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NAISSANCE FAIRYTALE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로베르토 카발리Roberto Cavalli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알려진 에바 카발리Eva Cavalli. 그의 일상은 르네상스 시대 귀족의 삶을 꿈꾸게 한다.
봄을 기다리는 정원 풍경과도 같은 현관 복도. 고대 조각상, 트롱프뢰유 스타일 벽화, 앤티크 소품 사이 반려동물들이 손님을 맞이한다.
에바 카발리Eva Cavalli의 삶에서 도시 피렌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굳건한 애착을 갖게 된 피렌체와의 인연은 에바 카발리의 20대에서 시작한다. 40여 년 전, 미스 오스트리아로 미스 유니버스에 출전했고, 당시 심사 위원으로 참석한 이탈리아 유명 디자이너 로베르토 카발리Roberto Cavalli를 만났다. 그들은 보자마자 운명처럼 끌렸다. 사랑을 따라 로베르토 카발리의 고향 이탈리아 피렌체로 갔고, 세 아이 라켈레Rachele, 다니엘레Daniele, 로베르트Robert를 낳고 기르며 아늑한 가정을 꾸렸다. 그녀의 등장은 로베르토 카발리의 브랜드에도 영향을 끼쳤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약하며 동식물 패턴을 과감하게 적용했고, 풍성한 색채를 강조했다. 미니멀리즘이 패션계를 뒤흔들던 시기, 청바지에 프린트를 찍은 패션 라인 저스트 카발리를 론칭하면서 새로운 부흥기를 이끌어냈고, 셀러브리티뿐만 아니라 아티스트, 포토그래퍼, 설치미술가 등 순수 예술가를 브랜드 캠페인에 등장시켰다. 그녀는 누구보다 탄탄한 예술적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녀의 허물없는 인간미에 매료되었다. 대담한 장식품과 패브릭으로 집 전체를 휘감고, 17세기와 21세기 예술 작품을 믹스 매치하는 그녀의 인테리어 감각은 남달랐다. 홈 파티를 열 때마다 획기적인 테이블 세팅을 보여주었고, 대중은 그녀가 고르는 인테리어 소품과 연출력에 감탄했다. 로베르토 카발리 홈 컬렉션 확장에 동기를 부여한 셈이다. “무엇보다 이곳 피렌체에 살았던 경험이 큰 영감이 되는 것 같아요. 박제된 것처럼 보이는 이탈리아 여느 도시와 달리 피렌체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고, 형식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열망과 급진적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평범한 산책길에서도 <신곡>을 쓴 단테가 살던집을 지나 우피치 미술관에서 르네상스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나고, 애플 매장을 둘러볼 수 있어요. 매일 눈앞에 펼쳐지는 일상이 특별하죠. 르네상스 기운이 살아 있는 도시라 할 수 있어요.”
피렌체를 떠날 수 없는 이유
에바는 세 자녀가 성장한 후 조용히 지낼 장소를 물색할 때도 피렌체를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2010년 헤어진 남편 로베르토 카발리는 첫째 라켈레와 함께 두바이로 갔지만, 그녀는 피렌체에 남고 싶었다. 천천히 피렌체 중심가를 돌아보았고, 산토 스피리토Santo Spirito 대성당 근처 매물을 찾았다. “18세기 건물이라는 점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레스토랑, 숍 등 현대적인 거리에 위치한다는 점이 좋았어요. 피렌체가 지닌, 시간의 극적 대비가 압축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죠.” 이사를 결정한 후 동네를 둘러본 아들 다니엘레도 집에서 5분 거리에 레스토랑 ‘아틀리에 데 네를리Atelier de’ Nerli’를 오픈해 어머니 근처에서 살기로 결심했다고.
집 내부는 성한 곳을 찾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열악했지만, 먼지를 걷어내면 숨겨진 아름다움이 드러날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가장 마음을 끈 곳은 야외 공간이었다. 15세기 산토 스피리토 대성당이 고스란히 보이는 정원을 보자마자 파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녀는 내부를 손보기에 앞서 정원을 단장하기로 했다. “르네상스 시대 건축에는 정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했어요. 건물과 정원을 따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된 공간이라 여겼습니다. 꽃과 식물, 조각품, 분수 등을 이용해 방과 방을 지나다니는 듯한 공간 내러티브를 부여했고, 정원을 감상하는 행위 자체가 예술적 감성을 고취한다고 생각한 거죠.” 피렌체 르네상스 운동을 본격적으로 이끈 메디치 가문 정원도 특별했다. 세계 각국에서 구한 희귀 식물을 재배했고 과학자, 식물학자, 의학자에게 개방하고 함께 치료법을 연구했다. 그녀는 다양한 식물을 식재하되 가능하면 야생 상태 그대로의 정원을 만들고 싶었다. 실내에서 정원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도 만들었다. 그녀는 약속이 없을 때면 이곳에서 거의 살다시피 한다. 정원사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묻어나는 그녀의 정원은 건물보다 더 가치 있는 공간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로의 회귀
“예전에 살던 공간은 현대적 분위기였어요.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레노베이션을 통해 모던한 느낌을 강하게 풍겼죠. 이번에는 18세기 건물 모습을 되찾는 것을 넘어 피렌체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 르네상스가 태동했던 시점으로 회귀하고 싶었어요.” 14~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예술 부흥 운동 르네상스가 시작된 곳이 바로 피렌체다. 작은 도시지만 15세기쯤 언어, 문학, 과학, 건축,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혁신가들의 지적 무대로 쓰였다. 르네상스 건축물에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건축 기법과 원리를 차용했는데 칼럼, 아치, 돔 등의 형태와 디테일한 외관 장식이 특징이다. 에바 카발리는 공간의 오리지널 느낌을 되살리기 위해 프레스코화, 벽면 석고 장식, 바닥 등을 복원하는 데 힘썼다. 섬세한 우드 몰딩 장식도 허투루 보지 않았다. 천장, 벽, 문 사이사이 손으로 일일이 조각한 것 같은 몰딩 장식을 볼 수 있다. 복원이 불가능한 것은 이탈리아는 물론, 프랑스 곳곳의 앤티크 숍을 돌아다니며 최대한 유사한 것을 찾았다. 바닥은 뜯은 후 비슷한 재료를 찾아 조립해 깔고, 문과 창틀은 보수했다. 현관 복도 벽에는 트롱프뢰유trompe-l’œil 기법을 활용한 벽화를 더했다. 트롱프뢰유는 ‘실물로 착각할 정도로 정밀하고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시간과 비용을 따지자면 시작조차 불가능하겠지만, 집념과 고집으로 건축물 틀이 완성되자 그녀는 독보적 패턴, 직접 구한 앤티크 소품과 그림으로 중세 특유의 고혹적인 분위기를 극적으로 끌어올렸다. 그녀의 스타일링은 로베르토 카발리 컬렉션과 꼭 닮았다. 특히 로베르토 카발리 컬렉션에 사용했던 레오퍼드 패턴 패브릭을 활용한 거실은 미적 감각을 또렷이 드러낼 수 있는 장소. 화려한 패턴과 시대를 넘나드는 각종 재료를 과감하게 믹스 매치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는 인테리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것을 만들 것인가 고민하는 만큼 무엇을 변형하고 함께 둘지 결정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정보가 흘러넘치는 요즘에는 자신만의 큐레이션에 따라 고유한 감각이 중요하니까요. 저는 모든 가구와 사물을 ‘컬렉션’이라 부릅니다. 소품 하나하나 직접 고르고 수선하고 변형한 후 다시 배열한 것이거든요. 나만의 아카이브를 배열하는 방식으로 집 안을 가꾼다면 이렇게 물건을 자유자재로 섞고 배치한다고 해도 조화롭게 느껴집니다.”
예술가를 수집하다
그녀의 집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컬렉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광대한 범위의 수집 목록을 자랑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술 작품이다. 메디치 가문이 예술가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처럼 그녀는 주체적인 시선을 지닌 아티스트를 발견하고 소개하는 데 애쓰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작품이 아닌 예술가를 수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도권 권력이나 트렌드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진실되게 전하는 사람, 길들지 않은 시선과 감각으로 세상에 도전하는 선구자의 흔적을 모으는 것이죠.” 아티스트 엔리코 카스텔라니Enrico Castellani, 에토레 스팔레티Ettore Spalletti 등 1960~1970년대 이탈리아 북부에서 활동한 작가들의 전위예술 운동 아르테 포베라 작가, 아방가르드 운동을 일으킨 제로 그룹 작가 투리 시메티Turi Simeti, 엔리코 카스텔라니Enrico Castellani 등이 좋은 예다. 이들은 예술의 상업화, 물신화,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며 실제 예술이 무엇인지 찾고자 했다. “르네상스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예술가가 있어요. 원근법을 발견하고 실행에 옮긴 사람들이죠. 그들이 신이 아닌 자신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 완전히 바뀐 겁니다. 인간 중심의 철학, 문학, 과학 등이 탄생한 거죠.”
지적 호기심의 아카이브
특이한 수집 목록 중 눈길을 끄는 아이템은 구슬. 유리, 자수정, 크리스털, 석영 등 소재가 다양하다. 보랏빛이 감도는 자수정을 가까이 두면 마음과 신경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저는 사람마다 다른 에너지가 있다고 믿어요. 각자 다른 기운의 흐름을 풀어주는 데 구슬이 도움이 됩니다. 장식 요소이자 영적 오브제로 사용하고 있어요.” 프레스코화 천장과 레드 컬러 벨벳 소파로 채운 미니 거실에 놓여 있는 레드 컬러 구슬은 그녀가 아끼는 것이다. 은하계를 보는 듯한 여러 크기의 구슬이 쌓여 있는데, 이 테이블 위에서는 왠지 모르게 솔직한 대화가 쉽게 오간다고. 앤티크 가구 또한 그녀의 수집품 중 하나다. 가능하면 손을 많이 탄, 그래서 낡고 부서진 것을 선택한다. 표면에 더해진 세월의 더께는 그것을 만든 시대, 용도, 사용자에 대한 힌트를 건넨다. “오래된 가구는 흠이 많을수록 더욱 높은 가격이 형성되는 경우도 있어요. 칠이 벗어지고 나무가 갈라지면서 생겨나는 고색古色의 그윽함 그 자체가 멋이 되니까요.” 오래된 벽난로와 르네상스 시대 회화 작품이 사방을 에워싼 방은 이국적이고 생소한 물건으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이 방을 ‘호기심의 방’이라는 뜻으로 ‘분데르카머wunderkammer’라고 이름 붙였다. 분데르카머는 르네상스 시대에 생겨난 말이다. 귀족들은 세계를 누비며 모은 진귀한 물건을 수납장에 보관하거나 따로 방을 만들어 비밀스럽게 보존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상어 지느러미, 광물, 이집트 조각상, 동전, 메달, 회화, 조각 작품 등 세상에서 가장 별나고 귀한 것들이었다.
writerGye Anna
editorKim Minhyung
photographerFrancesco Dolfo
styling Benedetta Ross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