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누나〉(tvN, 2013~2014) 이후 발칸반도는 한국인에게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매년 수십만 명의 한국인 관광객이 몰려가자 입이 귀에 걸린 크로아티아 관광부 장관이 한국을 찾아와 감사 인사를 전하는 일까지 있었다. 한때 유고슬라비아였으나 여러 나라로 쪼개졌고, 내전으로 인종 청소라는 참혹한 아픔을 겪었으며, 과묵하지만 축구에서 지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다는 남슬라브인의 땅 발칸. 이 외진 지역이 윤여정, 김자옥 등 센 누나들이 한번 쓸고 지나가자 옆 동네처럼 가까워졌다. 덕분에 나도 가보기 어렵던 이곳을 한 바퀴 둘러볼 수 있었다.
작은 베네치아 같았던 두브로브니크도 좋았지만 별 기대 없이 들렀다가 강한 인상을 받은 곳은 크로아티아의 라스토케 마을이었다. 라스토케는 물의 천국인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서 수도 자그레브 방향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데 두 강의 합류 지점에 자리 잡았다. 풍부한 개울물이 이리저리 흐르고 지형적 영향으로 적당한 높이의 폭포가 곳곳에서 시원한 물줄기를 쏟는다. 이렇다 보니 이 마을엔 옛날부터 물방앗간이 많았다. 최초의 방앗간은 17세기에 만들어졌고 많을 때는 20개가 넘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밀과 옥수수, 귀리를 빻지 않는다. 방앗간은 옛 모습대로 보존돼 관광객에게 과거를 증언할 뿐이다. 나는 이 동네를 돌아보며 슈베르트를 떠올렸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 힘차게 돌아가는 물레방아는 이곳이 바로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의 현장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발칸은 오스트리아에서 그리 멀지 않다.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D.795는 슈베르트 최초의 연가곡連歌曲이다. 연가곡이란 내용이 이어지는 여러 개 시에 음악을 입힌 노래집을 말한다. 슈베르트는 20대 중반에 몹쓸 병에 걸렸는데 병상에서 빌헬름 뮐러의 시집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를 읽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였다. 슈베르트는 열아홉 살에 집을 떠나 친구 집을 전전했고, 첫사랑은 가난한 연인을 기다리다 못해 다른 남자에게 가버렸다. 슈베르트는 시집의 주인공처럼 방랑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의 내용은 이렇다. 방랑하는 청년 방아 직인職人이 한 방앗간에 도착해 일자리를 구한다. 그는 주인의 아리따운 딸에게 마음을 빼앗겨 구애한다. 사랑은 맺어질 듯하지만 갈대 같은 여자는 청년의 사랑을 외면하고 스펙 좋은 사냥꾼에게 빠져버린다. 헛된 꿈에서 깨어난 청년은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모든 것을 잊으면 좋겠다고 몸부림친다. 청년은 결국 흐르는 시냇물에 몸을 던져 삶을 마감한다.
21세기 감각으로 보면 이런 사랑은 낯설기만 하다. 쿨한 한국의 MZ세대라면 “실연했다고 죽냐? 어이없다”고 웃을지도 모르겠다. 시를 쓴 뮐러도 시집 말미에 “여흥을 위해 쓴 시들이니, 실제 삶이 아니라 예술을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해달라”고 당부를 덧붙였다. 물방앗간 아가씨와 직인 청년의 불행한 사랑 이야기는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의 인기 소재였다.
내용이 시대와 맞지 않더라도 슈베르트 애호가라면 연가곡을 즐기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슈베르트는 선율의 작곡가다. 스무 곡의 노래가 특유의 풍부한 선율에 얹혀 시냇물처럼 흐른다. 극적이고 때론 서정적인 선율에 몸을 맡기면 내 마음도 하염없이 흘러간다. 전혀 지루하지 않다. 또 하나의 즐거움은 반주악기 새겨 듣기다. 슈베르트 가곡에서 반주악기는 단순히 노랫말을 전달하는 수단에서 벗어나 시상詩想을 독립적으로 묘사한다. 첫머리부터 피아노(또는 기타)는 방랑하는 청년의 활기찬 발걸음을 들려준다.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모습, 쿵쿵 찧는 방아 소리뿐 아니라 연적 사냥꾼의 등장에 긴장하는 마음까지 그림을 그리듯 들려준다. 끝에 이르러 청년의 순정을 삼킨 시냇물이 자장가처럼 흘러가는 풍경을 마주하면 나도 몰래 눈물짓게 된다.
라스토케 마을을 둘러보고 저녁 식사를 하러 갔는데 메뉴로 송어가 나왔다. 20cm쯤 되는 생선 한 마리를 기름에 튀겨 으깬 감자 한 덩이와 접시에 담아낸 요리였다. 소박한 음식이지만 그것이 무려 ‘송어’인 데다 난 방금 슈베르트와 어깨동무하고 물방앗간 순례를 하고 온 참이었다. 슈베르트는 아프기 전인 스무 살 때 가곡 ‘송어’ D.550을 창작했고, 이 선율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중에 ‘피아노 오중주’ D.667 2악장에 다시 사용했다. 내 마음속에 맑은 시내를 헤엄치는 송어가 떠올랐고 나이프와 포크는 한동안 접시 위에서 머뭇거렸다.
writer Choi Jeongdong 기행 작가·칼럼니스트
editor Jo Sohee
intern editorKang Juhee, Jung Na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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