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어윗의 시선
아이들의 유쾌한 표정, 연인 간의 애틋한 순간, 할리우드 스타들의 화려한 무대, 그 이면에 서린 고독. 엘리엇 어윗은 감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사진은 찰나의 선물처럼 다가온다는 신념 그대로 작업 세계를 일구었다.
본격적 추위가 시작된 지난해 11월 말, 세계적 사진 그룹 ‘매그넘 포토스Magnum Photos’가 익숙한 이름이 담긴 뉴스를 전해왔다.
글의 제목은 ‘엘리엇 어윗Elliott Erwitt(1928~2023)을 기리며’. 엘리엇 어윗은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흑백사진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랑받아온 미국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인물과 풍경을 기하학적 구도로 정확하게 포착함으로써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20세기 중반 사진계에서 엘리엇 어윗은 이성의 냉철한 판단보다는 감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사진은 찰나의 선물처럼 다가온다는 남다른 신념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역사의 크고 작은 순간 속에서 휴머니즘을 포착하는 작품을 선보여왔다. 지난 70년간 그가 보여준 이미지는 아이들의 유쾌한 표정, 연인 간의 애틋한 순간, 할리우드 스타의 고독과 존 F. 케네디의 장례식까지 평범한 일상과 비범한 사건을 망라하지만, 그가 포착한 장면에는 한결같이 인간과 삶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가득 담겨 있다. 그를 추모하는 많은 기사에 ‘유머 감각’, ‘평생의 사랑’, ‘시대를 초월한 매력’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가식 없고 인간미 넘치는 인생을 살아온 작가의 삶과 작품에 대한 경외와 관련 있을 것이다.
92세가 되던 2020년까지 전시회 개최와 작품집 출간 등으로 활발하게 관람객과 만나던 그가 돌연 우리 곁을 떠난 것은 매우 슬픈 일이지만, 작가가 일평생 담아온 소박하고 따뜻한 인류의 기록은 이제 사진 예술 역사에 남아 앞으로도 오랜 기간 많은 관람객에게 감동과 영감을 선사할 것이다.
매그넘 포토스, 기록인 동시에 예술인 사진
매그넘 포토스 대표 크리스티나 데 미델Cristina de Middel은 어윗의 작품이 ‘매그넘의 사명이자 매그넘 DNA 그 자체’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만큼 매그넘과 어윗의 관계는 예술 사진사에서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윗은 1947년 사진 에이전시 매그넘이 창립된 이후 총 76년의 운영 기간 중 70년간 매그넘의 일원으로 활동해왔으며, 그룹 회장까지 역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먼저 매그넘의 역사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겪고 돌아온 사진가들은 다시 눈앞에 놓인 냉전이라는 정치적 분열 속에서 보도사진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에 저명한 전쟁 사진가였던 로버트 카파Robert Capa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과 데이비드 시모어David Seymour, 조지 로저George Rodger와 연합해 1947년 사진 에이전시 매그넘 포토스의 창립을 주도했고, 조직적인 활동을 통해 작가의 개성과 사진의 자율성을 보장받고자 했다. 사건에 대한 객관적 기록의 성격을 띠면서도 작가의 주관성을 강하게 주장한다는 점에서 매그넘의 사진 활동은 기록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선구자적 면모로 사진사의 흐름 속에서 현재까지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엘리엇 어윗이 매그넘에 합류한 것은 1956년, 창립자 로버트 카파의 초대 때문이었다. 이제 막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25세의 젊은 예술가이던 어윗의 삶은 매그넘과의 만남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에이전시를 매개로 삽화 잡지의 황금기를 이끈 <라이프Life>, <콜리어스Collier’s>, <홀리데이Holiday> 등 주요 매체에서 프리랜스 사진작가로 활동했고, 이 시기 마릴린 먼로·그레이스 켈리·존 F. 케네디·체 게바라 등 역사에 길이 남을 굵직한 인물 사진을 남긴다. 이후 정치 뉴스, 상업 사진과 영화, TV에서도 재치 있는 이미지를 선보이며 명실상부 성공한 사진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된다.
Elliott Erwitt, California Kiss, 1956, Gelatin silver print, 40.6×50.8cm
엘리엇 어윗의 삶과 유머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어윗의 작가적 명성이 단순히 당시 매그넘과의 조우에 의해서만 성취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말했듯 매그넘은 같은 사건을 다룰 때도 ‘표준 척도를 두지 않는’ 작업 방식을 추구했다. 즉 피사체 자체를 기록하는 것만큼 대상을 묘사하는 작가의 개성 있는 관점 역시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심각한 정치적 현안을 다룰 때도 다른 작가가 주목하지 않았던 슬픔이나 위트 등 인간적인 순간을 캐치해내고자 했던 엘리엇 어윗의 작업관은 이 기준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었고, 그 때문에 매그넘의 원로로서도, 그리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 예술가로서도 오랜 기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윗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요소인 휴머니즘적 감각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우선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매력적인 유머와 해학의 기원은 이민자로서 다양한 문화와 사람을 접한 작가의 개인적 삶의 궤적과 관련 있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엘리엇 어윗은 잦은 이민으로 어린 시절 여러 나라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는 작가가 다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국제적인 사진작가로 성장할 동력이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매그넘에 입사한 후 뉴욕에 정착하기 이전까지 어윗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파리, 밀라노, LA, 뉴욕 등 여러 국가를 아우르는 전쟁과 냉전이 만들어낸 국제사의 여러 굴곡을 발견할 수 있다. 엘리엇 어윗은 1928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한 유대계 러시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파리에서 반유대주의가 짙어지자 다시 이탈리아로 이주한다. 밀라노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던 어윗은 12세가 되었을 때 파시즘을 피해 또 한 번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다. 청소년기를 할리우드에서 보낸 어윗은 그곳에서 사진에 관한 관심을 키워갔고, LA 시립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배우기까지 청소부와 사진관 아르바이트를 이어가다 1952년 군에 징집되어 독일과 프랑스 부대에서 다양한 촬영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부조리한 세상을 보듬는 시선진
이렇게 보면 세간의 평가처럼 작가의 풍부한 개인적 경험이 작품의 유니크한 감각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굴곡 속에서도 작가가 택한 테마가 고통과 슬픔, 절망 같은 감정이 아니라 유머와 해학, 그리고 사람을 향한 따뜻한 애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 전인 1950년대에 그가 찍은 사진에 등장하는 프랑스(Provence, France, 1955)와 미국(New York City, 1955)을 담은 사진에는 어린이, 남자와 여자, 강아지, 그리고 로맨틱한 풍경과 유쾌한 순간이 자주 등장한다. 인종차별이나 정치적 갈등을 다룰 때도 어윗은 분노보다는 헛웃음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현실을 재구성해 보여준다. 이는 분명 그의 작품이 사랑받는 비결이지만, 한편으로는 의미심장한 대목이기도 하다. 분명 세계는 어느 정도 고통과 슬픔으로 이루어져 있다. 더욱이 작가가 처했던 현실을 떠올리자면 전쟁의 시대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황폐해진 현실, 냉전 상황을 목도해야만 하는 시기였다. 어둡고 절망적인 뉴욕을 담은 당시 예술가들의 심정은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둠 속에서도 거듭 따뜻한 모습을 건져내는 엘리엇 어윗의 시선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사진 비평가 비키 골드버그Vicki Goldberg의 문장이 어쩌면 그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2003년 어윗의 전시를 소개하면서 ‘바나나 껍질 위의 삶: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엘리엇 어윗의 시선’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어윗의 작품은 바나나 껍질을 밟고 미끄러지는 세상이 균형을 맞추려는 움직임과 닮았다는 것. 어윗의 유머가 제공하는 아슬아슬한 찰나의 균형은 우리에게 잠시나마 일상의 고난을 잊게 해주며, 마치 해열제처럼 보는 이들의 아픔을 쓰다듬어준다는 것이다. 현재 프랑스 리옹의 라 쉬크리에르La Sucrie`re 미술관에서는 엘리엇 어윗 회고전이 진행 중이다. 그의 생전에 개최된 마지막 회고전이다. 2024년 3월까지 이어지는 이 전시에서도 인간 내면의 본질과 관계에 주목하는 어윗의 휴머니즘적 감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고통과 슬픔이 세계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면 웃음과 로맨틱한 순간 역시 마찬가지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이번 전시를 관람해 일상의 순간을 불멸의 기록으로 남기는 유머의 온건한 힘을 한껏 만끽하길 바라본다.
ARTIST PROFILE엘리엇 어윗ELLIOTT ERWITT |
writerShin Iyeon독립 기획자
editorKim Minhy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