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미국 포트워스에서 열린 밴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 임윤찬의 얼굴이 TV에 떴을 때, 나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본 다비드(다윗)상을 떠올렸다. 소년답게 갸름한 얼굴이지만 콧날이 우뚝하고 무엇보다 강렬한 눈매가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와 마찬가지로 임윤찬의 깊은 눈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다비드의 눈엔 적에 대한 분노가, 임윤찬의 눈엔 예술혼이 밝게 빛나는 것이겠다.
옛 조각상을 닮은 신예 피아니스트의 등장에 감탄할 무렵 그의 육성이 전해졌다. 그것은 수려한 그의 얼굴만큼 신선하고,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웠다. 금메달을 목에 건 18세의 임윤찬이 최초로 내놓은 소감은 ‘심란하다’였다. “제가 아직 너무 준비가 안 된, 너무 부족한 음악가인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을 받아서 너무, 올해 들어서 가장 심란한 마음이에요.”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압도적 기량으로 우승한 그가 수줍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검은 머리칼을 사자 갈기처럼 휘날리며 건반을 맹폭하던 피아니스트는 온데간데없었다.
“우승으로 인한 관심은 3개월뿐이고 대단한 업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콩쿠르 우승했다고 제 실력이 느는 것은 아니지요”, “산에 들어가서 피아노만 치며 살고 싶습니다” 등 뒤이은 말들은 그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설명해준다. 듣는 사람을 조금은 당황스럽게 만든 이런 어록語錄급 발언은 하루아침에 유명해진 것이 부담스러워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얼마나 깊은 음악을 들려줄 것인지가 제 콩쿠르의 목표였습니다.”
자신의 음악에 영감을 준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임윤찬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대답을 했다. “울분을 토한 다음에 갑자기 나타나는 우륵의 가야금 소리, 모든 것을 초월한 상태….” 질문을 한 사람은 바흐나 쇼팽 같은 서양 건반 음악의 대가를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임윤찬은 이 땅의 고대 음악가 우륵을 불러냈다. 우륵의 예술 세계는 <삼국사기>에 뚜렷하게 기록돼 있다. 가야의 우륵은 12곡의 가야금 음악을 지었는데, 그가 신라에 귀화한 후 진흥왕이 5곡으로 간추렸다. 우륵은 자신의 음악을 이렇게 자평했다. “즐겁지만 넘치지않고, 애절하지만 슬프지 않다(樂而不流 哀而不悲).” 한마디로 절제미다. 격정적인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감정을 폭발시키는 순간에도 임윤찬은 ‘애이불비’한다는 것이고, 그때 가슴속에서 우륵이 미소 짓는다는 것이다. 그런 교감을 통해 음악은 초월의 세계로 비상한다는 것이고…. 임윤찬의 우륵 이야기는 우리의 정신으로 서양음악을 연주하고 듣는 단계로 한국 사회의 클래식 수준을 진화시켰다.
임윤찬의 첫 음반은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나왔다. 타이틀은 <베토벤·윤이상·바버>다. 지난해 10월 광주시향과의 실황 연주를 담은 것이다. 밴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후 선보인 첫 음반이지만 콩쿠르에서 연주한 곡은 한 곡도 싣지 않았다. 지휘자마저 감동의 눈물을 훔치게 만든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 ‘게임 끝’이라는 느낌을 줬던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도 없다. 대신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가 음반의 주인공이다. 임윤찬은 왜 다소 식상한 ‘황제’를 선택했을까. “인류에게 큰 시련이 닥치면서 저도 매일 집에서 연습만 하다 보니 5번에서 베토벤이 꿈꾼 유토피아와 그가 바라본 우주를 느끼게 되었어요.
”임윤찬은 베토벤의 협주곡 중에서는 1번이나 3, 4번을 좋아한다고 한다. 첫머리부터 피아노 솔로 카덴차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5번은 지나치게 화려한 곡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인류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시련을 겪자 ‘황제’ 작곡 당시의 베토벤을 떠올리게 됐다. 그 시절 베토벤은 나폴레옹전쟁의 혼란에 휘말려 경제적 고통과 함께 귀가 멀어가는 절망적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베토벤은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음악적 이상과 우주를 거침없이 펼쳐 보였다. 방에서 혼자 건반을 두드리던 임윤찬은 비로소 ‘황제’가 그저 기교를 자랑하는 곡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음반에 ‘황제’를 실은 것은 고난을 겪는 지구촌 사람들에게 ‘힘내라’고 외치고 싶기 때문이다. 임윤찬이 생각하는 음악은 어떤 것일까. “인간이 언어를 하지 못할 때 음악을 통해 소통합니다. 가장 깊은 아픔을 겪을 때 음악이 탄생하지요.” 철학자처럼 말하는 이 젊은 피아니스트가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writerChoi Jeongdong 기행 작가·칼럼니스트
editorKim Minhyung