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작품은 전해지는 것만 1천 곡이 넘는다. 바흐는 이 많은 음악 중 어떤 장르에 가장 깊이 마음을 쏟았을까? 종교음악이 먼저 떠오른다.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과 2백 곡이 넘는 교회 칸타타를 인류에게 선물한 바흐는 오늘날 ‘제5복음서 저자’로 추앙받는다. 그런데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바흐가 종교음악을 집중적으로 작곡한 것은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칸토르kantor로 부임한 1723년부터 약 3년간이다. 이 시기에 바흐는 놀라운 생산력으로 수난곡과 칸타타 등 수백 곡의 교회음악을 짓는다. 1년 사이클로 돌아가는 교회의 모든 전례에서 자신의 음악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것이다. 즉 ‘임무’를 다했다. 이 시기 전후에도 바흐는 종교 음악을 짓기는 했으나 양은 그리 많지 않다. 몇 년 뒤 바흐는 교회음악은 아예 잊은 듯 다른 음악에 몰두한다. 그의 나이 40대 중반부터 50대 중반까지, 가장 원숙한 시기였다. 그것은 건반 음악이었다
우리말로는 ‘건반 연습곡’이라는 소박한 이름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지만, 바흐가 기획한 ‘클라비어-위붕Clavier-U¨ bung’은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1731년부터 1741년까지 네 번에 나누어 발표한 음악에는 ‘여섯 개의 파르티타’, ‘이탈리아 협주곡’, 바흐의 가장 중요한 오르간 음악들 그리고 저 유명한 ‘골드베르크 변주곡’ 등이 포함돼 있다.
독일 라이프치히 출신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바흐의 삶과 작품 세계를 연구한 크리스토프 볼프 교수는 바흐 전기 <바흐, 학식 있는 음악가(BACH, The Learned Musician)>에서 클라비어-위붕 프로젝트를 설명한 뒤 이렇게 말했다. “바흐는 이 만화경 같은 건반 음악 작품의 발표로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예술적 기념비를 세웠다.” 완곡한 표현이지만 볼프 교수는 건반 음악이야말로 바흐의 가장 위대한 성취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새삼 돌이켜 보니, 내가 바흐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수난곡, 칸타타를 들어본 지가 오래다. 반면 건반 음악은 어제도 오늘도 듣고 있다. 종교음악은 어쩌다 마음먹고 듣는 반면 건반 음악은 숨 쉬듯 늘 찾는다.
최근 턴테이블에 자주 올리는 음반은 클라비어-위붕 1부의 ‘여섯 개의 파르티타’다. 우연히 구한 미하일 플레트네프의 LP가 계기가 됐다. 러시아 출신인 플레트네프는 지금은 지휘자로 더 유명하지만 21세 되던 1978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탁월한 피아니스트다. 음반은 콩쿠르에서 우승하던 해 녹음한 파르티타 6번을 수록하고 있는데, 피아노 음색이 청년답게 풋풋하다. 귀 기울여 듣다가 2악장 알망드에서 그의 오른손과 왼손이 대위법對位法을 눈앞에 펼쳐 보여주는 느낌을 받았다. 양손은 오선지를 검게 메운 수많은 음표를 정밀하게 짚어가고 있었다. 그 개안開眼의 쾌감이 특별해 이 음반을 듣고 또 들었다.
파르티타 2번은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연주를 즐겨 듣는다. 그녀는 바흐의 건반 음악 중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골라 음반 한 장을 꾸렸는데, 토카타 911번과 영국 모음곡 2번 그리고 파르티타 2번이다. 1악장 신포니아에서 마르타는 초입의 비극적 정서에서 가볍게 몸을 뺀 뒤 기계처럼 정확히 맞물려 돌아가는 바로크 음악의 향연을 펼친다. 그리고 끝부분은 여름철 양철 지붕을 때리는 소나기처럼 거침없는 타건으로 마무리한다. 드라마틱한 전개가 바흐는 딱딱하다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마르타가 30대 후반에 녹음한 이 연주를 듣고 파르티타 2번은 다른 연주가 궁금하지 않았다.
파르티타 1번은 오랫동안 디누 리파티의 1950년 브장송 페스티벌 실황 음반으로 들어왔다. 백혈병 막바지에 이른 서른세 살 청년 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오른 무대였다. 프렐류드, 알망드, 쿠랑트까지는 건강할 때와 별 다름없이 연주하지만 느릿한 사라방드에 이르면 음악에 회한이 서린다. 두 손을 떨어뜨리 듯 건반을 누르자 현이 길게 울고, 늦가을 햇살과 같은 쓸쓸함이 듣는 이를 눈물짓게 한다. 리파티는 이전에 스튜디오에서 파르티타 1번을 녹음한 적이 있으나 이 음반과 같은 고적함은 느낄 수 없다. 고통이 명연주 탄생의 조건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바흐가 작곡가로서 전성기에 펼쳐놓은 건반 음악의 세계는 방대하다. ‘여섯 개의 파르티타’만 해도 모두 40개 악장에 이른다. 나도 3·4·5번은 깊이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언젠가는 또 다른 연주자가 그 음악의 비경을 펼쳐놓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