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 <사계>
생명의 음악
나는 차이콥스키를 즐겨 듣지 않는다. 문득 기억을 되살려봐도 몇 년째 듣지 않았다. 음반이 없는 것도 아니다. 러시아의 전설적 지휘자인 므라빈스키와 스베틀라노프의 교향곡들, 카라얀과 리흐테르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용쟁호투를 벌이는 피아노협주곡, 정경화의 데 카Decca 데뷔 음반에 실린 서슬 퍼런 바이올린협주곡, 보로딘 콰르텟의 현악사중주 등 명반이 즐비하다. 그런데 이런 음반들을 꺼내본 지가 까마득하다.
그것은 감정 과잉 때문이다. 대표작인 교향곡 6번의 표제가 ‘비창悲愴(큰 슬픔)’이듯 차이콥스키 음악은 대부분 흥건한 감정을 드러낸다. 담박한 바흐를 즐겨 듣는 귀에 금관악기가 울부짖는 관현악, 애상 넘치는 선율은 부담스럽다.
그랬던 차이콥스키를 오랜만에 들어보게 된 것은 친구가 선물한 LP 한 장 덕분이다. 피아니스트 이고르 주코프Igor Zhukov(1936~2018)가 연주한 <사계四季>다. 친구는 음반을 건네며 “주코프의 솔로 음반은 흔치 않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다. 하기야 울울창창한 러시안 피아니스트 스쿨에 내가 모르는 거목이 한둘일까. 주코프의 이력을 찾아보니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그리고 특이하게도 사운드 엔지니어라고 되어 있다. 그는 녹음 작업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보였고 스스로 ‘녹음 엔지니어 중 최고의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 중 최고의 녹음 엔지니어’라 자부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연주를 하면 장점이 많다. 주코프는 어떤 연주를 들려줄 것인가.
<사계>는 작품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들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계’류는 비발디 하나면 족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차이콥스키의 <사계>는 비발디와 달리 네 계절이 아닌 열두 달을 그렸다. 차이콥스키가 모스크바음악원 교수로 재직하던 1875년 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피아노 음악 잡지 <누벨리스트Nouvellist>를 발행하던 니콜라이 베르나르드는 특별한 제안을 했다. 1876년 1년 동안 매달에 어울리는 피아노 소품을 연재하자는 것이었다. 제재題材는 러시아 문학가들의 시를 활용하고, 니콜라이 자신이 시를 미리 제공하겠다고 했다. 상당한 보수를 약속했기 때문인지 차이콥스키는 그 제안을 즉시 받아들이고는 “당신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편지까지 보냈다. 그는 5월이 가기도 전에 12월호까지 작곡을 끝내 작곡료를 미리 챙겼다.
음반을 들어보니 6월 ‘뱃노래’는 귀에 익다. 나는 그 음악이 차이콥스키의 <사계> 중 하나라는 것도 모른 채 여기저기서 귀에 익도록 들어온 셈이다. 10월 ‘가을 노래’도 귀에 착 붙는다. 열두 곡 중에서 이 두 곡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그런데 내 마음에 깊이 호소하는 것은 3·4·5월을 그린 음악들이다. 봄소식을 전하는데도 들뜬 기색이 없다. 3월은 ‘종달새의 노래’다. 니콜라이가 골라준 아폴론 마이코프의 시가 그윽하다. “꽃들이 흐드러진 들판, 하늘엔 별들이 소용돌이치고, 종달새 노래 푸른 심연을 채우네.” 시가 그렇듯 음악도 풍경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종달새의 노래를 표현하는 건반의 트릴에 기쁨과 슬픔이 함께 녹아 있다. 4월은 ‘갈란투스Galanthus’. 우리가 설강화雪降花라 부르는 이 꽃은 봄이 오기 전 눈을 뚫고 피어난다. 시는 이번 달에도 아폴론 마이코프의 작품이다. “푸르고 정결한 갈란투스, 아마도 마지막이리, 지나간 고통 위에 떨구는 마지막 눈물방울, 그리고 행복을 향한 첫 희망.” 동토凍土의 러시아인이 마음속에 간직한 희망, 기다림이 애잔한 선율로 흐른다. 5월은 ‘백야白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푸른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의 이야기가 음악으로 들려온다.
<사계>는 차이콥스키 작품이지만 <누벨리스트> 편집장 니콜라이의 의도가 뚜렷하다. 러시아 문학에 밝은 그가 치밀하게 기획해 문학적 음악의 작곡을 일궈냈다. 속삭이듯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가 가슴에 사무치지만 감정 과잉에 빠지진 않는다.
이고르 주코프의 연주는 절묘하다. 그의 손이 움직이면 액션action(건반을 누를 때 해머가 현을 치게 하는 피아노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피아노는 ‘흔들리는 촛불’ 또는 ‘동심원의 파문’을 닮은 소리를 낸다. 사진을 보면 깡마른 얼굴에 병적 예민함이 드러나지만 이고르 주코프가 빚어내는 러시아의 봄은 몽환적이다.
writerChoi Jeongdong 기행 작가·칼럼니스트
editorJo So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