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미식가 장 앙텔름 브리야사바랭은 말했다. “당신이 먹은 것을 알려주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나의 만찬 레스토랑이 어릴 때 기억을 반영하듯, 어디에서 무엇을 먹(으려 하)느냐는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이 사실을 인간 개성의 상징으로 최초로 이용한 작가가 오노레 드 발자크였다.
“손님들은 갓 내린 눈이 쌓인 강둑처럼 새하얗고 긴 식탁을 칭송하는 말을 던졌다. 완벽한 대칭 무늬를 자랑하는 식탁보 위에는 옅은 황금빛으로 구워진 롤빵이 왕관처럼 놓여 있었다. 불빛이 유리잔에 별처럼 반짝이며 무지개를 피워냈다. 촛불은 연달아 서로를 비추면서 일렁였다. 뚜껑으로 덮어놓은 음식은 식욕과 호기심을 모두 자극했다.”
발자크의 <나귀 가죽>에 나오는 사치스러운 저녁 만찬 장면이다. 그는 음식에 대한 집착, 즉 미각적 취향을 통해 한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고 인간 내면을 꿰뚫어보려고 했다. 발자크는 대도시가 형성되고 레스토랑이 탄생한 시대를 살았다. 우후죽순 생기는 맛집 중 어떤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무슨 식당에서 밥을 먹느냐, 또는 손님을 초대해 어떤 상차림을 내느냐는 자신이 시대의 어디쯤 있는지를 보여주는 민감성의 표지였다.
유행을 좇아서 쏟아지는 각종 요리를 만끽하려면 예나 지금이나 적잖은 돈이 들었다. 혀끝에 걸린 쾌락은 순간적인 데다 맛은 쉽게 물렸다. 음식의 첨단에 서는 것은 소박한 삶의 기쁨과 결별하는 일이고, 탐욕이 넘실대고 욕망이 타오르는 도시의 배꼽으로 뛰어드는 일이었다. “파리, 이제 너와 나의 대결이다!”
<나귀 가죽>은 그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소설의 주인공 라파엘 발랑탱은 가난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 유행은 절대 가난한 자의 것이 아닌데, 유행에 뒤처지는 일은 죽음보다 못하다! 이러한 판타지는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계를 전형적으로 드러낸다. 라파엘은 죽으러 가는 길에 우연히 들른 골동품점에서 소원을 들어주는 신비한 가죽 한 장을 얻는다. 가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원하라, 그대의 소원은 이뤄질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소망은 그대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대 목숨이 여기 들어 있다. 그대가 원할 때마다 나도 줄어들고, 그대의 살날도 줄어들 것이다.’
이것이 유혹의 원형이다. 욕망의 교환 대상은 돈이 아니라 목숨이다. 우리 삶에는 끝이 있는데, 우리 욕망은 점점 커진다. 유행은 짧다. 이슬처럼 영롱하다 한순간 사라진다. 더 많이 바라면 더 많이 애써야 하고, 더 많이 애쓰면 우리 인생의 날들은 갈수록 짧아진다. 유행을 좇는 삶은 목숨을 당겨 쓰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발자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은 경고했다. “배 속에는 악마가 살고 있다. 그놈이 모든 걸 망쳐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