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숲에서 그윽함을 생각하다
일상의 삶에서 깊이 스며든 어떤 것을 느낄 때 세계는 그윽해진다.
화려함은 쉽게 우리 눈을 사로잡고, 우리 영혼을 매혹한다. 그 덕에 소셜 미디어에는 봄의 꽃,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을 즐기는 사진이 넘친다. 당연하다. 행복은 현재를 대하는 마음에 달린 법. 때에 맞춰 세계의 눈부심을 만끽하지 않는다면, 이 험한 세상에서 작은 기쁨조차 움켜쥐기 어렵지 않겠는가.
하나 겨울을 온전히 누리는 건 쉽지 않다. “어디서 꽃을 찾을까?/ 어디서 푸른 풀을 찾을까?/ 꽃은 죽어서 사라졌고,/ 잔디는 이리도 창백하니.”(‘넘쳐흐르는 눈물’ 중에서) 독일 시인 하이너 뮐러는 겨울을 부재와 소멸의 계절로 묘사한다. 차가운 바람, 몰아치는 눈보라, 헐벗은 나무, 황량한 대지가 우리 기운을 떨어뜨리고 마음을 피폐하게 한다.
뮐러는 겨울 풍경을 연인 잃은 여행자의 슬픔에 빗댄다. “차가운 눈송이들은 목마른 듯/ 내 뜨거운 고통을 들이마시네.”(‘넘쳐흐르는 눈물’ 중에서) 차가움과 뜨거움, 목마름과 들이마심의 대비가 선명하다. 냉혹한 계절은 불타는 고통을 부추기고, 찢긴 가슴은 그리움을 들쑤신다. 겨울이 되면 몸은 움츠러들어 슬픔의 집으로 기어들고, 정신은 쪼그라들어 우울의 방에 틀어박히기 쉽다. 겨울은 창백한 죽음의 계절이다.
그러나 겨울은 가장 완벽한 계절이기도 하다. “늦겨울 태어나는 아침은/ 가장 완벽한 자연을 만들기 위하여 오는 것.”(기형도, ‘겨울・눈・나무・숲’ 중에서) 겨울 숲을 거닐면서 시인은 헐벗은 나무와 마주친다. 상실의 슬픔에 젖은 시인에게 나무는 침묵의 말을 건넨다. “나는 여기 있다./ 죽음이란/ 가면을 벗은 삶인 것.”
겨울나무엔 온전히 자기만 남아 있다. 나무는 가면을 벗고, 즉 화사한 꽃도, 싱그러운 이파리도, 타오르는 단풍도 없이 민낯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잎을 감추고 꽃을 가림으로써 나무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부재는 존재를 드러낸다. 나무의 겨울은 상실의 계절이 아니라 ‘내가 여기 있음’을 선언하는, 진정한 나의 탄생을 알리는 생성의 축제다. 시인이 겨울을 완벽한 계절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봄꽃이 우리를 즐겁게 하고, 여름 녹음이 우리를 안식하게 하며, 가을단풍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면, 겨울 숲은 우리를 정화한다. 덧없음의 세계를 통해 우리 삶을 심오한 질문 속으로 던져 넣는다. 인생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어디로 향하는가, 결국엔 무엇인가. 벌거벗은 나무를 바라보면서 시인은 상실의 슬픔에 몸부림친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는 나무의 신비로운 속삭임을 듣는다. ‘거짓 자아를 버리고 자기 민낯을 바라보라!’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삶만이 완벽함에 이를 수 있다.
겨울나무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등바등 살아남으려 뒤집어썼던 허위의 가면, 남들 눈치에 맞추어 억지 자신을 연출하려고 썼던 겉치레를 벗는 사람이 진정한 자신을 만난다. 시인은 그 새로운 자아를 청결하다고 말한다. 타락한 세상에서 벗어나 때 묻지 않는 솔직함으로 되돌아간 존재인 까닭이다. 겨울나무처럼 되는 것, 즉 자신과 타인을 속이는 숱한 겉치레를 넘어 자기 자신에 이르는 것은 위대함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말했다. “모든 사유와 시의 영광, 우주의 시선은 그 깨달음 뒤에 온다.” 겨울 숲은 우리를 이러한 성찰의 장으로 이끈다.
언뜻 보면 겨울 숲은 적막한 듯하다. 그러나 겨울나무의 목소리를 듣는이에게 겨울 숲은 비어 있지 않고 충만하며, 적막하지 않고 고요하다. 노자는 말했다. “바글거리는 피조물이 모두 각자의 뿌리로 돌아간다. 자기 뿌리로 돌아가는 걸 고요함[靜]이라고 한다.”
나무는 봄에 싹을 틔워 무성히 이파리를 내보내고, 여름에 꽃을 피워 화려함을 뽐내며, 가을에 열매를 맺어 세상에 쓸모 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힘써 이룩했다고 모두 가치 있는 건 아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대부분 드러난 꽃과 열매보다 보이지 않는 뿌리에 달려 있다.
겉보기를 모두 잃고 나서야 나무는 뿌리를 떠올린다. 고요히 자신을 돌보면서 존재의 근원에 귀 기울이는 성찰의 시간을 산다. 그럴 때 겨울 숲은 윌리엄 워즈워스가 노래하는 성스러운 장소가 된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드높은 생각의 기쁨으로 나를 흔드는/ 어떤 현존, 훨씬 깊이 스며들어 있는/ 어떤 것,/ (중략)/ 모든 것을 통해 굽이치는/ 어떤 움직임과 어떤 영.”(‘틴턴 수도원 가는 길’ 중에서) 이 힘을 느껴 자기 안으로 데려오는 각성의 여정일 때 겨울 숲 산책은 완벽함에 이른다.
일상의 삶에서 깊이 스며든 어떤 것을 느낄 때 세계는 그윽해진다. 그윽함이란 깊고 고요하고 포근하다는 뜻이다. 직접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진 않으나, 마음이 존재의 신비로운 힘, 영적 움직임을 감지할 때, 우리는 세계의 그윽함을 깨닫는다. 그윽한 세계는 현상이 아니라 심층을 지향하기에 깊고, 가지가 아니라 뿌리를 바라보기에 고요하며, 표피가 아니라 근원에 닿아 있기에 어머니에게 안긴 듯 포근하다. 일상의 세계가 괴로울수록 더욱더 그윽함의 세계가 필요하다. 가장 큰 행복은 물질의 충족에 달린 게 아니라 존재의 충만함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누구보다 그윽함 속에 거주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모든 것에서 나는/ 본질에 다다르고 싶다./ 일에서, 길의 추구에서,/ 마음의 혼란 속에서.”(‘모든 것에서 나는’ 중에서) 심지어 그는 일하거나 글을 쓸 때만이 아니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할 때조차 본질에 이르기를 열망했다. 파스테르나크는 삶의 모든 순간에서 존재의 비밀스러운 속삭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운명, 사건의 가닥을/ 놓치지 않으며/ 살고,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발견을 이루고 싶다.” 쇼팽이 농장, 공원, 숲, 무덤의 생생한 경이를 음악에 집어넣었듯, 그는 장미와 박
하와 풀과 우레의 소리에 온전히 귀를 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스탈린 체제는 파스테르나크의 아름다운 서정시를 삶과 유리된 반동 문학으로 몰아붙였다. 선전, 선동에 자기 언어를 얹고 싶지 않았기에 그의 삶은 피폐해졌다. 허위의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그의 운명은 조각배처럼 흔들렸다. 그러나 파스테르나크는 위선의 가면을 쓴 채 굴욕을 견디는 대신 벌거벗은 나무처럼 되기를 갈망했다. 삶의 모든 순간에서 본질에 이르는 길을 추구했다. 정권의 가혹한 감시를 피해 몰래 시를 쓰고 <닥터 지바고>를 집필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눈은 그의 길을 곤죽으로 만들고, 삶 전체를 진창으로 변하게 했다. 그러나 파스테르나크는 세계의 그윽함을 느끼는 자, 존재의 부름에 답하
는 자에게 구원이 있다고 믿었다. “나는 숲으로 들어가며 서두르지 않는다./ 얼어붙은 눈이 층층이 내려앉는다./ 새에게 하듯 메아리가 내게 화답할 것이다,/ 온 세상이 내게 길을 열어줄 것이다.”(‘모두 이루어졌다’
중에서) 세계의 맹추위에 맞서 시인은 인간 존엄과 삶의 의미를 지키려 했다. 메아리가 화답하고, 온 세상이 길을 열어줄 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가혹한 추위도 우리를 상실과 죽음에 영원히 가두지 못할 것이다.
겨울 숲은 고요하다. 외롭게 떠는 나무만 있기에 세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기 자신에 이르기 참 좋다. “인간은 이 땅 위에 시적으로 거주한다.”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말이다. 삶은 문학을 닮을 때 온전해진
다. 세계의 그윽함을 감지하고 존재의 노래를 들으며 사물의 목소리에 어떻게 응답하냐에 따라 삶의 궁극적 가치는 달라진다. 겨울 산책만큼 이를 깨닫기 좋은 곳도 드물다.
writerJang Eunsu 출판 편집인·문학평론가
editorJo So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