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4일 오후, 고양 아람누리 아람음악당. 무대 위에는 준비를 마친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고요히 숨을 죽이고 있었고,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은 기대감을 안은 채 주인공이 등장하기를 기다렸다. 피아노 위에서는 태블릿 악보가 하얗게 빛났다. 마침내 대기실 문이 열리고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걸어 나왔다. 까만 하이힐에 심플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곧 건반 위에서 춤추게 될 양팔이 시원하게 드러났다.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손열음은 피아노 앞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느 때와 비슷한 모습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날의 콘서트는 다른 연주회와 달랐다. 연주자도 청중도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이벤트였다. 모차르트 피아노소나타 전곡을 전국을 순회하며 연주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모차르트 소나타는 모두 18곡이고 이어서 연주하면 6시간이나 걸린다. 손열음은 이것을 네 번으로 나눠 전국을 돌며 두 번의 사이클로 연주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5월 초순에 서울(두 차례)·원주·통영을 돌며 첫 사이클을 마쳤고, 6월 하순에는 광주·대구·고양·김해를 순회했다. 서울과 통영에서 연이어 연주하고, 광주 다음 날 대구로 이동하는 일정도 포함됐다.
야심차지만 고달픈 이 연주 여행의 기획은 즉흥성과 우연까지 겹친 결과다. 하지만 모차르트 애호가에겐 고마운 기회임이 분명하다. 내가 본 6월 24일의 고양 연주회는 마지막 김해 연주를 하루 앞두고 열렸다. 두 번째 마라톤의 골인을 앞두고 있으니 지칠 만도 한데 손열음은 환한 얼굴로 걸어 나와 피아노에 앉았다. 연주곡은 후기 소나타 4곡이다.
두 손이 건반 위에 사뿐히 내려앉자 피아노가 높은 톤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소나타 15번 K.533/494다. 손열음 자신의 표현대로 ‘혈기 왕성’하고 거침없는 모차르트다. 그는 “모차르트 음악은 내 마음 가까이 닿아 있는 존재이고 항상 연주하기 편하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 피아니스트에게 모차르트가 편하지는 않다. 지난 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는 모차르트를 어려워했다. 웬일인지 악보를 자꾸 잊어버려 암기할 수 없다며 괴로워했다. 우리 귀에 듣기 좋다고 연주까지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 손열음은 자신의 악기 언어와 모차르트의 작곡 언어가 서로 가깝다고 느낀다니 타고난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임에 틀림없다.
소나타 16번 K.545는 모차르트가 초심자를 위해 지은 것이다. 손열음이 동네 피아노 학원에 다니던 시절부터 치던 곡이고, 객석의 어린이들에게도 익숙할 것이다. 손열음은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경쾌하게 연주한다. 2악장 안단테는 속도를 늦추면 살짝 우수가 느껴지지만 손열음은 질주한다. 그의 모차르트는 밝고 명랑하다.
연주회를 기다리며 예습 삼아서라고 할까, 나는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미하일 플레트뇨프의 모차르트 음반을 반복해서 들었다. 인상적인 것은 느린 악장을 정말 극단적으로 느리게 연주하는 것이었다. 소나타 17번 K.570 아다지오의 경우 타건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데 이것이 묘한 집중을 불러일으켰다. 한 음 한 음을 떠먹여주듯이 들려주었다. 이 연주에 익숙한 내 귀에 손열음의 연주는 상당히 빨랐다. 그것은 그것대로 손열음의 모차르트이고 자연스럽고 자유로웠다.
이날 연주회는 본 프로그램도 좋았지만 앙코르 연주도 대단했다. 첫 곡은 모차르트 판타지 K.397이었다. 장조로만 이어진 본 프로그램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는 단조 음악으로 청중을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두 번째 곡은 ‘터키행진곡’으로 불리는 소나타 11번 K.331의 3악장이었다. 이 곡의 첫 부분이 울리자 딸의 손을 잡고 연주회장을 빠져나가던 어머니가 급히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매우 화려하게 편곡된 버전이었는데 연주가 끝나자 청중은 일제히 환호했다. 이어진 곡도 기교적으로 편곡된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이었는데 청중은 모두 일어나 손뼉을 치며 열광했다. 클래식 연주회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진풍경이었다.
마지막 곡 연주에 앞서 손열음은 마이크를 들었다. “2007년 아람누리 개관 연주회에서 연주했어요. 그날 연주했던 곡을 다시 쳐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갈루피의 피아노소나타 5번이었다. 열광과 환호를 차분히 갈무리하듯 투명한 선율이 사람들 가슴속에 스며들었다. 손열음이 순회 연주회에서 선택한 일곱 장소는 모두 이렇게 연주자의 삶에서 각별한 인연을 맺은 곳이다. 그는 인연因緣을 소중히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