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예술
오랜 미술사의 전통이 쌓아온 환영주의, 특히 회화적 관습을 탈피하고자 했던 도널드 저드. 그의 시선을 빌려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예술은 또 다른 세계로 확장된다
전후 추상미술이나 팝아트와 함께 미국 모던 아트를 대표하던 미니멀리즘은 최근 들어 인테리어나 패션 같은 우리 생활 전반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미적 가치로 자리 잡았다. 도널드 저드Donald Judd는 흔히 미니멀리즘의 대가로 불리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미니멀리스트로 규정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미니멀리즘이란 용어를 거부한 대신
그는 1964년 발표한 에세이 ‘특수한 사물(Specific Objects)’을 통해 공간 속에서 확장되는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한 바 있다. 저드의 작품은 일견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 작업 과정에서 그는 재료의 본질과색상의 다양한 층위를 둘러싸고 많은 고민과 성찰의 시간을 가지면서 완벽한 균형감을 바탕으로 한 통일체를 구축하고자 했다.
“저드의 육방형 구조물 형태의 작품 제작 및 조립 방식은 매우 간결하고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 내재된 실재성에는 긴박한 에너지가 함축되어 있다. 독특한 분할 방식으로 제작한 저드의 육방형 작품들은 명확한 공간, 즉 의도가 다분한 비움을 생성하는 수단이다.”
— LACMA 관장 마이클 고반Michael Govan
있는 그대로의 미술
작년 가을, 타데우스 로팍 서울(2023년 9월 4일~11월 4일)에서 성황리에 열린 도널드 저드의 개인전을 살펴보자. 이 전시는 특정한 주제를 드러내기보다 공간의 어울림을 중요시했던 작가의 가치관을 반영하듯, 입체와 평면을 아우르는 작품들이 전시장과 조응하는 디스플레이로 관람객을 매료시켰다. 오랜 미술사의 전통이 쌓아온 환영주의, 특히 회화적 관습을 탈피하고자 했던 도널드 저드는 있는 그대로의 정직한 모습을 새롭게 보여주려 했다. 알루미늄, 플렉시글라스, 합판 등의 재료를 이용한 3차원 작품은 일반적인 조각처럼 좌대 위에 놓여 있지 않고, 벽면 또는 바닥에 붙어 새로운 공간감을 경험하게 한다. 특히 이 전시에 출품된 목판화 20점은 의미가 깊다. 도널드 저드가 1991년 한국을 방문해 개념화한 작품을 처음으로 한국에서 전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Seoul
Donald Judd Art ©Judd Foundation/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Photo: artifact
판화 제작, 그리고 한지
사실 도널드 저드와 한국의 인연은 남다르다. 도널드 저드는 18세 때 입대해 1년여간 한국의 미군 공병대에서 복무했던 이력이 있다. 최근 저드 파운데이션Judd Foundation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작가의 젊은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을 찍은 장소는 다름 아닌 한국의 김포다. 도널드 저드는 1947년 제대 뒤 이듬해 뉴욕으로 이주해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으며, 1년 후에는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 미술사와 철학을 공부했다. 작가로서 초기에는 <아트 뉴스>, <아트 인터내셔널>, <아트 매거진> 등 여러 미술 잡지에 비평을 싣기도 했다. 이후 1960년대에 입체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면서 가장 대표적인 ‘쌓기’ 작업 등으로 미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신세계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있는 ‘Untitled’라는 제목의 두 작품, 빨간색을 주조로 한 1979년 작과 검은색의 1990년 작도 이 ‘쌓기’ 작업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이후 저드는 또 중요한 시기에 한국을 방문해 1991년과 1992년에 인공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도널드 저드는 단순히 작품만 전시한 것이 아니라 전쟁 시기를 지나 안정화된 한국에서 그간 잘 몰랐던 한국의 역사적·문화적 매력에 흠뻑 빠지는 기회를 가졌다. 인공화랑 대표 황현욱(1948~2001), 화가 윤형근(1928~2007)과 친밀하게 교류하던 중 경북 안동으로 여행을 가기까지 했다. 여기에 대구 출신 미술인 몇몇도 합류해 하회마을의 민가에서 다 같이 숙식했던 일은 미술계에 익히 알려진 일화다. 특히 이때 함께 방문했던 병산서원 만대루에서의 인상 깊은 경험이 말년의 저드에게 얼마나 큰 사상적 영향을 끼쳤는지 미술 평론가 황인이 밝힌 기사도 있다(월간 <샘터>, 2016년 6월호). 타데우스 로팍의 전시를 기획한 저드 파운데이션 예술 감독 플래빈 저드 역시 어린 시절 한국에서 보낸 군 복무 시기가 작가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며 “어린 나이에 다른 문화를 접하고 새로운 정보와 영향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이번에 출품된 판화 작품은 작가가 1990년대 한국에 머물 때 접한 한지로 제작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작가는 3차원 작품에 관심을 두고 있으면서도 판화 작업을 좋아했다. 그래서 계속 판화를 제작했고, 그것은 작가에게 유희적인 일이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Donald Judd, Untitled, 1985, Painted aluminum, 30×150×30cm,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Seoul
Donald Judd Art ©Judd Foundation/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사진: 안천호
Donald Judd, Curated by Flavin Judd. Thaddaeus Ropac, Paris, 6 April—15 June 2019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Seoul Donald Judd Art ©Judd Foundation/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Photo ©Thomas Lannes
오직 미술로 충만한 삶과 공간
그의 삶과 예술을 좀 더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 아직도 미국에 두 군데 남아 있다. 한 곳은 텍사스의 마파Marfa라는 사막 지역에 저드가 약 1,322,300㎡(약 40만 평) 규모로 설립한 치나티 파운데이션이다. 그러나 그보다 규모는 작지만 접근성이 훨씬 좋은 뉴욕의 작업실을 더 추천하고 싶다. 스프링 스트리트 101번지, 이른바 ‘소호’라 불리는 쇼핑 거리에 있는 이 장소를 저드가 매입한 1968년 무렵만 해도 이 동네는 주변에 철물 공장 등이 모여 있던 공장 지대였으며, 예술가들로 북적였다. 저드는 자연광이 환하게 드는 탁 트인 이 공간을 작업실 겸 살림집으로 개조해 가족과 함께 살면서 주변 작가들을 초대했다. 총 5층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에 응접실, 주방, 전시실, 작업실, 침실이 검소하면서도 반듯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침대로 동양식 침상 또는 전시장에서 좌대 없이 바닥에 놓아둔 입체 작품처럼 널따란 나무 합판 위에 얇은 매트리스를 깔고, 머리맡에는 스탠드 조명과 전화기만 놓아두었다.
또 그와 친분을 나눴던 동료 작가들의 흔적이 공간 곳곳에 가득하다. 칼 안드레Carl Andre의 건축용 벽돌 더미, 댄 플래빈Dan Flavin의 창문 격자무늬를 딴 형광등 조각,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의 패브릭 조각, 존 체임벌린John Chamberlain의 초기 자동차 조각이 있으며, 욕실 문 옆에는 저드가 존경했던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의 레디메이드 작품 ‘Snow Shovel’도 걸려 있다. 저드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쯤 된 2013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하기 시작해 지금도 저드 파운데이션 웹사이트에서 미리 예약하면 방문할 수 있으며,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75분 동안 관람할 수 있다. 입장료는 1인당 32.5달러인데, 눈에 띄는 것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공간을 그대로 유지하며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한 도널드 저드의 유지를 이어가며 뉴욕과 마파를 관리하는 저드 파운데이션의 현재 운영자는 타데우스 로팍 전시를 기획한 아들 플래빈 저드와 딸 라이너 저드Rainer Judd. 자녀의 이름을 각각 동료 작가 댄 플래빈과 무용가 이본 라이너 Yvonne Rainer에서 따서 지었을 만큼, 도널드 저드의 삶은 미술로 충만했던 ‘맥시멀리스트’가 아닐까.
ARTIST PROFILE도널드 저드DONALD JUDD, 1928~1994 |
writerHo Kyoungyun 아트 저널리스트
editorKim Minhy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