 있어야 한다. 그런데 타악기가 끝이
아니다. 4, 5악장에는 성악이 가세한다.
그날부터 일주일 뒤 서울시향은 세종대
극장에서 1백 분에 걸쳐 말러의 3번 교향곡을 펼쳐놓았다. 정 감독은 어느새 성악진도 완벽히 준비를 끝내두었다. 팀파니 주자는 연습실에서와는 달리 환희에 찬 강타로 대곡을 마무리했다. 연주는 찬 바람 몰아치는 세모歲暮의
광화문에서 열렸으나 그날 음악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여름날의 푸른 들판이
드넓게 펼쳐졌다. 1895년과 이듬해 여름 호숫가의 작은 오두막에서 지은 교향곡 3번은 첫
악장이 ‘여름의 시작’ 또는 ‘목신牧神의 깨어남’이라는 주제로 작곡됐다.
사실 말러의 3번 교향곡을 실황으로 들을 기회는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그날 연주도 시향의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라는 사이클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무대에 올려졌다. 3번 교향
곡은 너무 길고, 성악진 준비가 쉽지 않으며,
음악적으로도 난해한 구석이 있다. 말러 연주를 많이 한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도 7번과 함께 3번을 “수상쩍다”고 한 바 있다. 집중하지
않으면 도중에 허우적거리게 되는 곡이라면서. 지휘자가 그럴진대 듣는 입장에서 곡이 쉬울 리 없다. 음반 두 장을 가득 채우면서 맥락
조차 뚜렷하지 않은 음악을 스피커 앞에서 집중해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말러의 교향곡 중 3번을 가장 자주 듣는다. 어쩐지 자꾸 손이 간다. 대신 매번 전곡을 듣지는 않고 그때그때 듣고 싶은 악장을 골라 감상
한다. 말러의 교향곡은 그렇게 들어도 상관없게 만들어져 있다.
가장 자주 듣는 것은 마지막 6악장이다.
연주 시간이 25분이나 돼 모차르트의 교향곡 한 곡보다 길다. 하지만 강물처럼 흐르는 음악이 고요한 명상에 빠져들게 해 눈을 감고 듣다 보면 어느새 거인의 발자국이 저 멀리 뚜벅뚜벅 멀어진다. ‘베토벤 이후 가장 아름다운 느린 악장’이란 평가가 지나치지 않다. 성악이 듣고 싶을 땐 4, 5악장을 연이어 듣는다.
4악장에는 메조소프라노 솔로, 5악장에는 여성 합창단과 소년 합창단을 더했다. 두 악장에서 작곡가는 인간을 노래한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깊은 고통’과 우리의 바람인 ‘천상의 기쁨’이 주제다. 어두운 고통이 사라지면 어린이들이 “빔밤, 빔밤” 아침 종소리를 내고 천사가
기쁨을 노래한다. 약 15분간 말러의 절묘한 성악 세계가 펼쳐진다. 3악장에서는 포스트 호른post horn 소리가 오래도록 들려온다. 무대
밖에서 독주하는 호른 소리는 들판 너머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울음소리 같다. 하지만 아련한 포스트 호른을 듣고 있으면 새벽녘 잠자리
에서 뒤척이는 어린 말러가 떠오른다. 말러는
집 근처 병영에서 들려오는 기상나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이렇게 각 악장을 따로 듣다 보면 전 악장을 이어서 듣고 싶어진다. 코로나에 발이 묶여 갇혀 지내던 어느 겨울날, 번스타인/뉴욕
필의 1987년 실황 연주를 턴테이블에 올렸다.
1백 분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1악장을 여는 힘찬 호른 합주부터 6악장 끝의 팀파니 강타까지 음악은 거침없이 흘러갔다.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가슴속에는 여름의 무성한 생명력이 오래도록 일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