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저드
조각에 반대하는 사물
2020/7 • ISSUE 27
editorKim JihyewriterJeon Hyo Gyoung 아트선재센터 큐레이터
Stainless steel and amber plexiglas, Executed in 1968, 15.2 × 68.6 × 61cm
.Photo ©Christie's Images / Bridgeman Images.
단순한 형태, 재료 자체의 물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구조, 사물의 모듈화, 모듈의 반복과 변주. 작품에서 보이는 이러한 형태적 특성 덕분에 도널드 저드(Donald Clarence Judd, 1928-1994)는 1960년대 미국 뉴욕에서 시작된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작가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저드는 스스로 미니멀리즘 작가로 불리기를 거부했다.
미니멀리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부터 1970년 초에 나타난 미술 사조로, 추상표현주의를 포함한 예술지상주의적 색채가 강한 모더니즘에 저항하고자 시작된 운동(movement)이었다. 미니멀리즘에는 회화, 음악, 조각, 건축 등 각 분야의 형식이나 태도가 반영되었다. 특히 형식적인 면에서는 사적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간결한 선이나 기하학적인 형태, 그전에는 미술 작품에 쓰이지 않던 산업적인 소재를 작품 제작에 사용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도널드 저드는 프랭크 스텔라, 엘즈워스 켈리, 솔 르윗, 안토니 카로, 댄 플래빈 등과 함께 미니멀리즘 대표 작가의 대열에 항상 이름을 올렸는데, 그는 자신이 조각가도 아닐뿐더러 미니멀리즘이라는 사조에 속할 만한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2018 Judd Foundation 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 / Album Images
"작품이 자리할 최선의 공간과 시간을 만들고자 한 것은 그에게 ‘현실적인’ 고민이자 노력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저드의 작품은 우리의 시간대에서도 과거의 박제된 기억이 아닌 현재로 존재할 수 있게 됐다."
형태, 공간, 그리고 컬러
도널드 저드는 표현주의적인 회화로 미술을 시작했지만 1950년대부터 작품 형태가 급속도로 추상화됐다. 그는 재료 자체의 물성에 집중하면서 ‘박스(boxes)’, ‘쌓기(stacks), ‘연속(progressions)’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자신의 작품을 설명했다. 특정 재료를 정방형 (boxes)으로 만들어 이를 쌓아 올리며(stacks) 공간에 배치하고, 이러한 행위가 연속(progressions)되는 것은 저드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반복적인 배치이자 구조다.
특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쌓기(stacks)’ 작업은 1965년에 처음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규격과 형태가 정확히 같은 철 박스 여러 개를 일정 간격을 두고 벽에 고정한 작품이다. 특히 저드는 아주 단순한 형태의 ‘사물’을 공간에 연속적으로 쌓을 때 이것이 놓인 ‘공간’의 의미가 역설적으로 새롭게 강조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쌓기’ 형식의 작품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저드의 중요한 작품 유형이었다.
도널드 저드는 알루미늄, 철, 구리 등 차가운 산업 재료를 자주 사용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채색의 형태나 구조, 물질감만 다룬 것은 아니다. 컬러는 저드에게 중요한 요소였다. 그의 작품은 언뜻 건축물의 일부를 따온 것처럼 ‘구조적’으로 보여서 어떤 모듈을 만들고, 여기에 여러 표면적인 특성을 대입해 변주한 것으로 단순하게 미루어 짐작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저드가 미니멀리즘 작가라는 다수의 기대를 다시 한번 깨는데, 그가 자신의 직관에 따라 작품 면면의 컬러를 선택했다는 점 때문이다. 그의 동료 비평가 루디 푹스 Rudi Fuchs는 저드가 컬러를 선택하는 과정을 매우 즐겼다고 말한다. 저드는 컬러가 만들어내는 각기 다른 온도와 이야기가 작품의 형태를 이루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형태에 대해 작가가 고민할 때는 사조나 역사적인 맥락은 사라지고 그 순간의 직관적인 결정이 가장 우선되어 나타나기 마련이다. 저드는 이러한 제작 과정을 자신의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다. 저드는 ‘특정한 사물(Speci)c Objects)’(1965)이라는 글에서 회화나 조각으로 단순히 구분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닌 ‘3차원 작품’에 대해 언급한다. 이 글을 쓴 1960년대에는 개념 미술이 생기고, 단일 작품으로 마무리되는 형태의 작업을 벗어나 상황 전체를 고려해야 하는 설치미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러한 미술 작품에서 파생된 모종의 운동, 학파, 형식을 하나의 형태로 규정하는 데 무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작가들이 몇몇 규칙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당대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유사성보다 개별적인 특별함을 알아봐주기를 바랐다.
ARTIST PROFILE
도널드 저드 DONALD CLARENCE JUDD
전후 예술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 1950년대부터 회화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저드는 1959년부터 산업 재료를 사용한 오브제를 제작했다. 저드가 1986년에 설립한 차이나티 재단에서는 오늘날까지 저드에 대한 연구와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Donald Judd, Marfa, Texas, 1992 ©Christopher Felver
Jungjin Lee, ‘Voice 39’, 2019, Archival Pigment Print, 108.5×153cm.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현재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7월 11일까지 30년 동안의 작품을 망라한 회고전 〈Judd〉를 진행하고 있다.
작품이 거주하는 자리
저드는 전시를 준비할 때 작품을 다시 제작하고, 설치하고, 운송하는 일련의 과정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전시의 과정을 벗어나 작품이 온전히 자리 잡고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 이는 작가로서 작품을 감상하는 데 영향을 끼치는 모든 요소를 스스로 결정하면서 작품이 존재하는 의미를 제시하고, 관람자 또한 좀 더 구체적으로 경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1986년 텍사스 마파 Marfa 지역을 기반으로 설립된 차이나티 재단(Chinati Foundation)을 중심으로 도널드 저드 재단을 만들면서 현실이 됐다. 이 재단은 저드가 1979년 디아아트 재단(Dia Art Foundation)의 도움을 받아 텍사스의 작은 도시 마파에 약 1.4㎢ 규모에 달하는 사막 한복판에 있는 땅을 매입한 이후, 그 자리를 기반으로 설립되었다. 이곳은 야외에 설치된 작품을 포함해 대형 건물 세 곳에서 도널드 저드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차이나티Chinati / 더블록The Block과 연구소, 레지던시, 작업실 등이 자리한 스튜디오 구역으로 나뉜다. 그가 1998년 작고한 이후에도 당시 설립된 저드 재단에서 작품을 관리하고 있으며, 그 덕분에 작품은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많은 전시 공간이 생겼다 없어지는 데 익숙한 작가들에게 작품을 영구적으로 설치할 수 있는 마파의 환경은 마치 유토피아 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도널드 저드는 루디 푹스와 나눈 대화에서 마파의 상황이 자신이 믿는 실재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이를 꿈 혹은 이상적이고 일시적인 상황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이 전시돼야 하는 최종적인 자리라고 생각했다. 작품이 자리할 최선의 공간과 시간을 만들고자 한 것은 그에게 ‘현실적인’ 고민이자 노력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저드의 작품은 우리의 시간대에서도 과거의 박제된 기억이 아닌 현재로 존재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