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정경을 그려보자. 한 30대 남성이 오디오 숍 쇼윈도 앞에 걸음을 멈추고 서 있다. 깔끔하게 넥타이를 매고 서류 가방을 든 비즈니스맨이다. 윈도 안에는 명품 오디오가 즐비하지만 남자는 그것들을 눈여겨보지 않는다. 그는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눈을 반쯤 감고 있다.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다. 오디오 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상가 골목을 낭랑하게 울리고 있다. 오가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멈춰 서서 음악에 빠져든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음악은 슈베르트의 가곡 ‘An die Musik (음악에게)’다. 길지 않은 노래는 곧 끝난다. 한순간이라도 놓칠세라 눈을 감고 음악을 듣던 남자는 아쉬운 듯 천천히 고개를 든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이윽고 결심한 듯 오디오 숍 출입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주인장에게 말한다. “저, 죄송한데요, 방금 나온 그 노래 한 번만 더 들려주시면 안 될까요?” 주인장은 뜻밖이라는 눈으로 잠시 남자를 보았으나 이내 “당연히 들려드려야죠” 하며 LP에 바늘을 올린다. “Du holde Kunst, in wieviel grauen Stunden…(너 사랑스러운 예술이여, 그 많은 우울한 시간에…).” 가수는 소프라노 엘리 아멜링이다. 남자는 다시 음악에 집중하고 주인장은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때는 1990년대 어느 겨울날의 해 질 무렵, 장소는 아직 오디오 상가가 꽤 남아 있던 서울 도심의 세운상가였다. 남자는 나의 친구 S다. 그가 언젠가 이 이야기를 들려준 후로 내가 제일 애청하는 곡은 아멜링의 ‘An die Musik’가 되었고, 내가 신문에 쓰는 음악 칼럼의 문패도 ‘An die Musik’로 결정됐다. 슈베르트의 매혹적인 노래에 얽힌 에피소드는 그렇게 내 친구들 사이에서 전설이 되었다.
‘An die Musik’는 2절로 이루어진 짧고 소박한 가곡이다. 자연스러운 선율에 ‘음악에게’라는 제목의 대표성 덕분에 6백 곡이 넘는 슈베르트의 가곡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그래서인지 이 노래는 우리 세대의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실렸다. 그것도 수록 음악 1백 곡 중 첫 페이지에 실려 한국의 기성세대 대부분이 기억하는 노래가 되었다. 내 아내는 여태까지 음악 교과서를 보관하고 있는데, 색 바랜 표지를 조심스럽게 넘기면 예스럽게 번역된 한글 가사가 눈에 들어온다. “아름답고 즐거운 예술이여, 마음이 서글퍼진 어둔 때, 고운 가락 고요히 들으면서, 언제나 즐거운 맘 솟아나, 내 방황하는 맘 사라진다.” 아내는 독창 대회 때 이 노래를 전교생이 모인 강당에서 불렀다고 한다.
노랫말을 쓴 사람은 슈베르트의 절친 프란츠 폰 쇼버다. 귀족으로 시인, 화가, 배우까지 다채로운 삶을 즐긴 재주꾼이었다. 슈베르트와 워낙 붙어 다녀서 ‘쇼베르트’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문제는 이 친구가 여자에게도 인기가 많아 밤 문화를 거리낌 없이 즐겼는데, 이것이 슈베르트에게 치명적 불행이 되고 말았다. 같이 어울려 유흥과 쾌락을 탐닉한 슈베르트는 한창 음악적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한 시기에 몹쓸 병에 걸리고 말았다. 병이 깊어지자 감염을 두려워한 쇼버는 발길을 끊었다. 그는 86세까지 장수했다.
쇼버가 쓴 노랫말의 특징은 음악을 의인화했다는 점이다. 1절 첫 부분이 “너 사랑스러운 예술”로 시작되고 후반은 “너는 내 마음을 따뜻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했지” 하면서 마무리된다. 2절도 마찬가지다. “너의 감미롭고 성스러운 화음은 나에게 더 나은 시간의 하늘을 열어주었지.” 이처럼 관념적인 음악 세계를 나와 마주 보며 소통하는 대상으로 본 시각이 독특하다.
친구 S는 같이 있을때 ‘An die Musik’를 나직이 부르기도 한다. 부드러운 음성의 테너다. 그런데 어느 날 생각난 듯 아바ABBA 이야기를 꺼냈다. 슈베르트의 ‘An die Musik’가 스웨덴 팝 그룹 아바의 노래 ‘Thank You for the Music’과 통한다고 했다. ‘An die Musik’는 마지막에 “너 사랑스러운 예술이여, 나는 너에게 감사하다”며 끝을 맺는다. 아바는 ‘Thank You for the Music’ 후렴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누가 음악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인생은 어떨까? 노래와 춤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일까? 그래서 나는 음악에 대해 감사하다고 이야기해, 나에게 재능을 줘서.” 두 노래 모두 이렇게 음악에 감사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친구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Thank You for the Music’을 흥얼거린다. 진정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덕분에 만날 때마다 나도 음악에 대한 사랑과 감사가 깊어간다.
writer Choi Jeongdong 기행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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