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세상에는 환란이 끊이지 않는다. 인류를 위협하는 전염병이 온 세계를 휩쓸고, 땅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넘쳐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기후변화는 가혹하다. 타는 듯한 더위는 고통을 넘어 공포를 느끼게 하고, 끝없이 쏟아지는 폭우는 인간의 역사를 끝장낼 듯 폭력적이다. 이런 와중에도 어떤 나라는 전쟁을 일으켜 문명을 파괴하고 많은 인명을 살상한다. 민초들은 이런 재난 앞에 무기력하다.
환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옛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재난에 시달렸다. 한반도의 옛 신라인이 어떤 고통을 겪었으며, 그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에 실려 있는 만파식적 이야기다.
때는 서기 682년, 신문왕 2년이다. 바다일을 관장하는 관리가 왕에게 아뢰기를, 동해에서 작은 섬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와서 파도를 따라 왔다 갔다 한다고 했다. 이상하게 여긴 왕은 바다로 나가 살펴보았는데 산의 형세는 거북 머리처럼 생겼고, 그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며칠 뒤 왕이 배를 타고 섬으로 나아가 동해의 용을 영접해 산과 대나무에 대해 물었다. 용은 대나무를 가져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기뻐한 왕은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 오게 한 뒤 궁궐로 돌아와 피리를 만들었다. 그것은 신통력이 있었다.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비가 그치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다. 그리하여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고 한다.
신비하고 괴이한 내용이라 책에 기록된것을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 그러나 당시 신라인이 겪었던 재난이 어떤 것이었는지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이다. 문무왕은 왜구를 막기 위해 ‘동해의 용이 되어’ 바다에 묻혔으니 아들 신문왕에게도 왜구의 침입을 막는 것은 중요한 과제였다. 대나무를 가져온 곳이 부왕의 무덤이 있는 동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만파식적에는 외적으로 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호국 의지가 서려있는 것이다. 만파식적 이야기는 신라인이 다양한 고난에 직면했으며, 그중에서도 외적으 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일이 큰일이었음을 보여준다. 실존했든 기이한 이야기로만 전하든 만파식적이 모델로 삼은 악기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대금(大笒 , 젓대)일 것이다. 대금은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의 전통 관악기로 중금, 소금과 함께 ‘신라삼죽’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만파식적의 시대에 이미 있던 악기라는 뜻이다.
대금은 굵고 긴 대나무에 구멍을 뚫어 가로로 부는 악기다. 길이 약 80cm로 우리 관악기 중 가장 크다. 악기가 장대해서 한쪽 어깨에 얹고 고개를 틀어서 연주해야 한다. 이런자세로 연주하는 악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금이 유일하다. 음역이 넓고 음량은 풍부하며 소리는 구슬프고 신비하다. 몸통에 뚫린 청공淸孔에 갈대 속청을 붙이는데, 이것의 진동이 듣는 이의 가슴까지 서늘하게 하는 독특한 음색을 낸다. 악기 재료로는 골이 양쪽에 파인 쌍골죽을 으뜸으로 친다. 살이 두꺼워 야무진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나는 국악 중에서는 대금 음악을 즐겨 들어온 편이다. 김성진 명인이 연주한 대금정악과 이생강 명인이 연주한 대금산조 음반에 손이 자주 간다. 정악의 상영산, 중영산은 단정한 맛이 좋고, 청성곡은 청아한 맛이 일품이다. 산조는 한바탕 흥겨운 드라마를 즐길 수 있다. 그런데 거의 듣지 않던 대금 명인 원장현의 음반을 최근에 우연히 꺼내 들어보았다. ‘The Art World Of Won, Jang-hyon(원장현 의 예술 세계)’이라는 타이틀의 CD다. 음반에는 ‘젓대소리-즉흥곡 Ⅱ’라는 곡이 수록돼 있는데 이 곡이 의외의 감동을 안겨주었다. 명인은 혼과 같은 숨을 불어넣었고 순간 젓대는 폐부를 찌르는 소리를 냈다. 관을 울리는 소리는 탄식과도 같고 울음 같기도 했는데 그것은 상처받은 영혼을 다독이는 소리, 슬픈 이와 같이 울어주는 소리, 원혼을 위로하는 소리였다. 내 몸과 마음의 시름이 썰물처럼 씻겨나갔다. 그때 마음속에 떠오른 것이 만파식적이었다. ‘만파식적이 있었다면 이런 소리였겠구나!’
하지만 현재 우리에게 세상의 환란을 모두 잠재우는 피리는 없다. 하여 우리는 가슴속에 만파식적을 한 자루씩 품고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당연히 음악이다. 음악은 약한 듯 하지만, 세상 무엇보다 강하다. 마음속에 흐르는 한 소절 음악은 환란의 강력한 치료제다.
writerChoi Jeongdong 기행 작가 · 칼럼니스트
intern editorKang Ju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