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취향은 무엇인가요?
김종진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 돈을 쓴다.
현대사회는 새롭게 재편 중이다. 인간이 노동의 많은 부분을 AI와 시스템에 양도하고 개인의 삶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새로운 숙제가 주어졌다. 바로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워라밸과 자아를 동시에 찾는 젊은이부터 삶 속의 여유 있는 배움을 갈망하는 중・장년까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나만의 취향에 몰두하는 시대가 열렸다. 빅데이터 전문가이자 <시대예보>의 저자 송길영 작가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계속 열중해서 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진짜 내 취향, 내 취미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트렌드에 편승한 인증샷용 체험은 진정한 경험이자 취향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뮤지션 김종진은 일찌감치 시대 과제를 완성한 사람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걸로 호사를 즐기면 항상 부족함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내가 포르쉐를 샀는데 다른 누군가가 페라리를 타고 지나간다면 갑자기 내가 초라해 보이죠. 그러면 그때부터 이건 돈의 문제지 차의 문제가 아닌 거예요. 하지만 이때 흔한 중형 세단이 엄청난 운전 실력으로 이 두 차를 앞질러 나간다면, 그 사람이 진정한 승자예요. 결국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 돈을 쓰는 게 최고의 행복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의 삶에 스민 철학과 취향을 내밀히 알려주는 말이다.
본인만의 확고한 취미가 있는 사람은 몰입하고 탐구하는 과정에서 깊어진 조예가 외모, 말투, 행동, 분위기에 짙게 묻어나기 마련이다. 뮤지션 김종진에게 남다른 개성과 오라가 느껴지는 것도 같은 이유다. 아티스트이기 이전에 스스로를 관찰하고,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고, 다양한 시도를 거치며 취향을 찾는 데 열심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현재 만년필을 모으고, 손글씨를 쓰고, 빈티지 악기와 오디오를 좋아하며, 와인을 탐구한다.
Q 언제부터 수집이 시작되었나요?
A 처음 만년필을 수집하게 된 건 ‘어렸을 적에 못 가져본 것’에 대한 열망 때문이에요. 제 학창 시절엔 중학교 올라갈 때 구두와 만년필을 선물하는 문화가 있었어요. 열심히 학교 다니라고 구두,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만년필이었죠. 그런데 공부 잘하는 애들은 좋은 파카 만년필을 받는데 저는 저렴한 파일로트 만년필을 받은 거죠. 크기도 짧아서 뚜껑을 펜 뒤에 꽂아야만 쓸 수 있는 거였죠. 그 펜이 얼마나 비루하고 초라해 보였던지…. 그 펜으로 노트에 ‘미워! 싫어!’를 반복해서 쓰다가 펜촉을 확 꺾어버리고는 기와집 지붕 위쪽으로 홱 던져버렸어요. 그게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됐고, 그 이후 전 세계 호텔에 있는 볼펜을 수집하는 특이한 취미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 보니 모아온 볼펜이 세 통이나 있더라고요. 내가 왜 이 렇게 펜에 집착할까 생각해봤는데, 옛 기억이 떠오르는 거예요. 내가 그때 제대 로 된 만년필을 받아보지 못해서, 그게 상처가 돼서 이렇게 펜을 집어 오는구나, 그렇다면 만년필을 한번 제대로 써보자, 생각한 게 시작이죠.
Q 그때 처음 산 만년필이 뭔가요.
A 펠리칸 M400입니다. 1950년대에 처음 나온 모델인데, 아직까지도 모양이 변 하지 않은 채 발매되고 있고, 오히려 요즘 인기가 더 좋아요.
Q 만년필을 고르는 특별한 기준이 있을까요.
A 요새는 만년필 셀렉이 ‘자기 주인공의 시대’를 대변한다고 봐요. 예전엔 유명한 만년필 애호가가 구입한 것을 따라 하기에 급급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다들 직접 펜을 사서 우선 써보고, 조금 쓰다가 질리거나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중고 거래로 팔죠. 그런 과정을 통해 나에게 맞는 것을 찾는게 당연한 일이 되었어요. 요새는 만년필과 더불어 사용하는 종이, 잉크까지도 다양하게 탐구하고 수집합니다. 그야말로 내가 주인공인 취향의 시대가 온 거죠.
사운드 퀄리티에 대한 그의 고집은 남다르다. 그간 CD, LP로 음악을 소장하고 즐겨주는 팬들을 위한 의리와 음질 퀄리티에 대한 자존심으로 온라인 음원은 만들지 않았을 정도다. 최근에야 그래미 수상자이기도 한 세계적인 프로듀서 버니 그런드만Bernie Grundman과 6개월간 리마스터링 작업을 해 정규 앨범 1장, 라이브 앨범 1장을 선보였다. 처음 발매했을 때의 원본 LP를 기반으로 하나하나 다듬어 만들었다고 했다. 휴대폰, 컴퓨터로 스트리밍해 음악을 듣는 요즘엔 전문 뮤지션이나 음악 애호가가 아니라면 차이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의미 없는 수고로운 노력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봄여름가을겨울의 음악, 그리고 김종진이라는 뮤지션이 가지는 존재감의 핵심이다.
Q 음악적 퀄리티에 대한 고집은 데뷔 초부터 유명했습니다. 지난해엔 돌비 애트 모스 믹스를 발매하셨고요.
A 과거 모노로 음악을 듣던 시대에 초창기 스테레오 기술은 외면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세계적인 지휘자 카라얀이 스테레오로 새롭게 녹음한 음반을 30개 정도 연속으로 발표한 것을 계기로 전 세계 표준이 됐죠. 돌비 애트모스도 마찬가지예요. 앨범을 만들 당시엔 거의 활성화되지 않은 기술이었지만, 우리를 시작으로 또 새로운 기준이 되지 않겠나 하는 마음으로 시도했죠.
Q 퀄리티 있는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은 어디인가요? 한때 재즈킷사의 매력 을 더욱 깊이 느끼고자 직접 방문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A 음악은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의 ‘재즈킷사’, 이른바 재즈 카페도 좋아해요. 미국 재즈바가 1980년대 즈음 일본에 정착되며 고유의 형태로 변화한 건데요, 일본 방방곡곡에 저마다 개성이 살아 있는 재즈킷사 들이 있습니다. 이 재즈킷사 주인들이 대부분 음악 애호가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애장품 스테레오를 가져다 놓고 재즈를 들어요. 큰 음향, 좋은 조명에 기대지 않고도 생생한 음악을 느낄 수 있죠. 이런 문화가 너무 좋아서 일본 재즈킷사 잡지를 참고해 ‘저만의 재즈킷사 지도’도 만들어두었습니다.
재즈를 사랑하는 뮤지션 김종진이 직접 경험하고 말하는 커피와 재즈, 재즈킷사의 매력.
김종진이 엄선한 재즈킷사 리스트.
Photo by김네오 © & ⓟ 봄여름가을겨울엔터테인먼트
1980년 5월 개점 이래 44년간 가게의 모토 ‘하나 하나 정성을 다해’를 철칙처럼 지키는 집.
그래서 이 공간에서 보내는 1분 1초의 순간이 헛되지 않다.
커피 제조 경력 52년 이상의 마스터가 커피를 직접 내린다.
모리 오가이의 소설 〈다카세부네〉로 유명해진 곳.
히가시야마 산맥의 멋진 경치를 보여주는 전망이 압권이다.
옛 홍등가 건물을 현대식 서양 주택으로 바꾼 디자인도 인상적이다.
관객과 음악의 장벽을 허물듯이 이곳을 방문하는 누구에게나 캐주얼한 무드로 재즈의 매력을 전한다.
주인장이 직접 꾸민 인테리어가 인상적. 핫도그를 한입 베어 먹으면서 쌀쌀한 추위를 감싸주는 재즈를 감상해보자.
1967년 오픈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품격 있는 플레이리스트를 선보인다.
중년이 되어서도 지속적으로 이곳을 방문하는 단골들이 변치 않는 퀄리티를 입증한다.
오전 7시 30분에 열어 낮 1시 30분에 닫으니 참고하자.
아담한 규모 속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재즈 카페.
대표 메뉴이자 독특한 풍미를 자랑하는 나폴리 스파게티를 비롯해 카레와 커피, 케이크까지 다양한 메뉴를 갖추고 있다.
입과 귀가 모두 즐거운 공간이다.
최고의 음악적 경험을 전달하고자 하는 뮤지션 김종진. 그가 사 용하는 ‘무기’는 의외로 빈티지다. 그의 어깨에는 늘 세계적 기 타리스트 하이럼 블럭이 오랫동안 사용하던 기타가 메여 있었 다. 하이럼이 약물중독 때문에 기타를 헐값에 내놓았단 소식을 듣고 보스턴에서 뉴욕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구입했다.
Q 하이럼 블럭 기타가 특별한 이유는요.
A 기타리스트는 보통 기타를 여러 번 바꿉니다. 악기에 대한 애정이 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하죠. 하지만 하이럼은 평생 한 기타만을 사용했어요. 그 시절 그 성분, 그 재료로 만든 악기만 이 자기 음악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래요. 1929년 독일에서 생산된 케이블을 쓰고, 1958년에 생산된 딜럭스라는 앰프를 사용하죠.
Q 그런 빈티지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까요.
A 마영범 형한테 배운 거예요. (사진가 故 김중만, 인테리어 디자이너 故 마영범은 가까이서 그에게 많은 영감과 자극을 주던 존재였다.) 영범이형 사무실에 놀러 간적이 있는데, 낡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어요. 한번 앉아보라고 하더라고요. 편안하고 느낌이 좋아 ‘플리마켓에서 사왔냐’고 물으니 유럽에서 수천만 원 주고 사온 오리지널 빈티지래요. 형은 “인테리어가 직업이 아닌 사람들도 알 수 있는 이 의자의 편안함을 스스로 체화한 다음,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몇만 원짜리 의자를 만드는 게 나의 일”이라고 했죠. 그 말이 정말 큰 깨달음을 주었어요.
Q 전문가의 사명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A 네, 어떻게 보면 ‘시간 여행자’라고 생각해요. 옛날에 만들어진 좋은 사운드의 음악을 들을 때 마치 그 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참 많은 영감을 받아요. 누군가는 이렇게 시간 여행자가 되어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 놓치고 있는 것들을 간직하고 찾아갈 수 있게 해줄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는 소문난 와인 애호가다. 2001년, 한 친구가 포도로 만든 술이 음악을 들을 때 정말 잘 어울린다고 권하길래 처음 마셔본 게 시작이었다. 음악에 더 잘 몰입하 기 위해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기에 그는 평소 와인을 주로 집에서 마신다. 스튜디오급의 1950년대 빈티지 스튜디오 스피커와 앰프를 마련해두어서다. 세대 간 소음 영향을 덜 받기 위해 복도 끝 코너 집으로 이사까지 갔다. 그런 그가 와인과 음악을 접목해 선보인 것이 바로 ‘봄여름가을겨울의 와인 콘서트’였다.
A 와인 콘서트 전까지 저희는 항상 큰 공연만 했어요. 소규모 클럽보다는 1만 명 이상 규모의 큰 공연장이 저희의 목표이자 뮤지션으로서의 어떤 도달점이었죠. 큰 공연장에서의 콘서트를 섭렵한 이후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故 전태관 씨(봄여름가을겨울의 드러머)와 이야기하며 아이디어를 나누던 중 Back to Basic, 처음으로 한번 돌아가보자는 말이 나온 게 계기였죠.
Q 클럽 공연이 와인 콘서트가 된 계기는요.
A 당시엔 와인 문화가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우연히 프랑스 대사관에서 홍보하는 보졸레 누보 와인을 알게 되었어요.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에 전 세계에서 동시 출시되는 보졸레 누보는 그해 처음 수확한 포도로 만든 햇와인인데, 숙성을 거치는 다른 와인과는 달리 갓 만들어 마실 때가 가장 맛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점점 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혜성 같은 와인’, 순간을 즐기는 ‘카르페 디엠’ 같은 별명이 있죠. 이걸 콘서트에 접목해보자 싶었습니다.
Q 지금 이 순간에만 할 수 있는 경험을 담는다는 취지인가요.
A 우리 삶이 그렇잖아요. 이 순간을 즐기지 않으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고. 이 와인과 함께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즐길 수 있는 콘서트인 거죠. 나아가 일본의 재즈킷사처럼 어른들이 한껏 향유할 수 있는 ‘어덜트 컨템퍼러리’ 문화를 만들 어보고 싶었습니다.
Q 준비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A 간혹 와인을 마시며 공연을 하기에 자칫하면 연주를 틀리기 십상이에요. 공연 실황을 녹음해서 앨범도 내기로 했는데 취기로 실수를 더하면 그게 무슨 망신인가 싶어 멋지게 연주할 수 있도록 정말 열심히 연습했어요. 고품질 음향이나 조명 없이도, 공연장 안에 아무런 장비의 도움이 없다 해도 관객을 사로잡을 음악적 실력을 쌓기 위한 우리만의 의식을 계속하고 있었던 거죠.
김종진의영감을느낄수있는 일상을 들여다보았다.
사계를 함께하는 소장품
© Spotify, 웅진지식하우스
故 김중만 작가의 포트레이트
재즈의 미묘한 선율을 닮은 향
특별한 한 잔을 위한 음악
시간을 함께하는 와인
요즘 읽고 있는 책
기록을 위한 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