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의 사랑과 대지의 헌신
어떤 삶도 그 자체로 완성되지 않는다. 행복한 가정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뼈저린 아픔과 쓰디쓴 고통을 견디고 뜨거운 갈등과 가슴 시린 분란을 이기면서 나날이 노력할 때 이룰 수 있다.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 장편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왜 행복의 모습은 모두 비슷한데, 불행의 모습은 제각각일까? 톨스토이는 1천7백 쪽에 달하는 긴 이야기를 통해 이 질문에 답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부부는 세 쌍, 아니 네 쌍이다.
스티바와 돌리, 안나와 카레닌, 레빈과 키티는 정식으로 결혼한 부부이고, 안나와 브론스키는 불륜 관계 또는 비합법 부부다. 스티바와 안나는 남매, 돌리와 키티는 자매, 스티바와 레빈은 친구다. 톨스토이는 이들의 뒤얽힌 관계를 통해 가족 행복론을 탐구한다. 각자 자유로우면서도 서로를 돌볼 줄 아는 가족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속물적인, 너무나 속물적인
작품은 스티바가 가정교사와 바람피운 사실을 돌리가 알아채면서 시작된다. 놀랍게도 스티바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내는 나이 들어 더 이상 매력이 없는 데다 아이들만 신경 쓰면서 잔소리만 하므로, 자신이 젊고 매력적인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건 당연하다고 여긴다. 물론 체면상 아내랑 이혼할 마음은 전혀 없기에, 아내 마음을 돌리기 위해 동생 안나 카레니나에게 도움을 청한다. 뻔뻔한 속물이다.
돌리는 무척 화가 났으나 남편과 헤어질 마음은 역시 없다. 무엇보다 다섯 아이의 장래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남편과 헤어지면 공작부인으로서 누리는 화려한 사교계 생활도 끝이다. 결국 그녀는 아이들을 생각하라는 안나의 설득을 받아들여 가정생활을 유지하기로 한다.
둘은 우리 시대에 만연한 속물 가정의 전형이다. 서로에게 더는육체적·정신적으로 끌리지 않으나, 아이를 빌미 삼아 또는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협력을 이유로 시들하고 무덤덤한 부부 관계를 이어간다. 이들에게 바람은 중요하지 않다. 애정보다 정략이 가족 구성의 기본 조건인 까닭이다. 이들의 결혼 생활은 흔하게 행복하다.
신은 나를 사랑하며 살도록 만들었어
불꽃같은 사랑이 가족 중심에 놓이면 괜찮을까?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가 그 답이다. 안나는 우연히 기차역에서 잘생긴 미남 장교 브론스키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존재에서 생기가 넘쳐흘러 의지와 상관없이 반짝이는 눈빛과 미소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일부러 눈 속의 빛을 꺼버렸지만, 그 빛은 그녀의 의지에 반해 희미한 미소로 반짝였다.”
안나는 넘치는 생기, 들끓는 정열을 도무지 억누를 수 없다. 브론스키도 마찬가지다. 남편 카레닌과의 무미건조한 결혼 생활은 위기를 맞고, 금지된 이 사랑은 두 사람의 삶을, 특히 안나의 인간관계와 사회적 평판을 송두리째 파괴한다. 그러나 속물 오빠와 달리 사랑을 삶의 전부로 여기는 안나는 말한다. “난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어. 난 살아 있는 여자야. 하느님은 날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여자로 만들었어.”
둘의 사랑에 카레닌은 동요한다. 자수성가한 능력남으로 출세와 명예에 집착하는 카레닌은 안나에게 질투와 분노를 느끼기보다 자기 인생 경력에 아무 흠집도 나지 않게 두 사람 관계를 모르는 체한다. 그러나 복수심에 사로잡혀 이렇게 말한다. “난 결코 불행해질 수 없어. 하지만 그녀도, 그도 행복해져서는 안 돼.” 안나는 합법적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나, 남편은 안나가 죽을 때까지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안나가 절대 행복에 이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안나와 카레닌의 뒤틀린 관계는 독특하게 불행하다.
쏟아지는 비난과 냉대에도 안나와 브론스키는 사랑의 힘만으로 꿋꿋이 버텨나간다. 심지어 안나가 목숨처럼 아끼던 아들도, 브론스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도 안나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불안한 그녀는 브론스키의 사랑을 갈구하고 확인하며, 그 관심이 다른 데로 향하지 않도록 자신을 꾸미는 데만 몰두한다. 그러나 안나가 사랑하는 주체적 존재에서 사랑받는 의존적 존재로 변할수록 브론스키의 마음엔 점차 틈이 생겨난다. 모든 명예를 잃은 안나에겐 사랑뿐이었으나, 브론스키에겐 사랑 말고 출세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부도덕한 사랑에 빠진 여성은 아무리 애써도 명예를 회복할 길이 없으나, 남성은 약간의 계기만 있어도 언제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서서히 무너지던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내 안나의 복수,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브론스키의 마음을 되돌려놓겠다는 파멸적 결과로 이어진다. 오직 사랑만을 좇던, 부도덕하나 생생했던 이들의 정열적 관계는 독특하게 불행하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데다 가족의 삶이란 내 사랑의 실현, 그 한 가지 색으로만 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상의 환멸과 매력
레빈과 키티는 이 작품에서 가장 이상적인 가족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실패에서 시작한다. 레빈은 브론스키에게 뒤처져 키티를 넘겨준 상처가 있고, 키티는 안나에게 밀려 브론스키를 뺏긴 경험이 있다. 그러나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고, 절망을 희망으로 변화시키는 데 삶의 위대함이 있다. 사랑의 좌절은 두 사람을 인생의 본질에 대한 사유와 성찰로 이끈다. 레빈은 말한다. “내가 행복하다면, 아마도 그건 내가 자신에게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자신에게 없는 것에 한탄하지 않기 때문일 거야.”
좋은 삶이란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나한테 없는 걸 바라지 않는 데서 온다. 더 나아가 아름다운 삶은 나보다 타자를 더 많이 사랑할 때 가능하다. “키티는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평온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 연인에 대한 헌신과 배려는 행복한 결혼 생활의 핵심이다. 이를 받아들일 때 사랑의 환상에서 비롯된 낭만적 기대에 실망하거나, 일상의 권태와 환멸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레빈이 결혼한 지도 석 달이 지났다. 그는 행복했지만, 그 행복은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는 걸음걸음마다 예전의 공상에 대한 환멸과 예기치 못한 새로운 매력을 발견했다. … (행복한 삶을 이루려면) 보고만 있을 때는 쉬울 것 같지만 그것을 직접 해보면 무척 즐겁기는 해도 굉장히 힘들다는 점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다.”
어떤 삶도 그 자체로 완성되지 않는다. 행복한 가정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뼈저린 아픔과 쓰디쓴 고통을 견디고 뜨거운 갈등과 가슴 시린 분란을 이기면서 나날이 노력할 때 간신히 이룰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삶 이외에 다른 삶은 존재하지 않음을 받아들이고, 이를 더 나은 것으로 조금씩 고쳐가는 게 중요하다.
순간에 의미를 불어넣을 힘
“레빈과 키티의 생활은 남들의 결혼 생활과 다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가 예전에 그토록 경멸해마지않던, 하지만 이제는 그의 의지에 반해 대단히 확고한 중요성을 띠게 된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소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보잘것없이 사소한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여행자처럼 항상 화려하고 생기 넘치며 스펙터클한 순간을 갈망하고 일상의 반복적 삶을 죽음으로 생각하는 안나와 달리, 레빈은 무도회와 사교 모임의 화려함을 거부하고, 끝없이 환멸에 시달리면서도 시시하고 평범한 일상을 행복의 샘물로 만들어간다.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그 모든 일에 상관없이, 이제 나의 삶은, 나의 모든 삶은, 삶의 매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의 명백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나에게는 그것을 삶의 매 순간 속에 불어넣을 힘이 있어.
행복한 가정은 안나처럼 화려하지도, 스티바처럼 지루하지도, 카레닌처럼 무감각하지도 않다. 부부가 서로를 돌보고 배려하면서 비루하고 시시하고 불완전한 일상의 순간순간에 의미를 불어넣을 힘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서로에게 충실하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는 레빈과 키티의 경건한 일상은 흔하고 또 드문 행복의 전형이다.
writerJang Eunsu 출판 편집인·문학평론가
editorJo So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