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헌의 본질적 기록
민병헌은 자신을 다중적이라고 말한다. 지루하지만 어떤 희열감에 사정없이 몰입하게 되는 암실 작업을 떠올리면,사진가에게 다중적이라는 말은 축복받은 감각을 뜻하는 것일지 모른다. 작가와 대화를 나누며 그러한 작업의 시간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랐다.
동두천 출생의 사진작가 민병헌(1955~)은 독학으로 사진을 시작했다. 촬영부터 인화까지 모든 작업을 직접 진행하고자 아날로그 작업 방식을 유지한다. 40여 년간 작업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어시스턴트를 포함해 어느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았고, 스트레이트 기법의 흑백사진과 젤라틴 실버 프린트를 고수한다. 까마득한 풍경의 숲 사진에서도 자연의 숨결이 세세하게 전해진다. 사람의 뒤태를 표현한 누드 작업을 보더라도 결코 단조롭지 않다. 작가 소개 글에 ‘민병헌 그레이’라는 수식어가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유다. 독학으로 입문한 사진작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국립현대미술관, 프랑스 국립조형예술관, 시카고 현대미술관 등 국내외 유명 미술 기관의 이름으로 가득한 이력과 작품을 두루 살펴보며 얼마나 빈틈없는 인터뷰가 되어야 할지 무게감을 느낀 순간, 민병헌 작가가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담백한 수묵화풍 작품과 상반되는 블랙 컬러의 라이더 재킷, 청바지를 입고 어떤 피사체든 무장해제시킬 듯한 순박한 웃음을 지으면서. 테이블에 마주 앉은 작가는 스튜디오를 메우는 긴장된 공기를 가뿐히 제압하듯 대화를 시작했다. “인터뷰 질문지를 준비해왔어요? 나 이런 거 안 봐요. 하하.” 눈의 직관을 믿는 사진작가이니 인터뷰도 흘러가는 대로 둬볼까 싶었지만, 완벽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 대상을 좁게 포착하는 그의 작업 방식이 떠올랐다. 그는 대상을 인화지에 재현할 때 풍경 속 불필요한 요소가 싫어 화면을 의도적으로 좁게 설정한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용치 않는 구도의 인터뷰로 진행할 것인가, 작가의 말마따나 계획 없이 캐주얼하게 나아갈 것인가, 이 고민은 마주 앉은 작가의 다중적인 성질과도 닮았다. 모든 예상을 비틀듯 어떠한 가능성도 넉넉하게 수용할 줄 아는 사람. 단, 작업에서 타인의 개입은 쉬이 허락하지 않는 사진작가. 가장 명료하게 자신의 주관을 신뢰하는 민병헌의 눈가에는 예리함과 맑은 웃음이 교차했다. 40여 년간 자신이 아름답다고 확신하는 것에만 집중한 탐미주의자의 성정일 것이다.
Q 사진을 독학하던 시절, 작가님께서 경험한 사진의 매력은 무엇이었나요?
A 한쪽 눈을 대고서 세밀하게 카메라 파인더로 대상을 들여다본다는 게 좋았어요. 은밀하달까? 눈으로 보는 광경에서 일부를 잘라내는 크로핑 작업과도 같은데, 그 광경은 나만 보는 거잖아요. 특히 처음엔 35mm, ‘한쪽 눈으로만 들여다본다’는 표현이 정확할 만큼 조그만 걸 사용했잖아요. 싸-악 들여다보는 이 행위가 나의 못된 성격과 어쩜 이렇게 잘 맞는지!(웃음) 농담 같지만, 가장 핵심인 부분입니다. 내 감성으로 보고, 생각하고. 사진에 빠져들게 한 요인이었죠.
Q 40년이 넘는 오랜 시간 작업을 이어오고 계세요. 사진을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우연히 사진이 좋아졌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그런데 이런 구분은 있어요. 그렇게 시작한 취미를 끝까지 이어가는 경우와 아닌 경우. 끝까지 사진을 붙들게 된 건 사진의 본질에 대해 깨닫게 되면서부터예요. 제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취미로 한 1970년대에는 사진의 본질을 ‘사실’, ‘리얼리티’로 정의했어요. 그런데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완전히 달라졌죠. 머릿속 상상에 머무르던 것도 표현해낼 수 있으니까요. 반면 옛날에는 필름을 사용해서 인화지에 재현했기 때문에 어떤 대상의 사실적 재현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어요.
Q 현상을 포착하는 사진가의 눈을 거치는 이상 ‘100% 리얼리티’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요?
A 예나 지금이나 사실적이라는 것에서는 떠나고 싶지 않아요. 사진을 공부할수록 리얼리티에 그치지 않고 내 감성을 더해보는 건 어떨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사진을 하던 당시에는 필름을 썼는데, 그 시절 선배들이 이렇게 조언했어요. “사진은 맑은 날 오후 2시, 125분의 8로 놓고 찍으면 가장 잘 나와.” 흔히 셔터 속도랑 조리개를 뜻하는 말인데, 전봇대 그림자가 선명하게 나오는 조건이거든요. 처음엔 공식처럼 무작정 따라 했죠.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들더라고요. ‘꼭 맑은 날 오후 2시에 찍어야만 좋은 사진인가?’ 지금 제가 촬영하러 온 스튜디오에서도 조명을 다양하게 조절할 수 있잖아요. 생각해보세요. 야외에서는 조명이 태양이에요. 어떤 날은 새벽에 태양의 원 광선이 있단 말입니다. 어떨 때는 눈이 내리고, 안개가 끼고…. 멋모르고 배웠던 오후 2시의 광선만이 이상적인 조건이 아닐 수도 있겠다. 동이 트기 전 어두운 방 안에서 보는 것 또한 리얼리티라면, 강한 광선만이 리얼리티가 아닌 거구나.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다양하게 작업할 수 있겠구나. 이런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죠.
Q 독학 과정에서 느낀 열등감이나 발전을 위한 분투의 경험이 크게 다가왔던 적이 있나요?
A 그럼요. 당시 대학에는 사진 전공이라는 게 없었어요. 중대 사진과의 전신이었던 서라벌 예대도 존재하지 않았던 때죠. 제 또래 사람들이 처음으로 사진을 외국에서 공부한 유학 1세대였는데, 저는 사진을 전공하지 않았잖아요. 게다가 엘리트 형제 집안에서 자랐는데 학교 성적마저 꼴등이었어요. 집 안팎에서 느끼는 열등감이 상당했죠. 또래들은 외국에서 사진 공부하고 돌아와서 교수가 되고, 나는 여전히 아마추어고…. 사진 하겠다는 나를 쳐다봐주는 이가 없었죠. 하필 그 기억이 생생한 건 당시 우리나라가 사진 부흥기를 맞았기 때문일 거예요.
Q 인맥이 없는 환경이라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은데, 당시 아티스트의 길을 진취적으로 나아갈 기회를 어떻게 만드셨는지요.
A 30여 년 전, 미국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막연히 제 작품을 낯선 이들에게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나 봐요. 먼저 미국에 위치한 미술관과 갤러리 리스트를 열심히 추Min Byung-hun, 렸죠. 뉴욕, LA,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전역을 통틀어 1백 군데가량 뽑았어요. 그리고 영어를 잘하는 동생에게 부탁해서 팩스를 보냈어요. “나 한국에 거주하는 민병헌인데, 만나줄 수 있느냐?” “그래, 네가 정 미국에 온다면 한번 만나줄게.” 이렇게 답장 온 곳이 서너 군데였어요. 재빨리 미국행 비행기표를 끊었죠. 처음 간 곳이 LA 카운티 뮤지엄. 도착한 날, 큐레이터를 만난 자리에서 바로 미술관 컬렉션으로 넘어갔다면 믿어져요? 실화예요(웃음). 행운처럼 좋은 일이 두세 번 일어났죠.
Q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국제 무대를 누빌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거군요.
A 아쉽지만 아니에요. 국제적인 입지를 다질 뻔!하다가 말았다고 보는 게 맞죠. LA 카운티 뮤지엄 이후로 다른 갤러리에서 전시 제안이 들어오고, 프랑스 미술관에 컬렉션되면서 전시도 열게 되었는데,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어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첫째는 나의 실력, 둘째는 성질(웃음). 당시 어떤 큐레이터가 제게 “너만큼 인화 잘하는 사람을 본 적 없어” 하며 좋은 기회를 마련하고 여러 차례 도와주었는데, 제가 미팅을 수차례 펑크 냈어요. 결국 계속 주어질 것 같던 기회가 끝났죠. 마음 한구석에서는 현실적인 야망과 놀고 싶은 욕망이 동시에 자리하는 거예요. 사람에겐 살면서 누구에게나 좋은 기회가 분명 한 번쯤 오는 것 같아요. 아쉽지만 전 내면의 복잡다단한 갈등과 괴리감을 직면했죠.
Q 흑백사진과 컬러사진의 기로에서 고민하신 적이 있었나요?
A 초반에는 컬러사진을 선호했어요. 옛날에는 슬라이드 필름, 그러니까 포지티브 필름이죠. 그걸 직접 현상하다 보니 비용이 과도하게 들었고, 컬러 인화지는 온도가 훨씬 민감해 시설비까지 많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흑백을 시도해보았죠. 상대적으로 온도 맞추기도 쉽고, 비용도 적게 들고, 무엇보다 마지막까지 내 손으로 작업하기가 수월했어요. 그래서 선택했죠. 무엇이 되었든 마지막 인화 과정까지 다른 사람 손에는 안 맡기겠다고. 그때도 이 기준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컬러사진을 작업할 때는 이런 부분이 궁금했어요. ‘내가 만드는 빨간색이 마지막엔 어떤 색이 될까? 내가 만드는 파란색은 어떻게 나올까?’ 이 질문에 대한 답도 흑백에서 찾았어요.
Q 흑백사진 작업을 결코 단조롭지 않게 만드는 요소들, 구체적으로 회색에 스며든 세세한 결이나 톤을 말하는 것일까요?
A 그렇죠. 톤과 콘트라스트를 내 감성대로 만들어보는 게 목표였어요. 촬영, 필름 현상, 인화, 마지막 작업까지 내가 해야만 한다는 신념이 있었어요. 40년 전에 했던 아날로그 방식 그대로죠. 달라진 것은 없어요. 어떻게 보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 참 지루하죠. 심지어 제 작업에선 사진을 찍은 뒤 바로 볼 수 없고, 이후 인화 과정에도 실수할 만한 요소가 도사리고 있기도 해요. 결과물을 얻기까지 내가 촬영한 사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고,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위해서라면 필수적인 시간이죠.
Q 누드 작업 이야기를 해볼게요. 프로페셔널한 모델이 아니라 일반인 모델을 중심으로 작업하신 점이 흥미로웠어요. 프로〈아마추어, 인위적이지 않은〈자연스러운〈날것, 점차적으로 날것에 가까운 세기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으셨던 게 아닐지 생각해보았어요.
A 아무것도 연관이 없어요(웃음). 그저 현장에서 느낀 기분이 가장 중요해요. 사실 누드 작업도 2000년 넘어서 발표를 많이 했을 뿐 그 전부터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었어요. 일반인과 작업하는 이유라면, 우선 저는 ‘일하듯’ 작업하는 건 못해요. 어떤 프로페셔널한 모델과 촬영할 경우 계약관계를 맺고 정확한 일정과 시간을 약속해야 하죠. 이런 틀이 제 성격과 맞지 않아요. 실제로 제가 촬영 현장에서 진행하는 과정을 보면, 정작 만나서 촬영을 안 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거든요. 만나서 맛있는 것 먹고, 친구처럼 이야기 나누는 술자리가 되어 있기도 하죠(웃음). 그럼 그날은 현장에서 사진을 안 찍고 싶었던 거예요. 반대로 어떤 날은 몰입이 돼버려서 밤새 찍기도 하죠. 사람이 되었든, 자연이 되었든 기분이 이끄는 대로 임했어요.
Q 작업 과정은 자유롭게 느껴지는데, 아웃풋을 보면 반전처럼 절제미가 드리워져 있어요.
A 사실 그게 너무 화가 나요. 누드 작업을 예로 들면, 저는 제가 보고 싶은 인체 부위를 가감 없이 봐야 해요. 모델에게 구체적인 포즈를 제안하면 그 포즈가 나와야 해요. 그런 합들이 맞춰져 에로틱하게 보일 거라는 생각을 하죠. 그런데 나중에 결과물을 보면 너무 정제된 컷이 나오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웃음). 도대체, 왜 이 이상을 넘을 수 없는 것일까? 아무리 고민해도 모르겠어요. 극도로 그 경계를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려고 애만 쓸 뿐 결국엔 못 벗어나는구나 싶어요.
Q 벗어날 수 없는 절제의 면을 자각하는 순간이 있군요.
A 어쩔 수 없는 다중적인 면인 것 같아요. 어떤 유명한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감사하게도 사진을 보고 저를 꼭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주셨어요. 근데 이 양반이 나를 처음 보는데 말을 못해요. 고개만 갸우뚱갸우뚱거리시면서. 나중에 들어보니, 사진만 보셨을 때는 나에 대해 인사동 개량 한복 입고 가부좌 틀고 앉아 있는 이미지를 연상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웬걸, 만났더니 순 날라리 느낌이라고(웃음). 가까운 지인들은 제 캐릭터를 아니까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네가 이 작업을 하는 것 같다. 그 지루한 암실 작업을. 평생 하면서 다른 데서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 것 같다.”
Q 40여 년간 동일한 작업 방식을 고수한 작가님에게 암실은 어떤 공간인가요?
A 제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 노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저만큼 인화지를 많이 쓴 사람도 없을 겁니다. 어느 순간 꽂히면 아무도 말릴 수 없어요. 작업에 골몰한 채 암실에만 틀어박혀 지내요. 젊었을 적엔 밥도 안 먹었어요. 암실에서는 화학약품 냄새가 나잖아요. 환기용 팬조차 틀지 않을 만큼 어떤 소리도 용납하지 않았어요. 특히 암실에서는 24시간 똑같은 광선이 비치는데 그게 왜 그렇게 좋던지요. 나이가 들어 시력 수술도 했지만, 옛날에는 암등 밑에서도 인화지 상태가 다 보일 정도였어요. 암실에서 느끼는 희열감은 ‘미칠 것 같다’는 말 외에는 표현하기 어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