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물을 마시다
2020/7 • ISSUE 27
“어디라도 괜찮다! 어디라도 괜찮다! /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술 한잔과 함께 우리는 언제든 바깥 세계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Alfons Teruel / EyeEm / Getty Images Korea
writer Jang Eunsu 출판편집인, 문학평론가
오래전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 일이다. 1990년대 중반, 유럽 첫 출장길이다. 빠르게 일을 치르고 나니, 하루 반나절짜리 파리 여행자가 되었다. 소르본대학 근처 숙소를 나와 아침 일찍 뤽상부르공원 산책에 나선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만나서 눈이 맞은 곳이다. “운명은 신비롭고 숙명적인 참을성을 발휘하며 서서히 두 남녀를 서로 접근시켰다. 비바람 몰아치는 정열의 전기를 가득 싣고 잔뜩 번민하는 두 존재를, 벼락을 담은 두 구름처럼 사랑을 품고 있고, 그 구름들이 서로 접근해 번개 속에서 한데 섞이듯 하나의 눈길 속에 서로 섞일 그 두 영혼을.”
사랑할 사람은 어차피 사랑하게 되어 있음을, 번개처럼 내려앉는 사랑의 충격보다 진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두 사람은 내면의 어둠 속에서 깨닫는다. 사랑의 불꽃이 튈 때마다 서로의 눈길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환해졌던 것이다. “뤽상부르는 참으로 즐거운 공원이에요.” 마리우스에게 아직 한마디 말조차 붙여보지 못했지만, 코제트는 아버지 장발장에게 더할 수 없는 행복감을 표현한다. “뤽상부르에 자주 오고 싶어요, 아버지!” 은밀한 욕구가 춤을 추고, 건강한 갈망이 타오른다. 세상 모든 이들이 뤽상부르공원을 자신과 똑같이 ‘행복의 장소’로 느껴야 한다는 듯, 코제트는 달콤하게 귓가에 속삭인다.
문文은 본래 ‘무늬’라는 뜻이다. 인물에 새기면 문신이 되고, 장소에 붙으면 추억이 된다. 문학은 인간의 정체를 바꾸고 장소의 기억을 혁신한다. 공원 한쪽 벤치에 앉아 어찌 사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곳의 여주인이 공원을 조성한 왕비 마리드 메디치에서 평민 코제트로 바뀌는 순간이다. 프랑스 혁명은 왕가의 피로 시작해 문학의 먹물로 완성된 것이다.
번개가 혀에 닿는 듯한 충격을 받다.
뤽상부르공원에서 생미셸 거리를 걸어서 노트르담대성당 쪽으로 가는 도중, 내 삶의 한 줄기도 영원히 바뀐다. 팡테옹 국립묘지 부근 어느 골목에서 길거리 카페를 만난다. 갓 구운 크루아상이 맛있어 보이기에 커피와 함께 먹으려고 카페에 들어선다. 주인의 입 모양을 몇 번 따라 한 끝에 빵과 까흐피(?)를 힘겹게 주문하자 갑자기 목이 탄다. 식당에서 돈 주고 물을 사는 게 익숙지 않아서 아직 억울한 기분이 들 때다. 에비앙 대신 무심코 집어 든 것이 맥주다.
자리에 앉자마자 한 모금 들이켜고 난 후, 번개가 혀에 닿은 듯한 충격을 받는다. 선명한 홉맛에 밀 맥주 특유의 달콤함이 혀를 적신다. 적당히 식힌 맥주가 마른 입을 적시면서 스스로 목젖을 넘어간다. 곧이어 풍부한 향이 입속 가득 퍼지다 비강을 타고 들어와 후각 세포를 건드린다. 프랑스는 당연히 와인, 며칠째 마신 것은 포도주뿐이다. 하지만 아직 와인 맛을 잘 모른다. 이 술이나 저 술이나 취하는 건 똑같다 여기던 때이니 당연하다. 취하려 마시는 것이지 즐기려 마신 적은 한 번도 없다. 보리 맥주가 아닌 밀 맥주를 처음 경험한 덕분일 것이다. 순간, 맥주의 다양성을 불현듯 깨닫는다. 같은 맥주라도 도시마다, 브랜드마다 고유한 맛이 있음을 알고 기분과 취향 따라 골라 마시기 시작한 것도 이날부터다. 남은 하루 동안, 여행자의 발은 팡테옹 국립묘지, 노트르담 대성당, 퐁피두 센터, 루브르 박물관, 퐁뇌프 다리, 오르세 미술관 등을 헤매지만, 여행자의 혀는 틈나는 대로 크고 작은 카페에 들러 이런저런 맥주를 맛보고, 눈은 보들레르의 시집과 발자크의 소설을 읽는다.
식탁이 파산시킨 사람들 숫자는 헤아릴 수 없다.
파리는 미식의 도시다. 1812년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했을 때, 프랑스가 물어야 할 배상금은 15억 프랑이었다. 유럽 전체에서 사절들이 돈을 받으러 파리로 몰려들었다. 프랑스는 이 돈을 음식으로 갚았다. <미식 예찬>에서 브리야사바랭은 말한다. “외국인들은 전쟁 중 맛들인 달콤한 습관을 되살리기 위해 유럽 전역에서 모여든다. 그들은 파리에 와야만 하고 파리에 있을 때는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놀랍게도, 프랑스가 지불한 배상금보다 유럽인이 파리에서 먹고 마시는 데 쓴 돈이 더 많았다.
이로부터 미식의 수도 파리에서는 전 세계 요리사들과 파티시에들이 음식 경연을 펼쳤다. 맛있는 음식과 달콤한 술에 중독된 사람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만족을 추구”한다. 결과는 파멸이다. <목로주점>의 여주인공 제르베즈의 몰락은 “금빛으로 노릇하게 익어서 육즙이 줄줄 흐르는 거대한 거위”에서 시작된다. 발자크는 <사촌 퐁스>에서 “식탁이 파산시킨 사람들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헤아릴 수 없다”고 쓸 정도였다.
자연스레 파리는 레스토랑과 카페의 도시가 되었다. 1686년 소르본대학 근처에 ‘르 프로코프’ 카페가 처음 문을 연 이후, 카페는 늘 파리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17세기에는 문학을 토론하는 공간이었고, 18세기에는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진 정치 토론의 장이었다. 19세기에는 시인과 철학자가 문학·연애·취미·철학 등을 논하고, 예술가가 작품을 전시하며, 노동자가 비좁고 답답한 집을 떠나 사교를 나누는 곳이었다. 20세기에도 카페는 초현실주의, 실존주의 등을 낳은 자궁이었다. 라신, 볼테르, 달랑베르, 보들레르, 베를렌, 랭보, 발자크, 졸라, 마네, 드가, 고흐, 로트레크, 헤밍웨이, 사르트르, 카뮈 등은 모두 카페 역사에 한 줄기 에피소드를 남겼다.
술 속에는 로빈슨 크루소가 산다
술은 문학 그 자체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이백은 한 말의 술을 마시고 1백 편의 시를 썼으며, 미국의 작가 찰스 부코스키는 와인을 “신의 피”로 부르면서 “창작에 최고인 물건”이라고 말했다. “함께하면 서너 시간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술은 신이 선물한 ‘사랑의 묘약’이다. 얼마나 많은 연인이 술로써 사랑의 한 걸음을 걸었고,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술로부터 탄생했던가. <미친 사랑>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사랑과 술의 완전한 동일성을 발견한다. “나오미는 아주 독한 술과 같아서, 그 술을 지나치게 마시면 몸에 해롭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날마다 그 향기를 맡게 되고, 찰랑찰랑 넘칠 만큼 가득한 술잔을 보면 역시 마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술 속에는 이상하게도, 로빈슨 크루소가 산다. 친구들과 어울려 왁자하게 먹고 마시는 중인데, “가슴 밑바닥”에서 때때로 비애의 파도가 일면서 어느새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 홀로 갇혔음을 느낄 때가 있다.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에서 김수영 시인은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 문득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사이의 한 섬”에 갇힌 사람을 떠올린다. 시인은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라고 중얼거린다. 모두 함께 있는데 실은 나 혼자 있는 듯한 기분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가. 쓸쓸함을 잊으려 마시는 술이 되레 외로움을 불러들인다. “살다 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온다. 그러나 정작 기대야 할 ‘아무’의 익명성은 얼마나 절망인가. 시인은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 물거품으로 부서져가는 것을 본다”고 독백한다. 온 힘을 다해 쌓아 올린 꿈이 “물거품처럼 부서”지는 것, 이것이 우리가 처한 진짜 현실이다. 술은 이 사실을 아프게 환기한다.
자유는 주었으나 실현할 도구를 주지 않은 세계는 더럽고 부패해 있다. 불행, 고통, 실망, 고독 등은 이 세계의 삶을 압축하는 감정이다. <바냐 외삼촌>에서 체호프는 말한다. “현실의 삶이 사라지면 사람은 반드시 환상을 만들어내죠.” 옳은 말이다. 파리의 카페 한구석, 비루한 일상을 망상에 얹어 흘리면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이유다. 1백50년 전에는 보들레르 역시 바로 이 자리에서 ‘인공낙원’을 발명했다. “달래야 할 회한을 마음속에 지녔던 사람, 되씹을 추억, 묻어버릴 고통이 있었던 사람, 사상누각을 쌓아 올렸던 사람… 이들 모두 포도밭 넝쿨 속에 감춰졌던 신비로운 신을 불러낸 것이다.”
술은 인간을 꿈꾸게 한다
보들레르가 생애를 걸고 싸운 것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공허한 쾌락의 형식, 즉 유행이다. 유행에는 본질적 새로움이 없다. 유행은 나오자마자 진부해지는 새로움에 불과하다. 사실 낡아빠진 것이 새로운 얼굴로 돌아오는 것이다. 현대인은 무의미하고 진부한 일상을 유행을 소비하면서 잠시 버텨나간다. 새로움의 주기적 순환은 삶이 진보한다는 환상을 준다. 그러나 실제로 유행이 가져오는 것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지겨움뿐이다. 유행은 삶을 서서히 쓰레기로 만든다. 이러한 삶은 우리 존재를 완벽히 패배시킨다. 인공낙원에서 보들레르는 유행의 질서에서 벗어나 신적인 황홀을 체험한다. 이것은 분명히 ‘악의 꽃’을 피우는 타락이지만 동시에 더없는 구원이기도 하다. 보들레르는 부르짖는다. “어디라도 괜찮다! 어디라도 괜찮다! /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술 한잔과 함께 우리는 언제든 바깥 세계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때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