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O THE NATURAL BLACK
인테리어 디자이너 아비게일 아헨Abigail Ahern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과감하게 블랙 컬러를 사용해 고정관념을 무너뜨린다. 그녀의 집에는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살아온 고유의 발자취가 담겨 있다.
다이닝 룸에서 보이는 창가 거실 모습. 노출 벽돌 벽, 계단을 감싸는 우드 패널, 매끄러운 콘크리트 바닥 등을
활용해 상업적·사적 공간의 경계 없이 연출했다
공간을 지배하는 블랙 미감
아비게일 아헨Abigail Ahern은 남편 그레이엄 스콧Graham Scott, 반려견 모드Maud와 뭉고Mungo를 위해 집 안 구조를 바꾸면서 페인트 브랜드 보워리Bowery의 허드슨 블랙 Hudson black 컬러를 선택했다. 그리고 바닥, 기둥, 벽, 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물론 천장까지 과감히 칠했다. “이렇게 공간을 올 블랙으로 채우니 무드가 새로워집니다. 어둠, 슬픔, 우울 등을 떠올리게 하는 블랙 컬러는 주거 공간 인테리어에서 배척하는 색깔 중 하나인데, 사실 제 집 프로젝트를 통해 컬러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보고 싶었어요. 블랙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죠.” 그 때문인지 이 공간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시그너처 컬러로 반타 블랙을 활용해 초월적 미감의 설치 작품을 선보이는 현대미술가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을 보았던 경험이 떠오른다.
“블랙은 넓고 깊게, 한층 공간이 확장되어 보이는 뛰어난 배경 효과를 발휘하죠. 지저분한 구조나 형태를 정돈하고 불협화음 같은 소품과 가구를 조화로워 보이게 만들어요. 패션도 마찬가지예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블랙으로 매치하면 다른 컬러보다 더 주목을 끌죠.” 그녀는 벽난로, 거울, 조명 등 소품에도 블랙 컬러를 칠하고, 어두운 컬러의 앤티크 소품을 매치했다. 샹들리에, 러그, 가구 등도 화이트, 그레이 같은 무채색 계열로 맞춰 전체적으로 통일감을 주었다.
세상의 시작과 끝을 품다
깊은 동굴에 온 것 같은 신비하고 묵직한 무드 속에서도 서서히 편안함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무엇보다 복층까지 이어지는 대형 창으로 가득 들어오는 빛과 열대 정원을 연상시키는 푸른 식물은 대자연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그녀는 최초의 컬러를 강조하는 뜻으로 창가, 계단 옆은 물론이고 구석구석 푸른 식물을 배치했다. 통통한 몸매를 자랑하는 선인장, 이파리가 갈기갈기 찢겨 있는 몬스테라, 줄기가 매끈한 고무나무, 깃털처럼 부드러운 양치식물 등 주로 아열대식물이다. 비가 자주 내리는 런던 날씨를 고려해 기분 전환을 위해 생각한 아이디어. 사파리 분위기의 아웃도어 가구로 합을 맞췄다.
블랙 컬러 공간이 가장 큰 매력을 발산하는 때는 어두운 밤이다. 밤이 되면 고요한 어둠 속에서 벽과 천장이 사라진다. 사방이 투명해지고 식물 형태는 또렷해진다. 마치 깊은 숲속에서 야영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별처럼 반짝이는 대형 샹들리에와 촛불처럼 곳곳을 밝히는 작은 조명이 평화로운 기운을 선사할 때면 어둠은 사라지고 빛만 남는다. “이렇게 반짝이는 조명을 받고 있으면 블랙이 때론 블루, 그린, 레드 등 다른 컬러로 보여요. 사실 세상 모든 컬러를 섞으면 블랙이 되잖아요. 검은색은 세상의 모든 컬러를 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빛나지 않는 유일한 색이죠. 세상의 시작과 끝이 이 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블랙은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며 패션, 미술, 영화, 건축 등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색으로 대접받고 있어요.”
창의성, 낯선 것에 대한 즐거움
자신의 스타일을 두고 ‘고정된 스타일이 없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라고 설명하는 아비게일 아헨.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정식으로 인테리어 디자인 코스를 밟은 적이 없다. 테렌스 콘란
출판사에서 인테리어 북 이미지 에디터로 활동했고, 미국으로
건너가 건축가 스튜디오에서 일한 것이 전부다. 하지만 에디터
경력으로 터득한 날 선 감각과 색다른 기획력, 건축 스튜디오에서 터득한 추진력과 행동력은 타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차별점을 만들었고, 프로젝트는 금세 입소문을 탔다. 많은 스타 디자이너가 뜨고 지는 영국 런던이지만, 그녀는 꾸준히 성장하며
입지를 넓혀나갔다. 현재 그녀는 영국 및 유럽뿐 아니라 뉴욕을 중심으로 한 미주 지역에까지 클라이언트를 보유하고 있다.
그녀는 맞춤 인테리어를 원한다면 다른 디자이너를 찾아
가보라고 조언한다. 기능, 실용, 효율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창의적 디자인이다. “전 타협보다 인내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많은 디자이너가 클라이언트의 요구 조건을 맞추다 결국 평범한 결과를 도출하는 사례를 봐왔어요. 전 클라이언트와 믿음을 쌓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이 제 본능과 감각을 믿고 서로 인내하길 바라는 거죠. 창의성이란 낯선 것에 대한 즐거움이라 생각해요.” 인테리어 디자인은 물질적 개조가 아니라
심리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이라 생각하는 그녀는 페인트 조합은 물론 어울리는 가구, 조명 등 각종 소품을 직접 만들기를
고집한다. 집이 취향을 드러내고 창의적 영감을 얻는 공간으로
확장되면서 가구에도 실용성 이상의 미감이 필요해졌다. 공간이 아니라 집주인과 교감할 수 있는 가구가 필요한 시대.
런던 이슬링턴의 아비게일 아헨 매장에서는 이런 노하우가 깃든 캐주얼 라인의 가구와 소품은 물론 페인트 브랜드 보
워리에서 아비게일 아헨 라인으로 소개하고 있는 베드포드 브라운Bedford Brown, 허드슨 블랙, 매디슨 그레이Madison
Grey, 멀버리 레드Mulberry Red 등 어두운 색조의 페인트를
구입할 수 있다. 자주 찾는 가게인 크레이트 앤드 배럴Crate
and Barrel, 파리의 메르시Merci에서 선택한 이색 제품도 볼
수 있다. 그중 인기 제품은 플로리스트인 여동생 젬마와 함께
만든 조화 장식품. “이 또한 호불호가 분명한 소품 중 하나입니다. 보통 생화 대체품으로 조화를 선택하다 보니 생화 복제품 수준의 조화만 볼 수 있죠. 실용성과 효율성이 상상력과 창의력을 방해하는 예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조화를 꽃병, 그릇,
조명 같은 장식 소품으로 생각하고 장식미와 예술성을 더한 인테리어 소품으로 승화시키고 싶어요.” 인테리어 소품처럼 자연스레 벽난로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부채처럼 화려하게 펼쳐진 양치식물, 블랙 컬러로 장식한 잎사귀 더미 등은 수직, 수평으로 이뤄진 단조로운
장식을 역동적으로 바꾸는 장치다. 다이닝 룸 벽돌 벽에 걸려
있는 리스 모양 장식품도 보헤미안 스타일과 야생미를 첨가하는 포인트 장식품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꽃병과 함께 두지 않고 벽에 걸고, 조명에 두르고, 바닥에 펼쳐놓는 등 연출 방식도
남다르다. 부담스럽게 느껴질 법한 과한 장식품 또한 천장 전체를 뒤덮은 검은색 덕분에 현란함은 생동감으로, 의외성은 흥미로움으로 바뀐다.
신선함을 더하는 요소, 재활용
그녀는 작품이 완성되면 가장 먼저 집에 가지고 와 직접 사용감을 확인해본다. 그래서 집 안 곳곳에 프로토타입 가구가 배치되어 있다. 그녀는 수시로 가구를 옮기며 그에 어울리는 소품과 믹스 매치하는 실험을 한다. 세월이 만드는 아름다움의
힘을 신뢰하는 그녀는 앤티크 시장에서 발굴한 것들로 새로운
분위기를 창조한다. 거실 벽을 가득 채운 예술 작품은 모두 앤티크 시장에서 구입한 무명 작가의 작품들. 연대도, 작가명도,
스타일도 알 수 없지만 예술품의 오라가 공간과 어울린다고 생각해 구입했다. 앤티크 프레임에 현대 작가 그림을 매치하거나,
현대 조각품 위에 앤티크 조명 갓을 씌워 새로운 용도로 전환하는 등 신선한 아이디어도 돋보인다. “가구를 배치할 때 샹들리에나 커다란 원형 커피 테이블을 방 한가운데에 놓고 시작합니다. 질서 정연하게 배열하기보다 쉼표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드문드문 무질서하게 배치하죠. 특히 부피 있는 가구의
경우 수직, 수평, 동선을 생각하다 보면 오히려 답답해 보이는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어요.”
연관성 없는 복잡한 아이템을 믹스 매치하고 조화롭게 풀어내는 감각이 뛰어나지만 재활용 아이디어도 남다르다. 지하
공간을 수리하다 남은 벽돌은 다이닝 룸과 계단 공간 포인트
벽으로 변신시켰고, 정원에서 구한 나무 그루터기와 나뭇가지는 테이블과 조명 기구로 부활시켰다. 매번 새롭게 공간을 바꾸고 소품을 교체할 것 같지만 그녀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것은
보통 10년 이상 함께한 것. 거실에 놓여 있는, 편집숍 ‘민트’에서 구입한 콘크리트 의자와 조지 스미스의 캐시미어 소파는 무려 20년 동안 함께했다. 다이닝 룸의 대리석 테이블 또한 15년
전 구입한 것이지만 새것처럼 잘 관리하고 있다. 이처럼 그녀의 공간은 어떤 스타일로도 설명할 수 없으며, 이는 그녀가 진행한 인테리어 프로젝트도 마찬가지다. 공통점이라 한다면 언제나 컬러, 형태, 디자인에 관련해 반전이 숨어 있고, 브랜드와
예술품을 따지지 않고 어떤 형태의 소품도 인테리어 디자인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엮어낸다는 것이다.
writerGye Anna
editorKim Minhyung
photographerBirgitta Wolfgang Bjørnv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