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열매 맺는 삶을 위하여
인간의 몸으로 불후의 성취를 이룩했다는 절대적 만족감, 그 눈부신 황홀에 이를 수 있다면 삶은 완벽해진다. 열매 맺지 못한 불모의 삶, 끝내 영글지 못해서 쭉정이로 끝난 인생보다 분한 건 없다.
인문학의 가을, 물리학의 가을
신비하게도 가을이 일어서는 절기인 입추立秋는 8월 초에 있다. 말복이 아직 이틀이나 남았을 때고, 무더위가 길게 이어져 한의학에서 장하長夏라 부르는 시기로, 더위 먹지 않도록 몸조심할 때다. 그러나 번성할 때 기울어질 것을 대비해 행동하는 사람은 지혜롭고, 어려울 때 좋은 날이 올 것을 예감하며 움직이는 사람은 현명하다. 조상들이 여름 한복판에 가을의 문턱을 세운 데는 깊은 의미가 있다.
천문학에서는 하루 평균기온이 22℃보다 낮은 날이 닷새 이상 이어질 때 가을이 왔다고 한다. 온난화로 나날이 뜨거워지는 지구 탓에 요즘 이런 물리적 가을은 8월은커녕 10월이 넘어 시작될 때도 흔하다. 입추 이후에도 ‘인디언 여름’이라고 부르는, 맑은 날이 계속되면서 뙤약볕이 피부를 달구는 더위가 이어진다. 때때로 찾아드는 태풍이 이를 식혀줄 뿐이다.
인문적 가을은 이러한 물리적 가을과 상관없이 시작된다. 더위가 극에 올랐을 때, 지혜로운 이들은 땅에서 서늘함이 솟아오르는 걸 감지한다. 여전히 온몸은 끈적한 땀으로 덮여 있고 피부는 불 속 자갈처럼 빨갛지만, 바람 한 줄기에 상쾌한 기운과 함께 스르륵 더위가 가시는 걸 느낄 수 있다. 이 무렵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노래했다. “주여, 때가 이르렀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 그림자를 드리우고,/ 들에는 바람을 풀어주소서.”(‘가을날’ 중에서) 바람과 함께 열매가 달콤해지고 곡식이 영글기 시작하는 때가 온 것이다.
인간은 열매에 끌리는 마음을 타고난다
가을을 나타내는 한자 추秋는 벼(禾)와 불(火)이 합쳐진 말이다. 본래 이 말은 곡식이 익을 무렵 벌레가 창궐해 낟알을 먹어 치우지 않기를 바라며 지내는 제사를 뜻했다. 8월 초, 알곡이 실해지기 시작하기 직전에 왕은 들판에 나가 해충을 불에 그슬려 태우면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 풍년을 기원했다. 온 세상에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이 제사의 이름이 추秋였고, 이 때문에 가을엔 자연스레 결실의 뜻이 깃들었다.
열매에 끌리는 마음은 우리 유전자에 선명히 새겨져 있다. 영국 작가 에마 미첼의 <야생의 위로>에 따르면, 자연 속에서 야생의 열매와 마주치는 순간 도파민이 우리 뇌를 흠뻑 적신다. 인류의 조상들은 열대우림에서 먹을 만한 열매를 발견할 때마다 생존을 이어가고 아이를 기를 수 있다는 기쁨에 부들부들 떨었다. 이를 ‘채집 황홀’이라 한다.
농경 생활 덕분에 사시사철 열매를 흔히 접할 수 있는 시대지만, 우리는 여전히 열매만 보면 흥분하면서 한입 베어 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우리 안의 구석기 뇌가 먹음직한 열매를 볼 때마다 자동으로 도파민 반사작용을 일으키는 까닭이다. 문안할 때 과일 바구니를 선물하거나, 손님 접대에 과일을 내오면 좀처럼 실패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식물의 잘 익은 열매를 사랑하는 본능을 타고났다.
가을은 열매의 계절
가을은 무엇보다 열매의 계절이다. 중국 속담에 “가을 들어 열여드레 동안 작은 풀조차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만큼 가을을 선연하게 나타내는 표현도 없다. 사람들은 입추에 흠뻑 내리는 비를 상서로이 여겼다. 강렬한 햇볕과 넉넉한 비는 쭉정이 벼를 쌀로 만들고, 온 세상 곳곳을 황금빛으로 물결치게 하기 때문이다.
열매 또는 과일을 나타내는 한자는 과果 또는 실實이다. 과果는 나무에 열매가 가득 달린 모양을 본뜬 글자다. 윗부분 ‘田’ 모양은 잎이 가득 나서 둥글게 부풀어 오른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사이에 과실이 점점이 박힌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열매는 오래 기다려 잘 익은 후에야 먹을 수 있으므로, 어떤 일의 끝맺음을 결과結果(열매 맺음)라 한다.
실實은 조상의 사당을 뜻하는 면( )과 조개 화폐를 끈으로 꿰어 묶은 모양인 관(貫)을 합친 말이다. 산둥반도 바닷가에서 문명을 일으켜 중원을 정복한 은나라 사람들은 조개를 보물로 여겼다. 실實은 조상 영혼에 바치는 귀한 재물을 뜻한다. 잘 여문 곡식이나 열매가 넘칠수록 제물이 풍요로울 것이므로, 자연스레 실實은 ‘열매가 익다’란 뜻도 품게 되었다. 정성을 다하면 사람 마음도 열매처럼 가득 찰 수 있다. 이로부터 성실誠實이란 말이 나왔다.
가을을 앞두고 풍요를 바라는 시인의 호소가 우리 마음을 강하게 울리는 건 이 때문일 테다. “마지막 과실이 꽉 차도록 명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환한 햇빛을 주시어/ 그들이 무르익게 재촉하시고,/ 무거워진 포도알에 마지막 달콤함이 스미게 하소서.” 우리 삶도 식물만큼이나 간절히 열매 맺기를 바란다.
인생이라는 열매
우리 속담에 “열매 될 꽃은 첫 삼월부터 안다”는 말이 있다. 결실 좋을 일은 처음부터 기미가 좋다는 뜻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고, 훌륭한 삶을 남기려면 살아가면서 부단히 몸과 마음이 진실을 향하도록 수양해야 한다. 정조 때 재상 채제공은 이야기했다. “천하의 일은 성실함에 감응하지 않는 건 없다. 우리가 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향기와 빛깔 때문이 아니라 꽃이 열매 맺는 까닭이다.”
인도 사람들은 열매의 사유를 확장해 온 우주의 원리로 삼았다. 만물이 일으키는 모든 행위(karma)는 마치 우주에 뿌려진 씨앗(bija)과 같아서 그 행위의 열매(phala)가 반드시 현세 또는 내세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히브리 사람들도 식물이 열매 맺는 뜻을 알았다. “착한 사람은 생명나무 열매를 맺지만, 남 괴롭히는 사람은 생명을 잃는다.”(<잠언> 11장 30절)
삶이 가을을 향해 기울어갈수록 마음에 걸리는 건 과연 우리 생애가 어떤 열매를 여물었느냐 하는 점이다. 릴케에 따르면, 여름의 우람한성취보다 생의 마지막 가지 끝에 매달린 작고 허약한 열매의 존재에 더 눈이 간다. 이마저 끝내 익어 달콤한 향기를 풍기길 우리는 얼마나 바라는가. 약간만 더 시간이 주어져 마지막 과업을 이룩할 수 있기를 얼마나 소망하는가. 이 때문에 라틴 미학에선 최상의 삶을 세 단어로 압축해서 말했다. 논 플루스 울트라Non Plus Ultra, 하나도 덧댈 게 없다.
파우스트는 한 올의 미련도 남지 않을 만큼 인생이 완벽한 만족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에 악마에게 영혼까지 팔았다. “시간이여,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이것이 생을 바쳐 숱한 노력을 다하고 무수한 희생을 치르면서 파우스트가 얻으려 했던 궁극의 열매다.
시간이 멈추면 더 이상 변화도, 죽음도, 소멸도 없다. 인간의 몸으로 불후의 성취를 이룩했다는 절대적 만족감, 그 눈부신 황홀에 이를 수 있다면 삶은 완벽해진다. 도스토옙스키는 완전히 익은 삶을 향한 갈망을 인류의 영원하고 위대한 망상, 그 꿈이 없다면 산다는 일을 원치 않을뿐더러 죽는 일조차 불가능한 환각이라고 했다. 열매 맺지 못한 불모의 삶, 끝내 영글지 못해서 쭉정이로 끝난 인생보다 분한 건 없다.
그런데 완벽히 달콤한 삶이란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외적으로 화려한 삶이 아니다. <파우스트>에서 괴테는 파우스트의 온갖 모험을 통해 높은 지위와 넘치는 돈이 열매의 삶과 조금도 상관없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노래한다. “여긴 유복한 생활이 대대로 계속되는 곳,/ 볼과 입언저리에 기쁜 빛이 감도는 곳./ 모두 자기 자리에서 불사의 신이 되어,/ 만족하며 건강히 살고 있도다.”
성숙한 삶이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 발버둥 치는 데 있지 않다. 손에 쥔 것에 전적으로 만족하는 소박한 기쁨이 우리를 불사의 신처럼 시간이 멈춘 듯한 행복 속에서 건강하게 살아가게 만든다. 사랑을 느낄 때 베르테르는 롯데의 미소 한번,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서도 지극한 기쁨과 행복을 느꼈다. “열매 맺는 꽃은 무척 적고, 열매 맺어도 온전히 익는 것은 더욱 적네. 그러나 익은 과일이 전혀 없지도 않지. 친구여! 우리가 그 익은 열매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맛보지도 않은 채 썩혀 버려도 괜찮을까?”
아마 괜찮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성실히 살아서 삶의 열매를 맺고, 애써 얻은 달콤한 열매를 온전히 맛보는 일이야말로 이 가을에 우리가 맛보아야 할 진정한 기쁨일 것이다.
writerJang Eunsu 출판 편집인·문학평론가
editorJo So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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