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에 ‘위그모어 홀Wigmore Hall’ 이라는 콘서트홀이 있다. 실내악을 중심으로 고古음악, 성악 등 소규모 연주회가 주로 열리는 곳이다. 객석이 5백45석으로 규모는 아담하지만 권위는 세계적이다. 1901년 피아니스트 부소니, 바이올리니스트 이자이의 공연으로 문을 연 이래 세계 일급 연주자들의 발길이 1백 년 넘게 이어졌다. 무대는 둥근 천장이 덮고 있어 성당의 지성소 같은 모습인데 홀은 음향이 뛰어나기로도 이름 높다.
이곳에서 지난 1월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런던 데뷔 연주회가 열렸다. 미국에서 열린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압도적 우승을 차지한 지 반년 만이다. 젊은 피아니스트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기 마련이라 많은 이들이 이 무대에 주목했고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는 성숙한 피아니즘으로 런던 무대에 성공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주목할 점은 프로그램 구성이다. 임윤찬은 첫 곡으로 영국 작곡가 존 다울런드의 ‘눈물의 파반(Pavana Lachrymae)’을 선택했고, 이어서 바흐의 ‘신포니아’ BWV 787~801, 베토벤의 ‘바가텔’ Op.33과 ‘에로이카 변주곡’ Op.35를 연주했다. 이 구성이 각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기교적으로 고난도 곡이 없다는 것이다. 콩쿠르에서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 등 명인기가 필요한 곡을 완벽하게 연주해 강한 인상을 남겼던 임윤찬은 런던 무대에서는 시종 차분한 연주를 펼쳤다. 그것은 콩쿠르의 굴레에서 벗어난 피아니스트가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무대를 꾸민 것으로 보였다.
연주곡 중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존 다울런드의 ‘눈물의 파반’이었다. 임윤찬은 (다울런드의 성악곡을 건반 음악으로 편곡한) 윌리엄 버드가 영국의 위대한 음악가이기 때문에 그 곡을 선택했다고 말했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은 음악을 선곡했을 리 없다. 마치 중세의 류트 연주자처럼, 음유시인이 시를 읊듯 피아노 건반을 짚어나가는 모습은 영국인이 좋아할 만했고 동시에 임윤찬답기도 했다.
존 다울런드John Dowland(1563~1626)는 르네상스 시대 음악가다. 영국 문화 예술의 황금기였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를 대표하는 류트 가곡 작곡가, 명연주자로 소개된다. 하지만 명성에 비해 그에 대한 정보는 빈약하다. 출생지조차 분명치 않고 어린 시절의 성장 기록도 없다. 17세에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의 시종으로 따라가 프랑스, 독일, 덴마크 등 대륙을 여행하고, 런던으로 돌아와서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류트 음악 연구와 창작으로 학사 학위를 받는다. 1598년부터 6년 동안 덴마크 왕의 류트 연주자로 봉직하는데 이 시기에도 시선은 늘 영국을 향해 런던에서 류트 가곡집을 연달아 발표한다. 이 가곡집들은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게 된다. 1600년에 발표한 류트 가곡집 2권에 수록된 ‘흘러라 나의 눈물이여(Flow My Tears)’는 특히 대박을 터뜨렸다. 이 류트 반주 성악곡을 동시대의 선배 음악가 윌리엄 버드가 건반 음악으로 편곡했다. 4백 년 뒤 임윤찬이 런던에서 연주한 바로 그 곡이다.
나는 임윤찬의 위그모어 홀 연주를 영상으로 본 뒤 르네상스 음악에 새삼스레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눈물의 파반’ 원곡인 ‘흘러라 나의 눈물이여’를 두루 찾아서 들어보았다. 영국의 전설적 카운터 테너 앨프리드 델러부터 영국 록 스타 스팅의 노래까지. 도대체 무엇이 전 유럽적인 인기를 불러 모았는가. 선율이 아름답고 독립적인 류트도 매력적이었다. 가곡의 왕 슈베르트의 선배로 손색이 없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가사 내용이었다. 모두 5연으로 이루어졌는데 1연이 이렇다. “흘러라 내 눈물, 너의 샘에서 떨어져라./ 영원히 유배된 나로 하여 애통하게 하라./ 밤의 검은 새가 추악한 울음을 우는 곳./ 거기서 나로 하여 외로이 살게 하라.” 이어지는 어휘도 절망, 한숨, 신음, 두려움, 고통 같은 것들이다. 임윤찬이 잘 조율된 위그모어 홀 피아노로 천천히 두드리던 건반 아래 이런 정서가 숨어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슬픔은 성숙한 감정이었고 수준 높은 사람의 전유물이었다고 한다. 낭만 시대 슈베르트도 “슬픔 속에서 만들어진 음악이 세상을 즐겁게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생각해보면 내가 2악장, 즉 느린 악장에 끌리는 것도 슬픔, 침잠, 회고적 정서와 친하기 때문이리라. 다만 임윤찬이 늘 생각한다는 가야금 명인 우륵의 ‘애이불비哀而不悲’를 염두에 두는 것이 좋겠다. 슬픔에 탐닉하는 것은 곤란하니까.
writerChoi Jeongdong 기행 작가·칼럼니스트
intern editorJung Na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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