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신의 선물, 휴식
삶의 방향이 거꾸로 서면 절대 행복할 수 없다. 인간은 쉬려고 일해야지 일하려고 쉬어선 안 된다.
왜 살아야 하는지 질문하고, 그 답을 살면서 실현해갈 수 없다면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생의 이중주
노동과 휴식은 우리 인생의 이중주다. 생명을 이어가고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을 하고, 휴식과 놀이로 몸과 마음을 북돋는 일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히브리 사람들은 전능한 신조차 주어진 임무를 다하면 일에서 손을 떼고 쉰다고 생각했다. “신은 엿샛날까지 하던 일을 다 마치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었다.”(‘창세기’ 2장 2절)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일과 노동을 삶의 중심으로 착각한다. 먹고사는 일, 즉 생존이 다른 모든 일에 앞선다고 여긴다. 그러나 한낱 벌레조차 자기 보존을 위해 분투한다. 프란츠 카프카가 <변신>에서 보여주었듯, 노동에 매몰된 삶은 인간을 벌레로 변화시킬 뿐이다. 휴일에도 출장 계획을 짜느라 분주했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로 변해 비참하게 죽어갔다. 노동만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이룩하기 어렵다. 인간에겐 생존을 넘어선 위대함이 필요하다.
니체는 말했다. “현대의 소란스럽고 시간을 독점하는 부지런함과 어리석게도 이를 자랑 삼는 태도가 ‘신앙 없는 자’를 낳는다.” 바쁘게만 살아선 자기 영혼을 돌볼 틈조차 잃는다는 뜻이다. 노동에 인생을 모조리 빼앗긴 사람들은 신중히 자기를 알아가는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따질 여유를 잃는 까닭이다. 노동으로 가득 채운 삶은 인간을 생각 없는 가축, 자유 없는 노예로 만든다. 월화수목금금금은 인간을 파괴한다. 졸음과 피로, 짜증과 산만함, 무기력과 우울증 등을 불러일으킨다. 휴식 없는 나날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제대로 쉴 줄 아는 능력
일이 아니라 쉼에 무게중심을 둘 때 우리 삶은 온전해진다. 이 때문에 신은 쉬는 날을 거룩하고 복되다고 했다.(‘창세기’ 2장 3절) 충분히 쉬면서 가쁜 숨을 돌리고 지친 몸을 달래면서 자기 영혼을 살피는 시간 없이 인간은 행복에 이를 수 없다. 제대로 쉴 줄 아는 능력은 일을 잘하는 힘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단지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넘어서는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다. 왜 살아야 하는지 질문하고, 살면서 그 답을 실현해갈 수 없다면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 거룩한 쉼이 있는 이유는 자기를 돌아보며 의미를 찾아내고, 영혼을 정화해서 거룩하게 하는 데 있다.
현대인의 문제는 어디에서,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잘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 휴식은 단지 노동 없는 시간(rest)이나 법으로 보장된 자유 시간(licere)이 아니다. 자유 없이는 쉴 수 없지만, 자유가 주어진다고 해서 모두 잘 쉬는 건 아니다. 소파에 빈둥거리면서 누워 있거나 멍하니 시간을 흘려버리거나 내용 없는 수다로 하릴없이 지냈다면, 이는 쉬어도 쉰 게 아니다.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거나 휴양지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단지 삶의 고통을 줄이고 망각하며 정신적·신체적 에너지를 충전하려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쉰다고 할 수 없다.
로마인은 노동에서 놓여난 시간에 영적 고결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르면, 휴식은 영혼을 더 나은 상태로 끌어올리는 고양 행위, 즉 기쁨의 체험에 가깝다. 우리가 어떤 행위에서 기쁨과 즐거움, 만족과 해방감을 느낄 때 우리 영혼은 제대로 쉰다고 느낀다.
행복의 뿌리 체험
노동이 가져온 고통은 잊거나 줄이려 하면 안으로 곪아간다. 상처를 치유하려면 이를 기쁨으로 대체해야 한다. 삶은 능동태일때만 제대로 굴러가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휴식 체험이 그 자체로 기쁨을 가져오고 우리 자신의 근원 생기를 늘려주는 것을 오티움otium이라고 불렀다.
오티움은 영혼을 고양하기 위해 번잡한 일상을 벗어나 조용한 곳에서 평정한 마음으로 지내거나 독서, 작문, 철학, 예술 등 고도의 지적 수련에 몰입하는 일이다. 이런 활동은 헛헛한 영혼의 구멍을 메우고 뒤틀린 삶의 서사를 고쳐 써서 우리 자신을 진짜 자아와 대면하도록 이끈다. 오티움은 행복의 뿌리 체험이다.
한마디로 휴식이란 우리 영혼에 기쁨을 가져다주는 심층 차원에 대한 체험, 즉 진정한 나와의 만남이다. 고장 난 나를 고쳐주고, 미숙한 나를 성숙시키는 이런 깊은 만남이 있다면, 명상이나 독서 같은 정적인 활동뿐 아니라 달리기나 춤이나 필라테스 같은 격렬한 신체 활동도 오티움이 될 수 있다. 자기 성찰과 자기 배려가 휴식의 본질인 셈이다.
휴식을 위한 공간
카프카는 휴식에 공간적 고립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는 “자기 집이 있다는 건 세상에 대해 문을 닫아걸 수 있다는 말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겐 침실 하나, 부엌 하나, 다락방 하나로 이루어진 작은 집이 있었다. 프라하 중심가에서 동떨어진 골목길에 있는 이 외딴집에서 그는 아버지 눈을 피해 고독하게 글을 썼다. 문학은 그의 도피처였고, 탈출구였으며, 유일한 휴양지였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외적 세계를 내밀한 체험으로 고쳐 쓸 공간을 확보했다. 친구에게 빌린 도끼 한 자루로 월든 숲속에 직접 지은 오두막이었다. “집이란 세데스sedes, 즉 ‘앉아서 쉴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시골에 앉아 쉬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나는 오두막 앞 땅을 경작하지 않고 그대로 묵혀두었다. 사람은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는 것이 많을수록 더 부유하기 때문이다.”
물질로 가득한 공간보다 호젓한 숲속 오두막이 우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빈 것이 가득 찬 것보다 상상력을 더 자유롭게 풀어놓기 때문이다. 잘 꾸민 화려한 리조트보다 소박한 숲속 자연이 나에게 더 집중하게 만든다. 고층 빌딩은 우리를 억압하나 숲속 오두막은 우리를 휴식하게 한다.
여기도 사랑과 삶이 있다
‘취리히 호수 위에서’에서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휴식의 진짜 의미를 환기한다. “그리고 신선한 양분과 새로운 피를 / 난 자유로운 세계로부터 빨아들인다.”
1775년 취리히 호수에 배를 띄운 시인은 흔들리는 물결의 리듬에 맞춰 몽상하면서 마음에 풍경을 데려온다. 당시 괴테는 약혼자 릴리와 깨어질 듯 불안한 관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엄청난 성공이 가져온 주변의 질시로 무척 피로한 상태였다. 부드러운 아침 안개가 사방을 감싸고, 햇빛이 푸른 물결 위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가운데 시인은 노래한다. “여기에도 사랑과 삶이 있다”고.
이것이 휴식이다. 휴식은 자유를 빨아들여 신선한 양분과 새운 피를 공급함으로써 일상에서 길을 잃고 혼란에 빠진 마음을 다독여 질서와 조화를 이룩하는 시간이다. 웅대한 자연에 안겨 안식하면서 괴테는 이별의 어둠에서 사랑의 촛불을, 죽음의 늪에서 삶의 오솔길을 찾아낸다. 괴테는 말한다. “숭고함은 영혼에 아름다운 휴식을 준다. 숭고함과 만남으로써 휴식은 완전히 채워지고, 그 자체가 위대해진다.” 휴식의 본질은 숭고함의 체험이다.
높은 산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볼 때, 가없는 바다를 바라볼 때, 광막한 숲을 마주할 때 우리는 숭고함을 느낀다.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이고, 세상엔 나보다 신비하고 위대한 무엇이 있음을 선연히 깨닫는다. 자아가 먼지처럼 소멸할 듯한 이 아찔한 경험에서 우리는 일상의 자잘한 문제에 얽매이는 마음이 얼마나 시시하고 하찮은지 알게 된다. 자연엔 우리를 혼란에서 건져내고 번뇌에서 놓여나게 하는 힘이 있다.
휴식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신의 선물이다. 헤르만 헤세는 노래했다. “놀이도 순진무구함도 필요하고 / 꽃들도 흐드러지게 피어야지 /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작을지 몰라 / 그리고 사는 낙도 없겠지.” 흐드러진 꽃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삶을 즐길 수 있다. 넉넉히 휴식하고, 충분히 인생을 돌아보며, 자유롭게 앞날을 꾸밀 때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삶은 일을 중심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writerJang Eunsu 출판 편집인·문학평론가
editorJo Sohee
Intern editorKim Jung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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