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 이후의 지형, 포스트 단색화
세계 미술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한국 미술 장르인 단색화. 이를 통해 현대미술 제1세대 작가들이 재조명되며 글로벌 현대미술사에서 한국 미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이후 세대에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단색화 이후, 포스트 단색화의 담론적 특징과 비평적 이슈는 무엇일까?
2010년대 한국 미술이 남긴 가장 가시적인 업적은 단색화가 미술사적으로 깊이 있게 조명받았다는 점일 것이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단색화 회고전 〈한국의 단색화〉(윤진섭 기획)가 대대적으로 열린 이후,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병행 전시의 일환으로 단색화 전시가 기획되었고 아트 바젤 홍콩 2015가 개최되는 동안 소더비 홍콩 갤러리에서 단색화 특별전 〈아방가르드 아시아〉가 개최되었다. 당시 특별전에는 일본 구타이 전시도 같이 기획되었는데, 한국전의 경우 박서보의 묘법과 정상화의 초기 추상 및 정창섭, 하종현, 김창열, 김환기, 이우환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모노크롬 경향의 작품
을 가리키는 단색조 회화는 가까이서 보면 희끗희끗 하면서도 여러 톤의 색채를 지닌 단색화 특유의 미학적 특징을 보여준다. 이후 화이트 큐브, 페로탕, 블
룸&포 등 세계적인 갤러리에서 개최된 한국 단색화 전시는 미술 시장에서 가치를 높이고 글로벌 현대미술사에서 한국 미술의 존재를 더욱 깊이 각인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처럼 현대미술 제1세대 작가들이 국내외 미술사에서 재조명된 것은 이후 세대에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포스트 단색화에 대해
우선 포스트 단색화의 정의를 살펴보자. 포스트 단색화는 단색화 이후의 모노크롬 작가들을 일컫는다. ‘단색화’라는 용어는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통해 주요 용어로 인정받았다. 이 용어는 비평가 이일이 모노크롬 회화를 ‘단색화(이일, ‘회화의 새로운 부상과 기상도 76년: 오늘의 한국 미술을 생각하면서’, 〈공간〉 1976년 9월호)’로 지칭했고, 필자가 진행한 박서보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1990년대 부산시립미술관이 기획한 단색화 전시를 통해 파편적으로 사용된 적이 있다. 여기에 ‘포스트’의 의미를 더해보자. 포스트는 시대적으로 ‘이후’를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대항적인(against)’이라는 뜻을 지닌다. 전자는 세대나 시간의 개념을 의미하며, 후자는 조금 더 미학적 관점에서의 포스트에 가깝다.
물성에 대한 강렬한 실험 정신
미술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은 단색화가 해외 전시에서도 인정받게 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 세대의 과제다. 현재 북미, 유럽 뮤지엄에서 박서보의 단색화, 이우환의 모노하를 비롯해 한국 현대미술, 동시대 미술을 소장품으로 사들이기 시작한 점도 고무적이다. 단색화는 글로벌 맥락에서 추상화의 흐름을 보여주지만 해외의 모노크롬 회화나 색면파 등과 달리 물성(materiality)에 대한 강렬한 실험 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많은 단색화 작가가 한국의 실험 미술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단색화 작가들이 매체 확장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는 포스트 단색화에서도 엿보이는 특징이다. 이에 비해 아그네스 마틴의 그리드 추상회화나 애드 라인하르트의 블랙 페인팅 작품은 물성보다는 평면성(flatness)을 강조한다. 단색화, 포스트 단색화 작가들은 화면의 물질성을 강조해 엄청난 노동과 집중력을 기울이며 ‘무위’의 정신 상태에 도달하고자 한다. 또 포스트 단색화 작가들이 아크릴이나 유화에 제한을 두지 않고 다양한 재료를 통해 물성과 신체의 개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도 서로 비슷하다. 포스트 단색화는 우리가 주로 보아온 추상이지만 서구의 추상미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추상회화의 물질적 특징을 구현하며, 긴 시간을 할애해서 만들어내는 수공과 노동력을 담고 있다. 단색화 작가들은 매체에 관심이 높은 시대에 작업했던 사람들로 사물 자체, ‘물’ 자체를 미학적으로 사유했던 세대다. 이들은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가며 한국 사회에서 산업화와 테크놀로지의 유입을 경험했던 세대로, 국제 활동을 위한 정부 지원 제도조차 없었던 시기를 겪었다. 하지만 전위예술과 실험, 국제 활동에 대한 욕망은 남달랐다. 단색화 작가로 알려진 박서보도 1970년 오사카 엑스포 한국관의 대표 작가로 참여할 때 달리는 현대인의 조각을 제작해 회화의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연필과 물감으로 ‘글쓰기’를 하는 묘법으로 전통(서구) 회화를 극복 하려는 실험을 했다. 모노하 운동의 리더인 이우환의 실험, 물감을 마대 뒤에서 밀어내 작업하는 하종현의 회화와 실험 미술, 이강소와 이건용의 회화, 실험적인 퍼포먼스 등은 이들이 모두 회화의 한계에 묻히지 않았음을 새롭게 알려준다.
기억해야 할 작가
포스트 단색화 작가는 이들에 비하면 한두 세대 젊은 작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작고한 김태호도 1.5세대 단색화 작가로 분류되며, 물성 자체를 강조하기 위해 캔버스에 끊임없이 물감을 쌓아 올리는 ‘방법’을 택했다. 단색화 이후의 포스트 단색화를 이야기할 때 함께 논의해야 하는 미술가들이 또한 여성 단색화 작가다. 2022년 가을 삼청동 갤러리 도스에서 개최된 〈여성, 또 다른 추상〉전에서는 김태호 작가처럼 1.5세대쯤으로 분류되는 윤미란 작가의 단색화가 재조명되었다. 화가 윤미란은 한지와 실, 캔버스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작가다. 윤미란의 작품은 종이 자체의 텍스트에 주목하며, 한지를 손으로 하나씩 자르고 붙이는 수행 과정을 통해 ‘몰입’에 이른다. 화면은 크고 작은 사각형 그리드를 구성하며 분할과 경계, 포용의 선을 만들어간다. 윤미란은 한지의 표면과 물성을 이용하지만, 화면을 두껍게 구성하는 단색화가 김태호와 달리 균질적 화면을 구축한다. 인터뷰에서 작가는 한지가 “붓의 역할을 맡은 굵고 가는 면실을 통해 작가의 삶 전체를 표출”하며, “손으로 뜬 한지의 두께와 재료에 따른 독특한 종이가 면실에 의해 자유로이 찢기고, 뜯기고, 상처를 받음”으로써 종이 표면이 다양하게 표현되는 물성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겉으로 볼 때는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조건적 상태, 물성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지만, 작가는 보면 볼수록 ‘강한 느낌’을, ‘전통적 한국의 어머니상’을 연상시킨다고 설명한다.
윤미란
YUN MIRAN
1948년 출생, 1971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와 1982년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와 버클리의 KALA 인스티튜트를 거쳐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김현식
KIM HYUNSIK
1965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 1992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학고재를 비롯해 모거 모던 아트, 아트 로프트 등 국내외 기관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아트 바젤 홍콩, 아트 브뤼셀 등 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모노크롬 회화와 포스트 단색화
포스트 단색화 작가로서 물성 자체에 주목하며 모노크롬 회화를 구축해나가는 작가로는 김근태(b. 1953), 김춘수(b. 1957), 김택상(b. 1958), 장승택(b. 1959), 김현식(b. 1965), 박현주(b. 1968) 등이 있다. 김근태는 돌과 같은 자연의 재료나 백자, 불상, 석탑 등의 표면에서 느껴지는 물성을 캔버스에 구현하는 반면, 김춘수는 붓 대신 신체의 행위성을 강조해 ‘울트라-마린’ 회화를 완성해나가며 신체의 행위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퍼포먼스적이다. 2023년 리만 머핀 갤러리(서울)에서 전시회를 연 바 있는 김택상은 백색에 가까운 전통 단색화 색채를 벗어나 아크릴을 사용하며 은은하게 스며드는 평면 효과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숭고미를 느끼게 한다. 물감을 이용해 빛의 효과를 만드는 그의 작업은 캔버스에 희석된 아크릴 입자가 캔버스 위에 자연스럽게 가라앉아 색이 쌓이는 긴 여정으로, 물리적이면서 현상학적인 시간과의 조우를 의미한다. 단순히 그리는 행위에 천착하지 않고 물성이 시간성을 띠며 캔버스 위에서 표면화되는 여러 과정이 반복된다. 장승택은 특유의 ‘겹회화(Layered Painting)’ 시리즈에서 1.2m의 대형 특수 붓질을 20회 이상 반복해 붓의 흔적을 겹겹이 쌓는다. 물감이 마르면 다른 색을 올려 틈과 틈 사이로 선의 경계가 만들어지는 시각적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 하나의 색이 화면을 지배하지만 자세히 보면 무수히 많은 붓 자국을 통해 물성의 시간성이 길게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겹’은 여러 레이어드를 쌓는 회화의 방법론을 말하기도 하지만, 작가와 사물 사이에 놓인 수많은 상황과 시간이 화면 위에 지속적으로 기록된 작가의 포스트 단색화의 미학관을 반영한다.
김현식의 ‘현玄을 보다’ 연작 작품들은 나무 판 위에 레진을 바르고 이후 첨필로 그은 다음 다시 물감을 바르고 표면을 긁어내는 노동의 과정을 거친 포스트 단색화의 세계다. 레진을 이용하고 첨필로 긋는 행위를 통해 무수히 많은 선이 드러나는데, 작가는 이를 ‘현’이라고 부른다. ‘Beyond the Color’ 연작 또한 특유의 물성, 시간성과 사각 캔버스의 한계를 초월해 정신성을 드러내려 한다. 초기에 템페라 기법을 연구했던 박현주는 다양한 재료를 탐색하고 실험함으로써 묘한 빛과 색채를 만든다. 그의 추상은 아크릴과 여러 안료를 혼합해 다른 추상회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비균질적 화면을 만든다. 포스트 단색화가들은 다양한 안료, 특정 색과 매체를 중첩하며 물질성을 강조하는데, 이를 통해 엄청난 노동력과 집중력 그리고 새로운 추상성이 발현된다.
우리 세대의 과제
결국 미술 시장의 최대 승자는 미술사적인 평가와 기록으로 남겨진 작품들의 세계다. 글로벌 미술사의 재정립이라는 동시대적 조건과 환경 속에서 여전히 한국 미술계가 할 일이 많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단색화, 포스트 단색화, 여성 단색화 작가 재발굴 작업을 위한 담론 연구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3월, 신세계갤러리에서는 포스트 단색화 작가들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는 〈블라섬 아트페어〉(~3월 31일)를 준비했다. 장승택, 김현식, 박현주 등 앞서 언급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포스트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을 한층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그 이면에 깃든 아름다움을 사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본점 BLOSSOM ART FAIR
신세계백화점 본점 본관에서는 2024년 봄, ‘BLOSSOM ART FAIR’를 개최합니다. BLOSSOM ART FAIR는 컬렉터블한 작품으로 구성된 ONLY 신세계 아트페어입니다. 올해로 7회를 맞이한 이번 행사의 콘셉트는 〈2024 신세계의 봄〉입니다. 깊이 있는 색감의 포스트 단색화 작업으로 유명한 장승택, 김현식, 박현주, 윤미란 작가의 작품을 포함해 ‘봄’의 화사함을 느낄 수 있는 국내 주요 작가 50여 명의 200여 작품을 본점 본관 전 층에 선보일 예정입니다. 행사 기간에는 전문 큐레이터가 상주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도와드립니다.
참여작가
김현식, 박현주, 윤미란, 장승택, 강준영, 구성수, 구자승, 김강용, 김용훈, 김은정, 김종학, 김재용, 김혜나, 나라 요시토모, 류장복, 박광수, 박서보, 배준성, 안성하, 우고 론디노네, 이배, 이우환, 전광영, 쿠사마 야요이, 콰야, 황도유 外 다수
일시 2024년 3월 1일~31일
장소 본점 본관 전 층(B1F~5F)
문의 02-727-1275
writerChung Yeonshim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
editorKim Minhy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