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들에 가득한 생명
“저 꽃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보아라.” 어느 날,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아름다운 꽃들이 한가득 핀 들판을 거닐던 중이었나 보다. 봄날 팔레스타인의 들은 저절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황무지는 어느새 아무런 흔적도 없다. 풀들이 올라와서 지평선 끝까지 파릇파릇, 녹색 융단이 펼쳐진다. 그 위로 하얀 데이지와 당근꽃, 붉은 아네모네와 양귀비, 노란 미나리아재비와 겨자꽃, 분홍 시클라멘과 백리향, 파란 루핀과 세이지, 보라 맨드레이크 등이 피어나 곳곳에서 어여쁨의 축제를 벌인다.
‘그러나 제자들 표정과 마음은 어둡기만 하다. 봄을 봄답게 즐기지 못한다. 먹고살 근심에서 도무지 놓여나지 못한다. 온 들에 가득한 생명을, 신의 축복을 만끽할 여유가 조금도 없다. 이어진 구절에서 예수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며 애쓰지 말라고 경고한다. 희랍어에서 염려는 메림나테merimnate로, 주로 물질적 이유 탓에 생긴 불안이나 걱정으로 마음이 나뉜 상태를 뜻한다. 염려하면 집중할 수 없고,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일을 온전하게 누릴 수 없으며, 가장 강렬한 기쁨을 가져오는 몰입에 이를 수도 없다.
예수가 불행한 마음에 빠진 제자들에게 저 들녘을 보라고 권한다. 어제의 황량한 대지에 갇혀 있는 대신 아름답게 변화한 오늘의 이 봄을 즐기라고 이야기한다. 만물은 한없이 유전하고, 사건은 끝없이 일어난다. 오늘도 새로운 일들이 무수히 나를 스쳐 사라진다. 어제 거기의 나에 갇혀 있으면 지금 여기의 새로움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낱낱의 순간에서 무엇도 누리지 못하고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앞날의 희망도 짓지 못한다. 누구나 단 한 번만 살 수 있기에,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은 깊이 음미할 가치가 있다. 그럴 줄 아는 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진다.
복숭아나무 싱싱하고, 복숭아꽃 활활 타네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물질적 조건보다 마음에 더 많이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은 내리쬐는 한 줌의 햇빛만으로도 유쾌하고, 어떤 사람은 세상을 다 가져도 암울하다. 알렉산드로스는 땅끝까지 손에 쥐려 했기에 서른세 살에 낯선 땅에서 비명횡사했고, 디오게네스는 빈 포도주 통 하나로도 만족했기에 아흔 살 천수를 누렸다. 언제나 더 많이 바라는 사람은 불행하고, 그때그때 주어진 것을 최대한 누리는 사람은 행복하다. 똑같은 경험을 했을지라도 어떤 체험으로 바꾸어가느냐에 따라서 인생은 달라진다.
‘<시경>에서 봄날을 맞은 중국의 옛 시인은 “복숭아나무 싱싱하고, 복숭아꽃 활활 타네(桃之夭夭, 灼灼其華)”라고 노래했다. 이 시는 봄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최초의 작품이다. 시인은 꽃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홀려 있다. 싱싱[夭夭]과 활활[灼灼], 겹쳐 쓴 두 단어는 시인이 봄 풍경에서 무엇을 즐기고 있는지를 선연하게 보여준다. 분출하는 생명력, 넘쳐나는 기운이다. 지금 시인은 꽃에서 그 힘을 만끽하는 중이다.
그 힘을 예수의 말로 하면 ‘자라다’다. 이 말을 그리스어로 아욱사노auxano라고 한다. ‘성장하다, 커지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식물만 자라는 게 아니라 정신이나 영혼도 자란다. <양화소록>에서 강희안은 “꽃의 덕목을 본받아 나의 덕으로 삼으면 이로움이 어찌 많지 않으며, 뜻은 어찌 커지지 않겠는가”라고 이야기했다. 겨우내 먼지만 날리던 황무지에 어느새 봄풀이 움트고 자라고 꽃을 내서 번성하는 모습을 보면 죽음 속엔 생명이, 절망 속엔 희망이, 슬픔 속엔 기쁨이, 멈춤 속엔 움직임이, 갇힘 속엔 열림이 잠재해 있음을 깨닫는다. 들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꽃들은 정직하게 미래를 믿고 있다
어제의 체험에 갇혀서 오늘 이 순간을 새롭게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인생은 어두운 늪과 같다. 예수가 어제의 근심에서 놓여나 오늘의 꽃을 보라고 말하는 이유다. <투명사회>에서 철학자 한병철은 “체험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만 본다”고 말했다. 타자로 가득한 현실, 즉 정신을 온통 사로잡고 영혼을 완전히 뒤흔드는 충격적 경험 없이 인간은 동어반복의 삶만 살아간다. 낯선 것과의 만남 속에서만 인간은 스스로 변화할 수 있다. 오늘 이 순간 들꽃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어제에 사로잡혀서 살아봐야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허만하 시인은 ‘야생의 꽃’에서 말했다. 들녘의 “꽃들은 정직하게 미래를 믿고 있다. 흰 꽃잎은 순결한 미래를 믿기 때문에 희다.” 꽃들은 정직하다. 흰 꽃이 흰 이유는 순결하게 될 것을 믿고 순결하게 살기 때문이다.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먹을 것, 입을 것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거기에 목매달며 산다. 맛있는 음식에 침 흘리고, 화려한 입성에 눈 돌아간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예수의 말이다. 그러나 한 번뿐인 인생에는 눈앞의 쾌락보다 더 의미 깊고, 더 가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 단순히 등 따뜻하고 배부른 것으로는 삶의 진짜 기쁨을 누리기 어렵다. 귀한 것을 버리고 헛된 것을 얻으면 인생의 가치는 떨어진다. “꽃들은 정직하게 미래를 믿고 있다.” 이것이 좋은 삶을 사는 위대한 비결이다.
삶에서 아름다움의 씨앗을 발견하고 이를 만끽하며 살아가는 마음이 성장을 이룩하고 기적을 낳는다. 우리가 정말 아름다운 사람인지는 아무도 모르나, 아름답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아름다워지는 일은 결코 없다. 미덕은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정성스레 가꾼 삶의 결과다. 거룩하게 사는 사람은 거룩함을 남기고, 의롭게 사는 사람은 정의를 남기며, 아름답게 사는 사람은 아름다움을 남긴다. 인생에는 로또도 지름길도 없다. 꾸준히 행해서 쌓은 결과만이 진짜 인생으로 남는다. “흰 꽃잎은 순결한 미래를 믿기 때문에 희다.” 좋은 삶이 무엇인지 아무도 미리 알지 못하고, 누구나 살아간 뒤에야 좋은 삶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